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836자)
라인업 화면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덕아웃 벽에서 낮은 팬 소리가 났다. 냉장고보다 가늘고 형광등보다 굵은 소리였다. 배우철은 벤치 끝, 배트 걸이 바로 옆에 앉아 눈을 반쯤 감고 팬 소리를 들었다. 지난겨울 구단이 덕아웃 벽을 뜯어내고 박아 넣은 대형 화면에서, 열을 식히는 팬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바닷바람이 외야에서 홈으로 불어와 그물망을 흔들었고, 조명탑 꼭대기에서 갈매기 두 마리가 서로 시비를 걸었다.
화면 맨 위에 하얀 글자가 떴다.
「해무 마린스 2032 개막전 라인업 · 작성: 항로」
선발 아홉 명 아래로 대타 후보가 줄줄이 내려갔다. 맨 위는 신인 외야수 도의찬이었고, 우철의 이름은 아홉 줄 가운데 맨 아래였다.
「9. 배우철 · 기대 출루 0.11 · 오늘 출전 권장 안 함」
“삼촌 선배님, 권장 안 함이래요.”
의찬이 휴대전화로 화면을 찍으며 웃었다. 스물두 살 신인은 손가락이 빨랐다. 벌써 숏폼 앱에 올릴 글자를 치고 있었다. 「AI 감독님 첫 라인업 실화냐」
“권장 안 하는 거지 금지는 아니잖아.”
“선배님, 근데 모자 각도가 너무 영포티예요. 챙을 그렇게 꺾으면 제 또래는 아재 판정 내려요.”
우철은 남색 모자 챙을 한 번 더 꺾었다. 짧게 친 머리 사이로 흰머리 몇 가닥이 삐져나왔고, 무성한 눈썹 아래 눈가로 웃음 주름이 길게 잡혔다. 두꺼운 몸통에 남색과 하얀색 줄무늬 유니폼이 팽팽했다. 굵은 팔뚝을 무릎에 얹자 오른쪽 팔꿈치의 낡은 보호대가 벤치 모서리에 닿았다. 보호대 안쪽 고무가 닳아 실밥이 보였다. 여덟 해를 찬 보호대였다.
“영포티가 뭔지는 아는데, 너 영식스티는 아냐?”
“그건 뭔데요?”
“지금 저기 오는 분.”
벤치 코치 추경팔이 해바라기씨 봉지를 뜯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쉰여덟 살 전 감독은 지난해까지 해무의 감독이었고, 올해부터는 벤치 코치였다. 경팔이 씨 하나를 앞니로 깨물자 딱, 하고 마른 소리가 났다. 뒷주머니에 빨간 카드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어이, 배 병장. 오늘도 짬밥 서열 꼴찌냐?”
“권장 안 함이랍니다, 감독님.”
“감독 아니다. 코치다. 감독은 저기 저 벽.”
경팔이 턱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 아래 스피커에서 고른 목소리가 나왔다.
“선수단 여러분, 개막전입니다.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십시오.”
경팔이 껍질을 바닥에 퉤 뱉었다.
“삼십 년 야구에 물 마시라는 감독은 처음이다.”
화면 바로 아래 접이식 의자에서 데이터 코치 위석배가 태블릿 두 개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석배가 말했다.
“형, 항로 말 잘 들으면 올해 우리 5할은 넘어요.”
“5할 넘는 데 나는 필요 없다며.”
석배는 대답 대신 안경을 한 번 더 밀어 올렸다. 맞서야 할 때마다 안경부터 만지는 버릇은 원정 숙소에서 여섯 해를 같이 쓰던 때와 똑같았다.
*
덕아웃 뒤 복도는 라커룸 냄새와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스파이크 바닥이 시멘트를 긁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우철이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단장 한세겸이 복도 한가운데서 웃고 있었다.
세겸은 남색 정장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서른여덟 살, 구단주의 아들이었다. 뒤에는 기자 둘과, 청람테크라는 AI 회사의 부사장이 따라왔다. 청람은 항로를 만든 회사였다. 부사장은 회색 운동화에 검은 정장을 입고, 덕아웃 화면을 제 아이 돌사진 보듯 했다.
“배 선수님, 잠깐만요.”
세겸이 기자들을 손짓으로 물리고 우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손에 든 태블릿 화면이 꺼져 있었다.
“오늘 7회 끝나고 클리닝 타임에 은퇴식 하시죠. 영상도 만들었고 꽃다발도 있습니다. 해무 스무 해, 박수 받고 내려가실 자리를 오늘로 잡았습니다.”
“시즌 시작하는 날에 은퇴식을 합니까?”
“시즌 시작하는 날이라 관중이 제일 많습니다. 2군 타격 코치 삼 년 계약도 같이 드립니다. 연봉은 지금 절반이 안 되지만, 삼 년은 보장입니다.”
우철은 세겸의 운동화 끝을 보았다. 흰 밑창에 흙 한 점 묻지 않았다.
