3화(5,550자)

비 오는 이닝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덕아웃 지붕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5회 초였다⁠. 처음에는 톡⁠, 톡⁠, 하고 하나씩 셀 수 있었는데⁠, 6회가 되자 지붕 전체가 자글자글 끓었다⁠. 우철은 벤치 끝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가방 지퍼를 반쯤 열어 두었다⁠. 강화로 내려갈 짐이었다⁠. 스파이크 두 켤레⁠, 배트 세 자루⁠, 손목 테이프⁠. 짐을 싸는 손이 빨랐다⁠. 여러 번 싸 본 짐이었다⁠.

3루 응원석에 비옷 두 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란 비옷은 미강이었고⁠, 노란 비옷 소매 밑으로 포수 미트가 삐져나온 작은 비옷은 탄우였다⁠. 미강이 휴대전화를 들어 덕아웃을 향해 흔들었다⁠. 메시지가 왔다⁠.

「⁠짐 싸는 거 다 보여⁠. 양말은 챙겼어⁠?⁠」

「⁠챙겼어⁠」

「⁠거짓말⁠. 양말은 내 차에 있어⁠」

6회 말 해무 공격이 시작될 무렵 하늘이 하얗게 번쩍했다⁠. 셋을 세기도 전에 천둥이 구장을 흔들었다⁠. 주심이 두 팔을 휘저었고 구장 관리 직원들이 방수포를 끌고 내야로 뛰어들었다⁠. 방수포가 젖은 잔디를 쓸고 가는 소리가 길게 났다⁠.

*

우천 중단 사십 분째⁠, 덕아웃 바닥에 빗물이 고였다⁠. 선수들은 라커룸으로 들어가지 않고 덕아웃에 남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의찬이 방수포 가장자리로 슬금슬금 나가더니 휴대전화를 덕아웃 기둥에 세워 두고 방수포 위로 배를 깔고 미끄러졌다⁠. 물보라가 일었다⁠. 선수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의찬아⁠, 조회 수 몇 나오냐⁠?⁠”

“⁠선배님⁠, 이건 무조건 백만이에요⁠. 제목도 정했어요⁠. 「⁠AI가 안 시킨 슬라이딩⁠」⁠”

우철의 휴대전화가 떨렸다⁠. 영상 통화였다⁠. 화면 가득 해바라기씨 봉지가 먼저 보였다⁠. 강화 2군 구장의 경팔이었다⁠. 뒤로 낡은 철제 관중석과 논이 보였다⁠.

“⁠배 병장⁠, 거기 비 오냐⁠? 여긴 해 떴다⁠.⁠”

“⁠말소 짐 싸고 있습니다⁠, 감독님⁠.⁠”

“⁠코치라니까⁠. 아니다⁠, 이제 총괄이다⁠. 육성 총괄⁠. 직함만 길어졌다⁠.⁠”

경팔이 씨를 깨물었다⁠. 딱⁠, 소리가 휴대전화 스피커로 작게 갈라졌다⁠.

“⁠짐 싸는 건 경기 끝나고 해라⁠. 경기 끝나기 전에 싸는 놈치고 마지막 타석에서 치는 놈 못 봤다⁠.⁠”

“⁠마지막 타석이 없습니다⁠.⁠”

“⁠비 오는 날은 몰라⁠. 비 오는 날은 공이 미끄럽고⁠, 미끄러운 공은 숫자대로 안 간다⁠.⁠”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덕아웃 천장에서 퍽⁠, 소리가 나고 불이 꺼졌다⁠. 화면도 꺼졌다⁠. 화면 아래 스피커가 지지직 하고 긁는 소리를 내더니 조용해졌다⁠. 바깥 조명탑 절반이 같이 꺼져서 구장이 한쪽으로 어두워졌다⁠. 관중석에서 아⁠, 하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석배가 태블릿 두 개를 끌어안고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서버 연결이⁠…⁠…⁠.⁠”

