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132자) · 이오 · 12월 9일

측정 불가

겨울 정거장의 편지 · 서지오

엿새 뒤 아침, 대합실 문을 열자 빨간 불빛 한 줄이 내 이마에 꽂혔다.

“죄송해요.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문틀 재는 중이에요.”

삼각대 위에 올린 레이저 측정기 뒤에서 여자 하나가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회색 롱패딩에 털모자, 목에는 사원증 줄이 걸려 있었고, 발밑에는 도면 통과 줄자와 빨간 스티커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난롯가의 영감님은 의자에 앉은 채 그 여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적어도 한 시간은 구경한 얼굴이었다.

“이 미터 십사.”

여자가 수첩에 숫자를 적고 나서야 눈을 떴다. 나는 문턱에 선 채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설계하는 사람이요. 곤돌라 승강장이 이 자리에 앉거든요. 헐기 전에 다 재 둬야 해요. 뭐가 어디 있었는지.”

그녀는 대합실 구석구석에 빨간 점을 찍고 다녔다. 천장 높이를 잴 때는 삼각대를 의자 위에 올렸고, 창틀을 잴 때는 입김으로 성에를 녹여 동그란 구멍을 낸 다음 그 구멍으로 바깥 승강장 끝까지 쏘았다. 숫자를 부를 때마다 수첩에 적는 손이 빨랐고, 틀린 숫자는 줄을 긋지 않고 동그라미를 쳐서 옆에 새로 적었다. 의자 여섯, 창틀 넷, 매표 창구, 난로. 난로에 불빛을 댈 때 영감님이 헛기침을 했다.

“난로도 재야 하오?”

“철거 목록에 들어가요. 어르신 키는 안 재요. 어르신은 철거 대상 아니시니까요.”

“고맙구먼.”

“대신 어르신 의자는 재요. 저 의자는 몇 년 됐어요?”

“나보다 어리지.”

“그건 거의 모든 게 그렇잖아요.”

영감님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 소리를 이 년 동안 세 번쯤 들었다.

그녀가 우편함 앞으로 갔다. 스티커 묶음에서 한 장씩 떼어 1번 함부터 차례로 붙였다. 철거-01, 철거-02, 철거-03. 3번 함 흰 종이 명패 바로 옆에 빨간 스티커가 붙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그것을 떼어 냈다.

그녀가 돌아봤다.

“그거 제 일인데요.”

“이건 우편함입니다. 아직 편지가 옵니다.”

“폐역에요?”

“폐역에요.”

그녀는 대꾸 대신 새 스티커를 떼어 3번 함에 다시 붙였다. 나는 다시 뗐다. 그녀가 또 붙였다. 세 번째에 영감님이 난로 뚜껑을 열고 말했다.

“둘 다 그 손으로 장작이나 좀 넣어 주면 좋겠는데.”

그녀가 먼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스티커를 손바닥에 붙인 채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설운리조트 설계팀 과장, 반하람.

명함을 받은 손이 하람이라는 두 글자에서 멈췄다. 안주머니 봉투 뒷면의 두 글자와 같은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읽었다.

“하람이 이름이십니까?”

“성이 반이에요. 반하람. 어릴 때 반만 하람이라고 많이 놀림받았어요. 왜요?”

“아닙니다. 드문 이름이라서요.”

“설운리에 하람이 또 있어요?”

“없습니다.”

“그럼 제가 처음이네요. 기억하기 쉽겠다.”

그녀는 내 얼굴을 한 번 재듯이 보고 나서 삼각대를 접었다. 가기 전에 그녀는 하나를 더 말했다.

“이 역사 등록문화재 심사 두 번 떨어졌어요. 두 번째 심사 보고서, 제가 썼어요. 부적합으로요. 그러니까 스티커 떼셔도 소용없어요.”

“보고서에 뭐라고 쓰셨습니까?”

“건축적 가치 낮음. 원형 훼손 심함. 대합실 벽에 출처 불명 철제 함 열여섯 개 무단 부착.”

그녀가 3번 함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무단 부착물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빨간 스티커 열다섯 장은 함마다 그대로 붙어 있었고, 3번 함 것만 내 손바닥 안에서 구겨져 있었다.

