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219자) · 이오 · 12월 24일
고구마 여섯 개
겨울 정거장의 편지 · 서지오
12월 24일 오후 네 시, 내가 난로에 장작을 넣고 있을 때 반하람이 다시 대합실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삼각대도 사원증도 없었다.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다른 손에 보온병을 들고 있었고, 털모자 위에 눈이 얇게 얹혀 있었다.
“오늘 저녁에 눈 온대요. 기상청 말고 제 차 와이퍼가 그러더라고요. 아침부터 삐걱거려요.”
“측량하러 오셨습니까?”
“아뇨. 오늘은 퇴근했어요.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그녀는 비닐봉지를 난로 옆 선반에 올려놓았다. 흙 묻은 고구마 여섯 개가 굴러 나왔다. 영감님이 그것을 보고 부지깽이를 내려놓았다.
“구울 줄은 아오?”
“설계는 해 봤어요.”
“그건 모른다는 소리구먼.”
영감님은 고구마를 호일에 싸서 난로 아래 재 속에 묻는 법을 한 번 보여 주고는 외투를 걸쳤다. 오늘은 일찍 내려가겠다고 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묻자 영감님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잠깐 서 있다가 말했다.
“아들 보러.”
“아드님이 계셨습니까?”
“있었지.”
문이 닫혔다. 반하람이 나를 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년 동안 영감님은 아들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창밖으로 영감님의 발자국이 승강장 끝까지 가서 마을 쪽이 아니라 산 쪽으로 꺾이는 것이 보였다. 그 길 끝에는 설운리 공동묘지가 있다.
*
대합실에 둘만 남았다. 반하람은 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장갑을 벗고 손을 쬐었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가늘었는데, 오른손 중지 첫마디에 연필을 오래 쥔 굳은살이 노랗게 박혀 있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아버지가 부탁했어요.”
“무슨 부탁입니까?”
“이 함에 반석환 앞으로 온 편지가 있으면 가져오라고요.”
난로 안에서 장작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회장님이 이 함을 믿으십니까?”
“그게 이상해요. 우리 아버지는 귀신 얘기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운세도 안 봐요. 그런데 지난주에 제가 여섯 시 이십 분 차 얘기를 했더니 안 웃었어요. 한참 가만히 있다가, 명패가 몇 개냐고 물었어요. 저는 명패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요.”
“반석환 명패는 없습니다.”
“알아요. 들어오면서 다 읽었어요. 스물세 개.”
그녀는 들어오면서 벌써 셌다. 아침에 내가 센 수도 스물셋이었으니, 한 번 훑고도 하나를 안 틀렸다.
“그럼 왜 오셨습니까?”
“와이퍼가 삐걱거려서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조금 진지해졌다. 설명회에서 내가 한 말, 글씨가 옅어진다는 말을 그날 밤 내내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규칙을 아는 만큼 말해 주었다. 명패가 걸린 함에만 온다는 것, 발신일은 늘 앞날이라는 것, 그 앞날이 멀어지면 글씨가 옅어지고 가까워지면 진해진다는 것. 그녀는 수첩을 꺼내 그것을 받아 적었다. 받아 적다가 볼펜 끝으로 수첩을 톡톡 쳤다.
“그럼 글씨 진하기를 재면 앞날이 올 확률이 나오네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재는 사람이라서요. 농도계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봉례 할머니 편지 육십 퍼센트, 박두칠 씨 편지 칠십 퍼센트, 이런 식으로.”
“영감님 앞에서 그 말 하지 마십시오. 부지깽이로 맞습니다.”
그녀가 웃었다. 웃다가 수첩을 덮었다.
“아버지는 이 골짜기 사람들이 떠나는 걸 스무 해 봤대요. 학교가 닫히고, 버스가 하루 두 번이 되고, 역이 닫히고. 곤돌라는 아버지가 이 골짜기에 거는 마지막 판이에요. 저는 그게 틀린 판이라고 생각 안 해요.”