“은퇴식은 제가 정합니다.”
“구단이 정합니다.”
세겸은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웃는 채로 목소리만 반 톤 낮췄다.
“오늘부터 덕아웃 지휘는 항로가 합니다. 리그가 시범으로 허락한 구단은 우리 하나고요. 추 코치님은 사람 카드 한 장만 들고 계시면 됩니다. 쓰지 마시고요.”
“카드는 쓰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보험은 안 쓰는 게 제일 좋은 보험입니다.”
복도 끝 텔레비전에서 경제 뉴스가 소리 없이 돌았다. 화면 아래로 자막이 지나갔다. 「해무해운 회사채 상환 또 미뤄 … 채권단 9월 말 시한」 바로 밑으로 한 줄이 더 지나갔다. 「해동리그 이사회, 시즌 뒤 ‘AI 단독 지휘’ 표결 예정」
세겸이 자막을 등졌다.
“배 선수님 데뷔 첫 안타가 2013년 6월이었죠. 3루 선상 2루타. 저 관중석에 있었습니다.”
“기억력 좋으시네요.”
“숫자는 다 기억합니다. 그래서 단장을 합니다.”
세겸이 기자들 쪽으로 돌아갔다.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굴러갔다.
*
경기는 처음부터 팽팽했다. 상대는 서울의 한양 블레이즈였다. 해무 선발이 6회까지 두 점만 내주고 내려갔고, 해무 타선은 한양 선발의 높은 직구에 방망이가 늦었다. 3루 덕아웃 벤치 끝에서 우철은 이닝마다 같은 일을 했다. 눈을 반쯤 감고, 포수 미트에 공이 꽂히는 소리를 하나씩 들었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아내 염미강이었다.
「은퇴식 거절했다며? 단장님이 나한테 먼저 전화했던데. 당신은 나한테 언제 말하려고 했어?」
「경기 중이야」
「당신 오늘 안 나오잖아. 경기 중은 무슨. 벤치 중이지」
우철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벤치에 엎었다. 미강은 구장에서 걸어서 칠 분 거리에 실내 배팅장을 했다. 계산대에 개막전 중계를 켜 놓고 기계에 공을 채우면서 남편 말꼬리를 하나도 안 놓쳤다.
3루 응원석에는 아들 탄우가 있었다. 리틀야구단 친구 다섯 명과 나란히 앉아 「아빠 한 방」이라고 쓴 종이를 무릎에 놓고 있었다. 7회 클리닝 타임에 전광판에 은퇴 영상 대신 경품 추첨이 뜨자 탄우가 종이를 다시 들었다. 우철은 덕아웃 그물 너머로 종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9회 초가 끝났을 때 점수는 3 대 4였다.
*
9회 말. 해무는 두 명이 아웃된 뒤에 볼넷과 내야 안타로 주자를 2루와 3루에 보냈다. 관중석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한양 마무리 투수가 로진 가루를 손에 털었다. 가루가 바닷바람에 날려 포수 쪽으로 흩어졌다.
화면에서 대타 후보 줄이 깜박였다. 스피커가 고른 목소리로 말했다.
“대타, 도의찬. 기대 출루 0.34.”
의찬이 헬멧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 헬멧 끈을 두 번 놓쳤다.
우철은 눈을 감았다. 관중석 함성 밑으로 한 가지 소리를 찾았다. 8회 말부터 들어 온 소리였다. 한양은 8회 말 1사에 벌써 마무리 투수를 올렸다. 8회에는 미트에 공이 꽂힐 때마다 탕, 하고 맑게 터지던 소리가 9회에는 퍽, 하고 탁해져 있었다. 미트 가운데가 아니라 손바닥 아래로 공이 빠지는 소리였다. 공 끝이 죽어서 포수가 받는 자리가 한 뼘씩 내려왔다.
우철은 눈을 뜨고 경팔을 보았다.
“감독님. 미트 소리 들으셨어요?”
“코치라니까.”
“아까부터 퍽 소리가 나요. 공이 안 떠요. 슬라이더도 안 꺾여요. 높은 공이 안 오면 저는 낮은 공만 기다리면 됩니다.”
경팔이 해바라기씨를 하나 깨물었다. 딱. 씨를 혀로 굴리며 화면을 보았다가 석배를 보았다. 석배가 고개를 저었다.
“코치님, 항로는 기대 출루 0.34 대 0.11이에요. 세 배예요.”
“세 배라.”
경팔이 껍질을 뱉었다. 뒷주머니에서 빨간 카드를 꺼냈다. 카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지난겨울 리그가 보내온 카드를 경팔은 날마다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배 병장. 헬멧 써.”
경팔이 덕아웃 계단을 올라가 주심에게 빨간 카드를 들어 보였다. 주심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록석에 손짓했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해무 마린스 사람 카드 사용 — 대타 배우철」
관중석이 한 박자 늦게 터졌다. 3루 응원석에서 「아빠 한 방」 종이가 위로 솟았다.
