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69자)

돌아온 너구리

동물원 원숭이가 진짜 근두운을 얻었다 · 길담이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해오름 동물원은 아직 잿빛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불이 켜진 곳은 둘뿐이었다⁠. 정문 옆 경비실⁠, 그리고 원숭이 산 꼭대기에서 혼자 은은하게 빛나는 평상만 한 구름 한 덩이⁠. 구름 위에는 석봉이 다리를 벌리고 버티고 있었다⁠.

“⁠한 자 하고 두 치⁠.⁠” 석봉이 내려서자마자 말했다⁠. “⁠어제 구 분에 내 산이 한 자 두 치 내려앉았다⁠. 산 밑 칡넝쿨에 매달려 놀던 아이들이 놀라서 밤새 울었다⁠.⁠”

“⁠어제 손 흔들던 애들이요⁠?⁠”

석봉의 눈썹이 꿈틀했다⁠. “⁠보았느냐⁠?⁠”

“⁠셋인가 넷이요⁠. 하나는 웃었어요⁠.⁠”

“⁠웃은 놈이 내 막내 손자다⁠.⁠” 석봉이 손바닥을 털었다⁠. “⁠오늘은 한 발로 선다⁠. 한 발을 바닥에 대는 자가 진다⁠.⁠”

둘은 구름에 올라 저마다 한 발을 들었다⁠. 구름이 떠올랐다⁠. 꼬장은 장대 끝에서 만 번은 해 본 자세를 잡았다⁠. 들어 올린 무릎을 배 앞에 접고⁠, 대걸레 자루를 가로로 들고⁠, 왼손을 눈썹에 붙였다⁠. 석봉은 들어 올린 발을 반대편 무릎에 얹었다⁠. 화과산 벼랑 위에서 오백 년 동안 해 온 자세였다⁠.

구름이 천천히 기울었다⁠. 둘 다 흔들리지 않았다⁠. 일 분이 지나고 삼 분이 지났다⁠. 석봉의 이마에 땀이 맺혔고 꼬장의 종아리가 떨렸다⁠. 둘 다 이를 악물었다⁠.

사 분째에 경비실 문이 열리고 손전등 불빛이 원숭이 산 위로 올라왔다⁠. 새벽 순찰을 돌던 늙은 경비원이 하품을 하다 말고 손전등을 치켜들었다⁠.

“⁠어⁠? 저 오랑우탄은 또 뭐야⁠? 원숭이 산에 오랑우탄이 왜 있어⁠?⁠”

석봉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나는⁠! 오랑우탄이⁠! 아니다⁠!⁠”

고개와 함께 몸이 돌았고⁠, 몸과 함께 들고 있던 발이 내려왔다⁠. 발바닥이 구름에 철썩 닿았다⁠. 석봉은 한동안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꼬장은 한 발로 선 채 눈썹에 손을 붙이고 먼 데를 바라보는 자세를 끝까지 풀지 않았다⁠. 먼 데에서는 경비원이 눈을 비비고 있었다⁠.

“⁠오늘도 네 날이다⁠.⁠” 석봉이 이를 갈았다⁠. “⁠저 사람이 날 무어라 불렀는지는 잊어라⁠.⁠”

*

여섯 시⁠, 정문을 열러 나온 두식이 셔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현수막 아래 셔터 틈에 잿빛 털 뭉치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너구리였다⁠. 오른쪽 귀 끝이 찢어져 피딱지가 앉았고⁠, 배가 등에 붙어 갈비뼈가 손가락처럼 드러나 있었다⁠. 털에는 도깨비바늘이 잔뜩 박혀 있었다⁠.

두식은 장갑을 끼는 것도 잊고 너구리를 안아 들었다⁠. 너구리가 두식의 팔에 머리를 박고 낑낑댔다⁠.

“⁠너 어디 갔었어⁠. 어디 갔다가 왜 이 꼴로 와⁠.⁠”

너구리를 우리에 넣고 사료 그릇을 내려놓자⁠, 너구리는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숨도 안 쉬고 먹었다⁠. 그릇 바닥이 혀에 긁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먹었다⁠. 두식은 철망 앞에 쪼그려 앉아 너구리가 다 먹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

두식이 관리동으로 들어가자마자 꼬장은 구름을 몰아 토종 짐승 우리로 날아갔다⁠. 너구리는 빈 그릇을 안고 누워 있었다⁠.