석배가 휴대전화로 누군가를 불렀다⁠. 청람의 원격 기술팀이었다⁠. 석배는 한 손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태블릿을 두드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네⁠, 덕아웃 전원이 나갔어요⁠. 네⁠, 보조 전원요⁠? 어디 있는데요⁠?⁠”

화면이 다시 켜진 것은 칠 분 뒤였다⁠. 하얀 바탕에 해무 마린스 로고가 떴다가 사라지고⁠, 라인업이 차례로 올라왔다⁠.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작은 회색 글씨가 떠 있었다⁠. 「⁠항로 3⁠.1 · 비상 복구⁠」

석배가 작은 글씨를 한 번 보았다⁠. 우철은 석배의 눈이 화면 구석에 멈춘 것을 보았다⁠. 석배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태블릿으로 고개를 숙였다⁠.

*

경기는 한 시간 십 분 만에 다시 시작됐다⁠. 비는 가늘어졌지만 그치지 않았다⁠. 내야 흙이 검게 젖었고⁠, 투수들은 공을 던질 때마다 바지에 손을 닦았다⁠.

8회 말⁠, 2 대 3⁠. 해무가 두 명이 아웃된 뒤 몸에 맞는 공과 볼넷으로 1루와 2루를 채웠다⁠. 무등 썬더스가 마운드에 왼손 투수를 올렸다⁠. 키가 크고⁠, 공을 던지기 전에 로진 가루를 세 번씩 묻히는 투수였다⁠.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후보 줄이 위아래로 한 번 섞였다⁠. 맨 위에 올라온 이름을 보고 덕아웃이 조용해졌다⁠.

「⁠1⁠. 배우철 · 기대 출루 0⁠.38 · 대타 권장⁠」

스피커가 고른 목소리로 말했다⁠.

“⁠대타⁠, 배우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찬이 헬멧을 반쯤 들었다가 내려놓고 우철을 돌아보았다⁠. 석배가 화면을 보고⁠, 태블릿을 보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형⁠. 항로가 형을 불렀어요⁠.⁠”

“⁠들었다⁠.⁠”

“⁠아니⁠, 진짜로요⁠. 카드 안 썼어요⁠.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알아⁠. 지퍼 소리 안 났다⁠.⁠”

우철은 반쯤 싸 둔 가방에서 배트 한 자루를 뽑았다⁠. 개막전 공 자국이 하얗게 남은 배트였다⁠. 헬멧을 쓰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대타 배우철 — 항로 선택⁠」 관중석이 개막전보다 더 크게 터졌다⁠. 노란 비옷 두 벌이 동시에 일어났다⁠.

*

타석에 들어서자 빗소리가 헬멧을 두드렸다⁠. 탁⁠, 탁⁠, 타닥⁠. 헬멧 안에서 빗소리가 울리니 다른 소리가 잘 안 들렸다⁠. 우철은 헬멧 귀덮개를 손으로 한 번 눌렀다가 떼었다⁠. 귀덮개와 귀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빗소리가 조금 물러났다⁠.

포수가 미트를 두 번 쳤다⁠. 무등의 포수는 서른 살이었고⁠, 공을 부를 때마다 정강이 보호대를 미트로 툭 건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난해 우철이 열 번 넘게 들은 소리였다⁠. 툭 한 번이면 몸쪽⁠, 툭툭 두 번이면 바깥쪽⁠.

툭툭⁠.

초구는 바깥쪽 슬라이더였다⁠. 우철은 그냥 보냈다⁠. 볼⁠. 투수가 공을 받아 바지에 손을 박박 닦고 로진 가루를 세 번 묻혔다⁠. 가루가 젖은 손에 뭉쳐 하얀 반죽처럼 붙었다⁠.

툭⁠.

두 번째 공은 몸쪽 직구였다⁠. 우철은 파울을 냈다⁠. 공이 3루 덕아웃 지붕을 때렸다⁠. 덕아웃에서 누가 ‘⁠아이고⁠’ 하고 소리쳤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투수가 다시 손을 닦았다⁠. 이번에는 로진을 두 번만 묻혔다⁠. 손가락이 미끄러운 날 커브를 던지는 투수는 로진을 덜 묻힌다⁠. 가루가 뭉치면 실밥이 손가락에서 안 빠진다⁠. 경팔이 십 년 전 덕아웃에서 해 준 말이었다⁠.