*

오후 두 시에 봉례 할머니가 역으로 올라왔다. 오 리 길을 지팡이 하나 짚고, 마루에 두었던 흰 운동화를 신고 왔다. 할머니는 대합실에 들어서자마자 봉투를 내 코앞에 내밀었다.

“이거 봐라. 글씨가 도망간다.”

봉투를 받아 편지를 펼쳤다. 엿새 전에 내가 소리 내어 읽었던 줄들이 거기 있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연필로 쓴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운동화 신고 오시라는 줄은 이미 반쯤 종이 색으로 돌아가 있었고, 난로 두 개 얘기는 겨우 읽혔다.

“찬장 맨 위에 뒀다. 쌀 포대 옆에. 거기가 제일 마른 데라니까.”

“물에 젖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할머니.”

“그럼 뭐 때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운동화 코끝으로 대합실 바닥을 한 번 톡 쳤다.

“여든까지 산다더니, 그것도 도로 가져가나 보네.”

그리고 할머니는 웃었다. 웃다가, 웃는 입 모양 그대로 멈췄다. 지팡이를 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할머니를 의자에 앉히고 난로 쪽으로 의자를 조금 당겼다. 영감님이 아무 말 없이 할머니 무릎에 담요를 덮었다.

그날 오후 배달을 돌면서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전해 준 편지를 하나씩 다시 봤다. 12번 함 전씨 할아버지 편지, 5번 함 서란 씨 편지, 윗골 명씨네 편지. 받은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봉투를 열어 보았더니 다섯 통이 다 같았다. 발신일은 전부 삼월 뒤였고, 글씨는 전부 꼬리부터 옅어지고 있었다.

역으로 돌아와 영감님에게 물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느냐고. 영감님은 부지깽이를 난로 턱에 걸쳐 놓고 한참 창밖을 봤다.

“폐선 때 한 번 있었지. 역을 헌다는 말이 돌았을 때. 그때도 글씨가 도망갔어.”

“그럼 어떻게 돌아왔습니까?”

“헐 돈이 없어서 안 헐었지. 그러니까 돌아오더라.”

영감님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는 헐 돈이 있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

설명회는 저녁 다섯 시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석유난로 두 대가 방 양쪽에서 기름 냄새를 뿜었고, 쟁반에 믹스커피 종이컵이 서른 개쯤 놓여 있었다. 앞쪽 탁자에 도재혁이 앉았고 그 옆에 군청 관광개발팀 연지석 주무관이 앉았다. 반하람은 벽 쪽에 서서 조감도를 붙인 판을 받치고 있었다. 조감도 속 설운역 자리에는 유리 지붕을 얹은 하얀 승강장이 서 있었고, 그 앞에 버스 두 대와 웃는 가족 그림이 붙어 있었다. 대합실도 우편함도 난로도 그 그림에는 없었다.

도재혁이 숫자를 읽었다. 가구당 보상금 천이백만 원, 곤돌라 운영 인력 삼백 명, 승강장 앞 버스 정류장 신설. 군 조례상 마을 공동시설 철거는 주민 과반 동의가 필요하고, 동의서는 이장님 댁에서 받는다. 연지석 주무관이 한 줄을 덧붙였다.

“정선군 인구가 작년에 이천십사 명 줄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설운리는 십오 년 안에 비는 마을로 분류됩니다.”

맨 앞줄에 앉은 이장 목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순일곱, 목소리가 크고, 마을 일은 말보다 손이 먼저 가는 사람이었다.

“들었지들? 젊은 것들 다 나갔어. 곤돌라라도 와야 버스가 선다. 버스가 서야 손주들이 온다.”

나는 뒤쪽에 서 있다가 손을 들었다. 방 안의 얼굴들이 나를 돌아봤다. 집배원이 손을 드는 것을 처음 본 얼굴들이었다.

“역 우편함에 온 편지들 글씨가 옅어지고 있습니다. 삼월 뒤 날짜가 찍힌 것들만요.”

“뭔 소리야?”

“대합실이 없어지면 그 편지를 부칠 데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옅어지는 것 같습니다.”