“⁠왜 돌아왔어요⁠?⁠”

“⁠배고파서⁠.⁠” 너구리가 그릇을 핥았다⁠. “⁠숲에는 밥 주는 사람이 없더라⁠. 도토리는 작년 거라 다 썩었고⁠, 개구리는 내가 다가가면 먼저 알고 물로 뛰어들어⁠. 칠 년 동안 사료만 먹었더니 개구리 잡는 법을 몰라⁠. 밤에는 개들이 왔어⁠. 사람이 버린 개들이 떼로 다니더라⁠. 셋이 쫓아왔고 하나가 귀를 물었어⁠.⁠”

꼬장은 찢어진 귀를 보았다⁠. 할 말을 찾다가 겨우 하나를 꺼냈다⁠.

“⁠그럼 칠 년 동안 왜 담에 코 대고 살았어요⁠?⁠”

“⁠냄새가 좋으니까⁠.⁠” 너구리는 그릇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좋은 거랑 사는 거랑은 다르더라⁠. 나도 몰랐어⁠.⁠”

원숭이 산에서 이 대화를 다 들은 석봉이 한마디 보탰다⁠. 목소리가 담을 넘어올 만큼 컸다⁠.

“⁠그 숲이 너구리를 알아보더냐⁠?⁠”

꼬장은 대답 대신 구름을 돌렸다⁠. 구름 위에서 꼬장은 동물원을 한 바퀴 내려다보았다⁠. 담 안의 짐승들이 저마다 목을 빼고 원숭이 산을 보고 있었다⁠. 꼬장은 짐승마다 할 줄 아는 것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낙타는 물 없이 오래 걸었고⁠, 펭귄은 헤엄을 쳤고⁠, 불곰은 잠을 잘 잤다⁠. 수달 우리 앞에서 꼬장의 눈이 멈추었다⁠.

수달 한 쌍은 지난겨울 두식이 웅덩이에 풀어 준 산 미꾸라지를 한 마리도 안 놓치고 잡아먹었다⁠. 두식이 기뻐서 원숭이 산까지 와서 자랑을 했고⁠, 꼬장은 자랑하는 목소리로 미꾸라지 일을 알았다⁠.

*

수달은 구름 위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둘이 서로 꼬리를 쫓으며 뱅글뱅글 돌다가 구름 가장자리로 굴러갔고⁠, 굴러가며 앞발로 구름을 짚을 뻔해 꼬장이 대걸레 자루로 두 번이나 막았다⁠. 암컷이 수컷 등에 올라탔다가 수컷이 암컷 배 밑으로 빠져나왔다⁠. 사람이 보면 털 뭉치 두 개가 구름 위에서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서 있으라니까⁠!⁠”

“⁠우리는 물에서 서 있어⁠!⁠” 수컷이 외쳤다⁠. “⁠땅에서는 원래 굴러다녀⁠!⁠”

꼬장은 어제보다 무릎을 더 굽혔다⁠. 무릎을 뻣뻣하게 세우면 구름이 출렁일 때마다 출렁임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무릎을 물렁하게 두니 출렁임이 무릎에서 멈추었다⁠. 손이 근질거리는 것도 어제보다 덜했다⁠. 구름은 동쪽으로 날았다⁠. 아파트 단지와 고속도로를 지나자 산과 산 사이로 넓은 강이 나타났다⁠. 남한강 상류였다⁠. 물살이 돌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여울이 이어졌다⁠.

구름이 물가 자갈밭에 내려앉기도 전에 수달 둘은 물로 뛰어들었다⁠. 하나가 잠겼다가 솟았을 때 입에 은빛 피라미 한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다⁠. 수달은 바위에 올라 피라미를 머리부터 씹어 먹고는 꼬장을 향해 젖은 앞발을 흔들었다⁠.