스피커가 말했다.
“사람 카드 사용이 확인되었습니다. 기대 승리 확률 하락.”
의찬이 헬멧을 벗어 우철에게 건넸다.
“선배님, 저 지금 엄청 다행이에요.”
“솔직해서 좋다.”
*
타석의 흙이 축축했다. 바닷바람이 습기를 몰고 와서 흙이 스파이크 밑에서 사각거리지 않고 질척하게 눌렸다. 우철은 타석 바깥 금을 오른발로 한 번 지우고 들어갔다.
포수가 마스크 안에서 웃었다.
“선배님, 은퇴식 안 하셨다면서요. 여기서 하시게요?”
“너 미트 바꿨냐? 소리가 이상하다.”
포수가 입을 다물었다. 미트를 한 번 주먹으로 쳤다.
초구는 몸쪽 높은 직구였다. 우철은 배트를 내지 않았다. 미트에서 퍽 소리가 났다. 볼. 두 번째 공은 바깥쪽으로 휘는 슬라이더였는데, 꺾이지 않고 밋밋하게 흘러가 바깥으로 빠졌다. 볼 둘.
투수가 로진 가루를 다시 털었다. 숨소리가 마운드에서 홈까지 오지는 않았지만, 투수의 어깨가 두 번 들썩이는 것은 보였다. 숨을 짧게 끊는 어깨였다.
세 번째 공. 투수의 왼발이 마운드 흙을 끌었다. 끌리는 소리가 길었다. 지친 다리였다.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우철은 이미 알았다. 높게 들어오다가 무릎 높이로 떨어지는 공이었다. 우철은 무릎을 굽히고 배트를 짧게 돌렸다. 오른쪽 팔꿈치 안쪽에서 뜨거운 실 하나가 당겨졌다. 보호대 밑에서였다.
딱.
공이 3루 선상으로 낮게 튀었다. 3루수가 몸을 날렸지만 공은 글러브 끝을 스치고 파울 라인 안쪽으로 굴러 좌익수 앞까지 갔다. 3루 주자가 들어왔다. 2루 주자가 3루를 돌았다. 좌익수의 송구가 바닷바람을 맞고 한 번 튀었다. 2루 주자가 홈에 미끄러졌다.
주심의 두 팔이 옆으로 펴졌다.
전광판에 「5 대 4 · 해무 마린스 끝내기 승」이 떴고, 밑에 작은 글씨로 한 줄이 더 떴다. 「배우철 대타 통산 100호 안타」
1루를 밟고 돌아선 우철을 선수들이 덮쳤다. 의찬이 물통을 통째로 우철의 머리에 부었다. 찬물이 등줄기로 흘렀다. 오른쪽 팔꿈치는 아직 뜨거웠다. 우철은 웃으면서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한 번 감쌌다가 놓았다. 3루 응원석에서 탄우가 리틀야구단 친구들 어깨에 매달려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은 보였다.
*
관중이 반쯤 빠져나간 덕아웃에 화면만 혼자 밝았다.
「경기 결과 분석 · 사람 카드 사용 1회 · 결과 기여: 우연」
경팔이 화면을 보고 크게 웃었다.
“우연이란다. 삼십 년 야구가 우연이래.”
계단 위에서 운동화 소리가 내려왔다. 세겸이었다. 혼자였다. 세겸은 화면 앞에 서서 「우연」이라는 글자를 한참 보고 나서 경팔을 돌아보았다.
“코치님, 내일부터 강화 2군으로 가십니다. 2군 육성 총괄입니다. 직함은 오히려 올라갑니다.”
경팔이 해바라기씨 봉지를 접었다. 봉지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카드 한 번 썼다고?”
“구단 지침을 어기셨습니다. 항로 지시를 뒤집지 않는다는 지침에 서명하셨잖아요.”
“리그는 쓰라고 준 카드다.”
“리그는 쓸 수 있다고 했고, 구단은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코치님 월급은 구단이 드립니다.”
세겸이 손을 내밀었다. 경팔은 빨간 카드를 한참 쥐고 있다가 세겸의 손바닥이 아니라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 위에 놓았다. 석배의 의자였다.
세겸이 카드를 집어 석배에게 건넸다.
“위 코치님. 오늘부터 덕아웃의 사람은 위 코치님입니다.”
석배가 카드를 받았다. 받는 손이 굳어 있었다.
“단장님, 저는 데이터 코치인데요.”
“그래서 맡깁니다. 위 코치님은 숫자를 믿으시잖아요.”
세겸이 우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철은 젖은 유니폼 그대로 벤치 끝에 앉아 있었다. 세겸이 웃었다.
“배 선수님, 오늘 좋았습니다. 진심입니다. 다음 타석은 항로가 정합니다.”
세겸이 돌아서다가 석배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덕아웃이 조용해서 목소리가 낮아도 다 들렸다.
“그 카드, 쓰시면 계약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