툭툭⁠.

바깥쪽 커브였다⁠.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끝이 덜 감겼다⁠. 실밥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진 소리 없는 소리였다⁠. 커브가 떨어지지 않고 허리 높이로 둥실 떠서 왔다⁠. 우철은 왼발을 바깥쪽으로 반 발 내딛고 배트를 밀었다⁠. 오른쪽 팔꿈치 안쪽에서 개막전 때의 뜨거운 실이 다시 당겨졌다⁠. 이번에는 더 길게 당겨졌다⁠.

딱⁠.

공이 비를 뚫고 우중간으로 날아갔다⁠. 중견수와 우익수가 동시에 달렸고⁠, 공은 둘 사이 젖은 잔디에 떨어져 미끄러지듯 펜스까지 굴러갔다⁠. 1루 주자가 2루를 돌고⁠, 3루를 돌았다⁠. 2루 주자는 이미 홈을 밟았다⁠. 중계 플레이가 한 번 뒤로 빠졌다⁠. 1루 주자가 홈에 배를 깔고 들어갔다⁠. 빗물이 튀었다⁠.

4 대 3⁠.

2루 베이스에 선 우철은 숨을 몰아쉬며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감쌌다⁠. 보호대 밑이 화끈거렸다⁠. 3루 응원석에서 노란 비옷 하나가 의자 위로 올라가 있었다⁠. 탄우였다⁠. 미강이 탄우의 비옷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배우철 대타 통산 101호 안타⁠」

해무는 9회 초를 막고 4 대 3으로 이겼다⁠.

*

관중이 빠져나가는 동안 3루 덕아웃 끝 그물 앞으로 노란 비옷 두 벌이 내려왔다⁠. 선수 가족이 경기 뒤에 잠깐 서 있어도 되는 자리였다⁠. 탄우가 그물에 얼굴을 대고 미트를 두 번 두드렸다⁠. 빗물이 그물코마다 맺혀 있었다⁠.

“⁠아빠⁠, 항로가 아빠 골랐어⁠.⁠”

“⁠그랬지⁠.⁠”

“⁠그럼 이제 항로가 아빠 편이야⁠?⁠”

우철은 대답하기 전에 헬멧을 벗었다⁠. 머리에서 김이 났다⁠.

“⁠항로는 편이 없어⁠. 숫자만 있지⁠.⁠”

“⁠그럼 숫자가 아빠 편이네⁠.⁠”

탄우가 그물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우철은 왼손으로 손바닥을 마주 댔다⁠. 그물 때문에 손바닥 사이에 젖은 줄이 하나 끼었다⁠. 미강은 탄우 뒤에서 비옷 모자를 벗지 않고 서 있다가⁠, 우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2루에서 팔꿈치는 왜 잡았어⁠?⁠”

“⁠물기 닦았어⁠.⁠”

“⁠왼손으로⁠? 보호대 위를⁠?⁠”

“⁠보호대가 젖었잖아⁠.⁠”

“⁠당신 거짓말할 때 대답이 빨라져⁠. 연애할 때부터 그랬어⁠.⁠”

미강은 더 묻지 않았다⁠. 탄우의 비옷 모자를 씌워 주고 관중석 계단으로 향했다⁠. 몇 계단 올라가다가 뒤를 보지 않고 소리쳤다⁠.

“⁠양말은 차에 있다⁠!⁠”

*

경기가 끝나고 한 시간도 안 돼 중계 영상이 숏폼으로 퍼졌다⁠. 의찬이 라커룸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선배님⁠! 제 슬라이딩보다 선배님 2루타가 조회 수 높아요⁠! 이거 말이 돼요⁠?⁠”

“⁠말이 된다⁠.⁠”

영상 위에는 방송사가 넣은 자막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항로의 선택⁠, 마흔 살 대타⁠」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AI가 아재를 골랐다⁠」⁠, 「⁠귀신 같은 AI⁠」⁠, 「⁠이 아저씨 지난주엔 9순위였는데⁠?⁠」 「⁠연안부두 늙은 갈매기들⁠」 단톡방은 알림이 너무 많이 와서 우철의 휴대전화가 뜨거워졌다⁠.