“저도 틀렸다고 생각 안 합니다.”
“그런데 왜 막아요?”
“그 판에 이 함들 자리가 없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보온병 뚜껑에 유자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뚜껑이 뜨거워서 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 김이 턱밑까지 올라와 눈썹에 맺혔다.
한 시간 뒤 고구마를 꺼냈다. 영감님이 가르쳐 준 대로 묻었는데 반하람이 삼십 분마다 재를 헤집어 뒤집는 바람에 여섯 개가 전부 겉은 숯이 되고 속은 설익었다. 그녀가 하나를 반으로 갈라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치수가 안 맞았네요. 바깥은 과시공이고 안쪽은 미시공이에요.”
“영감님이 보시면 웃으실 겁니다.”
“그분 웃는 거 봤어요. 제 덕분이에요.”
우리는 설익은 고구마를 겉만 벗겨서 먹었다. 먹는 동안 그녀가 먼저 자기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열두 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혼자 키웠다. 어릴 때 아버지 차를 타고 이 골짜기 설운역 앞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는 기차가 다녔다. 역 지붕이 초록색이었다. 그래서 역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건축사가 되고 처음으로 제 이름을 걸고 맡은 것이 이 곤돌라 승강장이다.
“역을 짓고 싶어서 역을 허는 중이에요. 웃기죠?”
나는 웃지 않았다. 그녀도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집배원님은요? 왜 여기 있어요? 월급도 안 나오는 데서.”
“여기 오는 편지는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습니다. 전해 주면 받습니다.”
“다른 편지는 안 그래요?”
“저는 받을 사람이 정해진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그녀가 고구마를 쥔 채로 나를 봤다. 나는 그 말을 괜히 했다고 생각하면서 난로에 장작을 넣었다. 그것이 내 평소다.
*
여섯 시 이십 분에 차가 왔다. 반하람은 이번에는 삼각대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차의 불빛이 선로를 밝히는 것을 끝까지 봤고, 우편함 줄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소리는 모두 네 번 났다. 박두칠 씨의 사과 상자, 라면 상자 하나, 놋쇠 함 둘이었다. 그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네 번째에 접은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소리가 다 달라요.”
“함마다 다릅니다.”
“사과 상자가 제일 좋아요. 낙엽 밟는 소리 같아요.”
차가 물러나고 대합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편지를 꺼내 이름별로 정리하는데 창밖에서 다른 불빛이 올라왔다. 헤드라이트 두 쌍이었다. 일 톤 트럭과 검은 승용차가 승강장 앞에 섰다. 도재혁이 인부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인부 하나가 전동 그라인더를 들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도재혁이 말했다. “나사가 역방향이라길래 오늘은 잘라 갑니다.”
그는 반하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목소리가 반음 낮아졌다.
“과장님이 여기 왜 계세요?”
“본부장님은 이브에 여기 왜 계세요?”
“회장님 지시입니다. 연휴 동안 반출 끝내라고.”
“아버지가 그라인더 들고 가라고 하셨어요?”
“방법은 제가 정합니다. 과장님은 도면을 정하시고요.”
인부가 그라인더 코드를 매표 창구 옆 콘센트에 꽂았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건물이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재혁이 혀를 차고 트럭에서 발전기를 내리라고 했다. 나는 우편함 앞에 섰다. 이번에는 등 뒤의 함이 스물셋이었다.
반하람이 내 옆에 와서 섰다. 그녀는 우편함이 아니라 도재혁을 보고 있었다.
“이 벽 제 도면에 아직 있어요. 철거 순서도에도 3월이에요. 설계자 확인 없이 먼저 뜯으면 저 감리 사인 안 합니다.”
“과장님, 이건 비품 반출이지 철거가 아닙니다.”
“벽에 앵커로 박혀 있으면 구조물이에요. 제 보고서에 그렇게 썼어요. 출처 불명 철제 함 열여섯 개 무단 부착. 부착이라고 썼잖아요. 부착된 걸 떼면 철거고요.”
