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107자) · 이오 · 2월 6일

아흔여덟

겨울 정거장의 편지 · 서지오

설 전날인 2월 5일, 골짜기로 올라오는 길에 차가 줄을 섰다. 서울 번호판, 원주 번호판, 대구 번호판. 트렁크마다 과일 상자와 식용유 세트가 실려 있었고, 뒷좌석 창에는 김 서린 아이들 얼굴이 붙어 있었다. 설운리 인구가 이틀 동안 두 배가 되는 날이다.

그 차들이 마을에 닿기도 전에 소문이 먼저 닿았다. 역에 앞날에서 편지가 온다더라, 여든 된 봉례 할머니가 운동화 신고 잔치한다더라, 두칠이 아저씨가 술을 끊었다더라. 그리고 심만석 씨가 여덟 해 동안 그 편지를 팔았다더라. 이장 마누라 죽을 때 온 편지도 팔았다더라.

오후 두 시, 대합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두칠 씨가 난로 앞 의자 위에 올라서서 손뼉을 쳤다. 그는 보름 넘게 술을 끊은 얼굴이었는데, 술을 끊으니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자, 함 만들 사람! 라면 상자는 저기, 매직은 여기, 못은 집배원한테!”

아이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라면 상자에 크레파스로 제 이름을 쓰고 공룡을 그렸다. 한 아이는 상자에 창문을 뚫어서 편지가 들어오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우겼고, 박두칠 씨가 창문으로 들어오면 도둑이라고 말렸다. 아이는 그럼 편지가 숨 막혀 죽는다고 울상을 지었고, 박두칠 씨는 결국 창문에 비닐을 붙여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영감님이 그 상자를 보고 비닐하우스 함이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은 스마트폰 상자를 뜯어 명패를 만들었고, 원주에서 온 아저씨는 제 아버지가 쓰던 놋쇠 문패를 떼어 들고 왔다. 봉례 할머니의 손자 동하는 할머니가 달력 뒷면에 연습한 이름을 보고 한참 웃다가 울었다. 열여섯 살인 그 아이가 십이 년 뒤 할머니 팔순 잔치 편지를 쓸 손자였다.

영감님은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영감님을 봤다. 오래 보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안 보는 사람도 있었다. 원주에서 온 아저씨가 영감님 앞에 섰다. 그 사람 아버지의 놋쇠 문패가 손에 들려 있었다.

“어르신이 우리 아버지 편지도 넘기셨어요?”

영감님은 고개를 들었다.

“넘겼으면 넘겼을 거요. 내가 안 읽어서 모르오.”

아저씨는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놋쇠 문패를 영감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문패 모서리에 녹이 슬어 있었고, 뒷면에는 오래된 못 두 개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럼 이거 어르신이 거세요. 어르신이 거는 게 맞겠네요.”

영감님은 문패를 들고 벽 앞에 섰다. 한 손으로 못을 박을 수가 없어서 내가 못을 잡았다. 영감님이 망치를 들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붕대가 풀린 왼손 손바닥에 분홍색 새살이 돋아 있었다. 망치가 세 번 떨어졌고, 세 번째에 못이 들어갔다.

모두가 함을 걸지는 않았다. 대구에서 온 명씨 할아버지 큰아들은 대합실 문간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나한테 말했다. 보상금 받아야 아버지를 대구로 모셔 갈 수 있다고. 혼자 사시는 게 겨울마다 걱정이라고. 편지가 아버지 보일러를 봐 주지는 않는다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는 떡 한 봉지를 난로 옆 선반에 올려놓고 갔다. 함은 걸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함이 쉰아홉 개 늘었다. 서른여덟에서 아흔일곱이 됐다. 벽 한 면으로 모자라서 매표 창구 옆 벽과 대합실 문 옆 기둥까지 함이 걸렸다. 떼어 갔던 목씨네 둘째가 저녁 무렵 슬그머니 와서 제 라면 상자를 도로 걸고 갔다. 박두칠 씨가 그 등에다 대고 박수를 쳤다.