「⁠항로 형님 사랑합니다⁠」 「⁠항로가 우리 편이었네⁠」 「⁠석배는 카드 안 써도 됨 항로가 알아서 함⁠」

우철은 휴대전화를 엎었다⁠. 엎은 휴대전화가 벤치 위에서 계속 떨렸다⁠.

라커룸 문이 열리고 홍보팀 직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배 선수님⁠, 단장님이 올라오시랍니다⁠. 지금요⁠.⁠”

*

단장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비스듬히 줄을 그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직원들이 방수포를 다시 덮고 있었다⁠. 세겸은 창가 탁자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다가⁠, 우철을 보자 손가락 하나를 들어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네⁠, 부사장님⁠. 네⁠. 저도 봤습니다⁠. 네⁠, 반응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말소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세겸이 전화를 끊고 우철을 보았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빗소리가 유리창을 계속 두드렸다⁠.

“⁠축하드립니다⁠. 1군에 남으십니다⁠.⁠”

“⁠항로가 골라서요⁠?⁠”

“⁠청람이 원해서요⁠. 청람 부사장님이 저 영상을 세 번 보셨답니다⁠. ‘⁠AI가 고른 마흔 살⁠’이 광고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요⁠.⁠”

“⁠청람이 왜 우리 구단 광고를 원합니까⁠?⁠”

세겸은 대답하지 않고 탁자 위 서류철을 하나 밀었다⁠. 표지에 「⁠해무 마린스 × 청람테크 광고 촬영 협조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에 촬영입니다⁠. 대사는 하나예요⁠. ‘⁠항로 감독님을 믿습니다⁠.⁠’ 출연료는 구단이 아니라 청람이 직접 드립니다⁠. 사모님 배팅장 이자 정도는 됩니다⁠.⁠”

“⁠우리 집 이자까지 아시네요⁠.⁠”

“⁠숫자는 다 기억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우철은 서류철을 열지 않았다⁠.

“⁠단장님은 오늘 저를 내리려고 하셨죠⁠. 항로는 저를 올렸고요⁠. 그럼 오늘은 항로가 틀린 겁니까⁠, 단장님이 틀린 겁니까⁠?⁠”

세겸이 창밖을 보았다⁠. 방수포 위로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가 반짝였다⁠.

“⁠오늘은 비가 왔습니다⁠, 배 선수님⁠. 비 오는 날은 숫자도 미끄럽습니다⁠.⁠”

“⁠추 감독님이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분한테 배웠습니다⁠. 저 어릴 때 그분이 해무 3루 코치였거든요⁠.⁠”

세겸이 서류철을 우철 쪽으로 한 뼘 더 밀었다⁠.

“⁠화요일입니다⁠.⁠”

*

화요일 저녁 경기 전⁠, 덕아웃 화면에 라인업이 올라왔다⁠. 선수들이 하나둘 화면을 올려다보다가 웃음을 멈췄다⁠. 대타 후보 줄 맨 위는 다시 의찬이었다⁠. 맨 아래⁠, 아홉 번째 줄에 우철이 있었다⁠.

「⁠9⁠. 배우철 · 기대 출루 0⁠.10 · 오늘 출전 권장 안 함⁠」

의찬이 머리를 긁었다⁠.

“⁠선배님⁠, 일요일엔 1등이었는데요⁠?⁠”

“⁠일요일엔 비가 왔지⁠.⁠”

석배는 화면 앞 접이식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있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을 보고 있었다⁠. 작은 회색 글씨가 떠 있었다⁠. 「⁠항로 3⁠.2⁠」

석배가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우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화면에 대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형⁠. 일요일엔 3⁠.1이었어요⁠.⁠”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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