“⁠사료보다 맛있어⁠!⁠”

꼬장은 대걸레 자루를 높이 쳐들어 흔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강가 자전거 길을 지날 때 자전거 탄 사람 여럿이 한꺼번에 멈춰 서서 하늘을 가리켰다⁠. 누군가 자전거를 세우다 말고 넘어졌고⁠, 넘어진 채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꼬장은 손을 흔들어 줄까 하다가 손을 흔들면 무릎이 굳는다는 것을 알고 대걸레 자루만 까딱했다⁠. 동물원 원숭이 산에 내려앉았을 때 꼬장이 버틴 시간은 사십 분이었다⁠. 다리는 떨렸지만 꼬장은 이번에는 엎어지지 않았다⁠.

*

한낮의 펭귄 사에서는 새 소문이 돌고 있었다⁠. 너구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토종 짐승 우리 옆 물새장에서 처음 나왔고⁠, 펭귄 일곱을 거치는 동안 모양이 바뀌었다⁠.

“⁠너구리가⁠.⁠” “⁠돌아왔대⁠.⁠” “⁠귀가⁠.⁠” “⁠없대⁠.⁠” “⁠산에서⁠.⁠” “⁠쫓겨났대⁠.⁠” “⁠구름 타면 귀가 없어진대⁠.⁠”

소문은 펭귄 사 담을 넘어 사슴 마당으로 갔다⁠. 사슴들이 제 귀를 서로 확인했다⁠. 물새장의 원앙 한 쌍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자리에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소문이 동물원을 한 바퀴 돌아 원숭이 산으로 돌아왔을 때는 구름을 타면 귀와 꼬리가 한꺼번에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원숭이 산의 어린것들이 제 꼬리를 붙잡고 울었다⁠. 일본원숭이의 꼬리는 원래 손가락 두 마디였다⁠.

낙타만은 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울타리에 앞가슴을 붙인 채 원숭이 산을 향해 외쳤다⁠.

“⁠나는 사막 귀족 집안이다⁠! 우리 집안은 귀가 원래 작다⁠! 없어져도 티가 안 난다⁠! 다음은 나다⁠!⁠”

꼬장은 장대 위에서 귀를 막았다⁠. 펭귄들은 꼬장이 귀를 막는 것을 보고 새 소문을 시작했다⁠. 꼬장의 귀가 벌써 없어졌다는 소문이었다⁠.

*

일요일 정오 텔레비전 뉴스 끝머리에 아이가 찍은 영상이 나왔다⁠. 화면 아래 「⁠과천 동물원 위 ‘⁠구름 탄 원숭이⁠’ 영상 화제⁠… 드론 합성 의혹도⁠」라는 글씨가 흘렀다⁠. 오후가 되자 해오름 동물원 주차장이 마흔세 해 만에 처음으로 꽉 찼다⁠. 매표소 앞에 줄이 정문 밖 큰길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하늘로 들고 원숭이 산 앞으로 몰려들었다⁠.

원장은 관리동 창가에서 줄을 내려다보며 두식을 불렀다⁠. 표 판 돈을 세는 계산기가 책상 위에서 아직 따뜻했다⁠.

“⁠수달 우리 비었죠⁠? 너구리는 돌아왔고요⁠.⁠” 원장이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빼돌리다가 들킬 것 같으니까 하나 돌려놓은 거죠⁠, 현실적으로⁠.⁠”

“⁠원장님⁠. 너구리는 귀가 찢어져서 왔습니다⁠. 굶어서 갈비뼈가 다 보였어요⁠. 누가 빼돌린 짐승을 굶겨서 돌려놓습니까⁠?⁠”

“⁠그건 경찰이 알아볼 겁니다⁠. 그리고 이송은 4월 20일로 당깁니다⁠. 남쪽에는 아까 전화했어요⁠. 저렇게 사람이 몰리는데 짐승이 하나라도 더 없어지면 기사가 어떻게 나겠습니까⁠? 열흘 안에 다 내보냅니다⁠. 원숭이도⁠, 곰도⁠.⁠”

“⁠곰은 아직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요⁠.⁠” 원장이 계산기를 서랍에 넣었다⁠. “⁠갈 데 없는 건 금요일에 정리하고요⁠.⁠”