*

설날 아침 열 시, 차례를 마친 마을 사람들이 세배 대신 역으로 올라왔다. 떡국 냄새가 대합실에 들어찼다. 봉례 할머니가 커다란 양은 들통에 떡국을 끓여 왔고, 박두칠 씨가 종이컵에 나눠 담았다. 그때 승강장 앞에 검은 SUV가 섰다.

뒷좌석에서 반석환이 회색 코트 깃을 세우며 내렸다. 뒤따라 도재혁이 내렸고, 트렁크에서 인부 둘이 한우 선물 세트를 꺼내 쌓기 시작했다. 보자기로 싼 상자가 스무 개, 서른 개. 그리고 조수석에서 반하람이 내렸다. 그녀는 까만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합판 조각이었다.

반석환은 대합실에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설 인사였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들었고, 떡국을 뜨던 숟가락들이 하나씩 멈췄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작은 성의를 좀 가져왔습니다. 곤돌라가 서면 명절마다 이것보다 나은 걸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선물 상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 봉례 할머니가 떡국을 휘젓던 국자를 들고 반석환을 봤다.

“한우는 받고 함도 걸면 안 되나?”

“어머님, 그건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이장이 그러던데. 두 쪽에 발 걸치면 도둑놈 심보라고.”

방 안에 웃음이 퍼졌다. 떡국 컵을 든 채 웃다가 사레들린 사람도 있었다. 반석환도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그는 벽을 봤다. 아흔일곱 개의 함이 벽을 뒤덮고 기둥을 타고 올라가 있었다. 그의 눈이 함 하나하나를 짚고 지나갔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세기에는 너무 많았다.

그때 반하람이 벽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합판 조각을 들어 보였다. 매표 창구 안쪽에 내가 쌓아 둔, 목씨네 상자를 떼어 갈 때 떨어진 그 합판이었다. 거기에 굵은 매직으로 반하람이라고 써 있었다. 람 자 받침 ㅁ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가 열려 있었다.

반석환의 얼굴이 굳었다.

“하람아.”

“이거 걸게요, 아버지.”

“그 함 거는 순간 너는 우리 회사 사람 아니다. 곤돌라 설계에서도 빠지고.”

“알아요.”

“네 첫 설계야. 역 짓고 싶어서 건축 한 애가 그걸 버려?”

“역은 여기 있잖아요.”

그녀는 명패 없는 놋쇠 함 둘 가운데 나사 구멍 자국이 없는 16번 함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망치를 꺼냈는데, 회사 공구 상자에 들어 있던 빨간 손잡이 망치였다. 그녀는 합판 명패를 16번 함 뚜껑에 대고 못을 박았다. 첫 못이 휘었다. 두 번째 못이 들어갔다.

반석환이 한 걸음 다가섰다. 도재혁이 그 팔을 잡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설날 아침, 떡국 냄새가 가득한 대합실에서, 아흔일곱 개의 함과 아흔일곱 개의 이름 앞에서.

반석환은 팔을 뺐다. 딸을 보지 않고 나를 봤다.

“자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하람 씨가 정한 겁니다.”

“아니. 자네가 저 애 앞에서 난로를 피웠어. 그게 이긴 거야.”

그는 돌아서서 나갔다. 선물 상자는 그대로 두고 갔다. 도재혁이 인부들에게 상자를 도로 실으라고 하자, 반석환이 차 안에서 두고 가라고 했다. 그 말이 창문 너머로 들렸다. SUV가 떠난 뒤에 봉례 할머니가 선물 상자 하나를 들어 보더니 무겁다고 했다. 박두칠 씨가 그걸 경로당 냉장고에 넣자고 했다. 누구 몫도 아니게.