뒷줄에서 누가 코웃음을 쳤다. 박두칠 씨였다. 막걸리 냄새가 커피 냄새를 이기는 자리에서 그는 종이컵을 들어 보이며 “편지가 늙어서 그래, 편지도 늙어” 하고 말했고, 몇 사람이 따라 웃었다. 이장이 일어섰다. 키가 나보다 한 뼘 작았는데 목소리는 두 뼘 컸다.

“이 사람아. 우리가 그 편지 얘기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알아? 알아. 다 알아. 십이 년 뒤에 잔치하고, 오 년 뒤에 손주 장가간다는 편지. 그 편지가 밥 먹여 줘? 버스 세워 줘?”

“글씨가 없어지면 그 앞날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 앞날 누가 만들었는데?”

이장의 손가락이 내 가슴께를 짚었다. 안주머니에 봉투가 든 자리였다.

“편지가 만들었어? 우리가 만들어. 천이백만 원으로 지붕 고치고, 곤돌라에서 월급 받아서.”

이장의 논리는 틀린 데가 없었다. 지붕이 새는 집이 열한 채였고, 읍내 병원까지 버스가 하루 두 번이었다. 편지는 지붕을 고쳐 주지 않는다. 방 안에 박수가 몇 번 났다. 전부는 아니었다. 봉례 할머니는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벽 쪽의 반하람이 조감도를 받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설명회가 끝날 때까지 나는 다시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속 구겨진 빨간 스티커를 손가락으로 폈다 접었다 했다.

*

회관을 나서니 눈이 오고 있었다. 나는 역으로 올라갔다. 여섯 시 십오 분, 대합실 불을 켜자 난롯가 의자 옆에 반하람이 두고 간 삼각대가 접힌 채 기대어 있었다.

그 삼각대를 찾으러 그녀가 문을 연 것이 여섯 시 십팔 분이었다.

“죄송해요. 이거 회사 거라서요. 없으면 시말서예요.”

“가져가십시오.”

그녀가 삼각대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서다가 멈췄다. 창밖 승강장이 밝아지고 있었다. 녹슨 레일 위로 누런 불빛이 눈발을 헤치고 다가왔고, 한 칸짜리 차가 미끄러져 들어와 소리 없이 섰다. 문이 열렸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우편함 안에서 서걱, 하는 소리가 두 번 났다.

반하람은 삼각대를 떨어뜨렸다. 금속 다리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대합실을 한 바퀴 돌았는데, 그녀는 그것을 줍지 않았다. 창에 이마를 댈 것처럼 다가가서 차의 불빛을 보고, 선로를 보고, 나를 봤다.

“저 선로 전기 끊긴 지 십사 년이에요. 제가 도면에 그렇게 적었어요.”

“압니다.”

“저거 뭐예요?”

“여섯 시 이십 분 차입니다. 눈 오는 날에만 섭니다.”

“누가 몰아요?”

“모릅니다.”

“어디서 와요?”

“그것도 모릅니다. 폐선되던 해 마지막 시간표대로 온다고 영감님이 그러셨습니다.”

“그럼 방금 그 소리는요? 함에서 난 거.”

“편지가 생기는 소리입니다.”

그녀는 웃으려다 말았다. 웃을 자리인지 재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우편함 쪽으로 걸어가서 빨간 스티커가 붙은 함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9번 함 뚜껑 틈으로 흰 봉투 모서리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녀는 손을 대지 않았다.

차가 문을 닫고 물러났다. 불빛이 산모퉁이에서 꺼졌다. 그녀는 한참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레이저 측정기를 꺼내 창밖 선로에 빨간 점을 쏘았다. 점은 눈발 속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화면에 숫자 대신 가로줄 세 개가 떴다.

“측정 불가.” 그녀가 화면을 읽었다. “이거 처음 봐요.”

그녀는 삼각대를 주워 들고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에 한 번 돌아봤는데, 그 눈이 나를 보는 것인지 우편함을 보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발자국이 승강장 끝까지 이어졌다가 거기서 한참 멈춰 있었고, 그다음에야 차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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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배2026.05.03· 2화

    조용한데 계속 긴장돼요. 이런 톤 좋아합니다.

측정 불가 · 겨울 정거장의 편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