창가 새장의 구관조가 원장을 따라 했다⁠. “⁠정리하고요⁠! 정리하고요⁠!⁠”

*

오후 세 시⁠, 원장이 부른 인부 둘이 실내 우리 뒤의 상자를 원숭이 산 앞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상자가 바위 언덕 바로 앞에 쌓이자 무리는 털 고르기를 멈추고 상자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상자를 옮기는 날은 언제나 누군가 떠나는 날이었다⁠. 우두머리는 상자 더미를 오래 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상자 모서리를 하나씩 짚어 세다가⁠, 끝까지 세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세었다⁠. 두 번째에도 같은 데서 입을 다물었다⁠.

우두머리가 바위 그늘에서 일어났다⁠. 석봉 옆으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무리가 숨을 죽였다⁠.

“⁠대장 원숭이 말이 맞다⁠. 끙⁠.⁠” 우두머리가 꼬장을 보지 않고 말했다⁠. “⁠오늘부터 꼬장하고 털 고르지 마라⁠. 꼬장 옆에서 먹지도 마라⁠. 소란 피우는 놈하고 같이 있다가 상자에 못 탄다⁠.⁠”

“⁠대장⁠!⁠”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있다⁠.⁠” 우두머리가 난간에 몰린 휴대전화들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하늘을 볼 때 좋은 일 난 적 없다⁠. 끙⁠.⁠”

무리는 하나둘 꼬장 곁에서 일어나 우두머리와 석봉이 앉은 그늘로 옮겨 갔다⁠. 꼬장이 털을 골라 주던 늙은 암컷도 갔다⁠. 꼬장은 장대 밑에 혼자 남아 제 팔의 털을 제가 골랐다⁠. 남이 골라 줄 때보다 서너 배는 시원찮았다⁠. 석봉은 무리 한가운데에서 어린것들에게 복숭아 얘기를 해 주고 있었다⁠. 오백 년 묵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면 사흘을 웃는다는 얘기였다⁠. 어린것들이 사흘 동안 웃는 흉내를 내며 깔깔댔다⁠.

*

해 질 무렵 관람객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두식은 퇴근하지 않았다⁠. 손전등을 들고 수달 우리에서 해자로 가는 배수로를 따라 걸으며 발자국을 찾았다⁠. 발자국은 없었다⁠. 수달 우리 바닥에는 물기 마른 발자국이 하나도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웅덩이 가장자리에서 끊겨 있었다⁠. 마치 둘이 웅덩이에서 하늘로 솟아오른 것처럼⁠.

원숭이 산 해자 난간에 이르렀을 때 두식은 손전등을 위로 비췄다⁠. 장대 옆 바위에 평상만 한 구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구름에서 꼬장이 내려섰다⁠. 꼬장이 내려서자마자 금빛 털이 덥수룩한 큰 원숭이가 구름에 훌쩍 올라탔다⁠. 구름이 떠올랐다⁠. 큰 원숭이는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손 하나 짚지 않고 저녁 하늘로 올라갔다⁠.

두식의 손에서 손전등이 미끄러졌다⁠. 손전등은 난간에 한 번 부딪히고 해자 물로 떨어졌다⁠. 물속에서 불빛이 한동안 빙글빙글 돌며 바닥의 동전들을 비추었다⁠.

“⁠…꼬장아⁠.⁠”

두식이 겨우 이름 하나를 불렀다⁠. 꼬장은 제 이름을 알아들었다⁠. 여덟 해 동안 이름은 언제나 칭찬이었는데⁠, 이번에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두식의 목소리 끝이 해자 물 위의 불빛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꼬장이 해자 건너에서 두식을 보았다⁠. 두식이 꼬장을 보았다⁠. 둘 다 입을 벌린 채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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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산책2026.10.31· 3화

    산이 한 자 두 치 내려앉았다고 따지는 석봉 너무 웃겨요. 웃은 놈이 막내 손자라니요.

    • 길담이작가2026.10.31

      산신도 손자 앞에서는 약해요. 석봉의 따지기는 앞으로 더 정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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