도재혁이 나를 한 번, 그녀를 한 번 봤다. 발전기를 들고 오던 인부 둘이 문간에서 멈췄다.
“과장님, 이 회사 과장님 아버지 회사입니다. 그걸 아시고 이러시는 겁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제가 막는 거예요. 본부장님이 막으면 잘리잖아요.”
인부 하나가 입을 틀어막고 돌아섰다. 도재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회장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전화하시면 제가 받을게요. 오늘 저녁은 제가 아버지랑 먹기로 했거든요.”
도재혁은 한참 서 있다가 인부들에게 철수하라고 손짓했다. 그라인더 코드가 콘센트에서 뽑혀 바닥을 끌려 나갔다. 트럭이 떠나고 나서 반하람은 난로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두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떨렸다.
“저 지금 회사에서 잘릴 짓 했죠?”
“감리 사인 얘기는 사실입니까?”
“반은요. 나머지 반은 지어냈어요.”
*
그녀가 떨리는 손을 난로에 대고 있는 동안 나는 안주머니에서 3번 함 봉투를 꺼냈다. 매일 밤 불빛에 비춰 보는 것이 버릇이 됐다. 발신일의 마지막 숫자는 지난주보다 조금 진했다. 연필 자국이 볼펜 자국이 되기 직전 같은 진하기였다. 오늘 이 대합실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나는 알았다. 그라인더가 콘센트에서 뽑혀 나갔다.
“그게 뭐예요?”
“제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뜯어 봤어요?”
“아니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뜯지 않겠다고, 보기만 하겠다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봉투를 건넸다. 그녀가 앞면을 보고, 뒤집어서 뒷면을 봤다.
발신인 자리의 두 글자에서 그녀의 손이 멈췄고, 그녀는 그 글자를 오래 봤다. 엄지로 그 글자를 한 번 쓸어 보고, 제 수첩을 꺼내 아무 데나 펼쳐 옆에 댔다. 수첩에는 오늘 오전에 적은 치수들이 있었다. 이 미터 십사. 삼 미터 칠. 수첩 맨 위에는 그녀가 적어 둔 제 이름도 있었다. 봉투의 람 자는 받침 ㅁ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를 닫지 않고 비워 둔 채 끝나 있었고, 수첩의 람 자도 똑같이 그 모서리가 열려 있었다. 서명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이거 제 글씨예요.”
그녀는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내게 돌려주는 것도, 더 꼭 쥐는 것도 아니었다. 난로 불빛이 봉투를 뒤에서 비춰서 안에 든 종이 몇 장의 그림자가 얇게 겹쳐 보였다.
“삼 년 뒤에, 제가, 집배원님한테 편지를 써요.”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합니다.”
“그런데 왜 안 뜯어요?”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있다가 봉투를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올려놓으면서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손바닥에 잠깐 닿았는데, 고구마를 까던 손이라 아직 따뜻했다.
“뜯을 때 말해 줘요.”
“왜 그렇습니까?”
“제가 뭐라고 썼는지 저도 모르잖아요. 옆에서 같이 놀라게요.”
그녀는 보온병을 챙기고 모자를 썼다. 문을 열자 바깥 눈이 대합실 안으로 한 줌 들이쳤다. 그녀는 문간에서 한 번 돌아봤다.
“아, 그리고 3번 함 명패요. 매직이 번져서 정이오가 정이으로 보여요. 제가 새로 써 드릴까요?”
“명패는 제가 씁니다. 남이 써 준 이름에는 남의 편지가 온다고 영감님이 그러셨습니다.”
“그거 진짜예요?”
“영감님 말씀은 반쯤 진짜입니다.”
“그럼 매직이라도 좋은 걸로 사세요. 삼 년은 버텨야 하잖아요.”
문이 닫혔다. 나는 3번 함 앞으로 가서 흰 종이 명패를 들여다봤다. 이 년 동안 매일 봤는데, 오 자의 아래 획이 번져서 정말로 으 자처럼 보인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