나는 그때 대합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봤다. 이장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다. 설빔 대신 늘 입는 작업복 점퍼 차림으로, 승강장 끝 눈 쌓인 자리에 서서 떠나는 SUV를 보고 있었다. 봉례 할머니가 떡국 한 컵을 들고 나가서 그 손에 쥐여 주었다. 이장은 떡국을 받았다. 먹지는 않고 두 손으로 쥐고만 있다가, 김이 다 식을 즈음 컵을 승강장 난간에 올려놓고 내려갔다. 대합실 안은 끝내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반하람은 명패 앞에 서서 코트 소매로 합판에 묻은 톱밥을 털었다. 몇 번을 털어도 결 사이에 낀 가루가 남았다. 손이 떨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 옆에 가서 섰다.

“아흔여덟이에요.”

벽을 한 번 훑어 세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3번 함 봉투를 꺼내 창빛에 비춰 봤다. 연필 자국으로 돌아가 있던 마지막 숫자가 다시 볼펜 자국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곁눈으로 보고 코로 짧게 웃었다.

“농도 올랐네요.”

“영감님 앞에서 그 말 하지 마십시오.”

*

그날 오후 늦게 눈이 왔다. 설날 눈은 송이가 굵고 느렸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반하람은 난로 앞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승강장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왔다. 안테나 한 칸에 문자가 한 통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인사팀이었다. 설 연휴 끝나고 출근하지 말라는 내용을 설 연휴에 보내는 회사라고, 그녀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백수예요. 건축사 백수. 측정기는 제 거라서 안 뺏겼어요.”

“영감님이 고구마 굽는 법은 공짜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건 이미 배웠어요. 뒤집으면 안 된다면서요.” 출향민들은 하나둘 차에 올랐는데 몇 사람은 여섯 시 이십 분 차를 보겠다고 대합실에 남았다. 동하가 남았고, 원주 아저씨가 남았고, 반하람이 남았다.

한 칸짜리 차가 누런 불빛을 끌고 들어와 섰고, 아이들이 창문에 붙어 소리를 질렀다. 우편함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이번에는 셀 수가 없었다. 놋쇠에서, 라면 상자에서, 스마트폰 상자에서, 사과 상자에서. 대합실 벽 전체가 종이 결 서는 소리로 한참 떨렸다.

합판 명패에서도 났다. 톱밥 섞인 나뭇결을 손끝으로 쓰다듬는 듯한 소리였다.

반하람은 바로 열지 못했다. 차가 물러난 뒤에도 한참 명패를 보고 서 있었다. 동하가 누나 편지 왔다고 옆구리를 찔렀고, 그녀는 그제야 뚜껑을 열었다. 봉투가 하나 있었다. 수신 반하람, 발신일 2028년 12월 25일. 뒷면 발신인 자리에는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심만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녀가 나를 봤다. 나는 난롯가를 봤다. 영감님은 벌써 외투를 입고 나간 뒤였다.

그녀가 봉투를 뜯었다. 편지는 한 장이었고, 역무원이 장작 들인 날을 적던 그 글씨였다. 그녀는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얼굴을 봤다. 첫 줄에서 입술이 조금 벌어졌고, 둘째 줄에서 코끝이 찡그려졌고, 셋째 줄에서 그녀가 터지듯 웃었다. 웃다가 편지를 든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러고 나서 편지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반하람 양. 어제 성탄절이라고 연통에 솔방울을 채워 넣은 것은 양이오. 향이 좋다고 했소. 향은 좋았소. 대합실에 연기가 차서 아무도 앉지를 못했소. 이오 군이 기침하면서 웃었소. 그 사람이 웃는 것은 이 년에 세 번쯤인데 양 덕분에 올해 한 번은 채웠소. 연통은 내가 뚫었소. 손은 이제 다 나았소. 그러니 올해는 솔방울 말고 고구마나 제대로 굽는 법을 배우시오. 난로 아래 재에 묻고 뒤집지 마시오. 뒤집지 말라고 두 해째 말하고 있소.

나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봉투의 발신일을 봤다. 2028년의 숫자가 전부 또렷했고, 한 글자도 옅어지지 않았다.

반하람이 편지를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내 안주머니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제 저도 하나 있어요.”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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