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80자) · 이오 · 12월 3일

첫눈

눈 오는 날만 미래에서 편지가 온다 · 서지오

그 정거장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편지를 받을 수 있다. 설운리 사람들은 그 말을 농담처럼 하고, 농담처럼 믿는다. 나는 이 년 전 여량우체국 계약직 집배원으로 설운리 구역을 받았을 때 그 말을 처음 들었고, 첫 겨울이 가기 전에 농담을 뺐다.

설운역은 2012년 봄에 폐선됐다. 선로는 걷어 가지 않아서 녹슨 레일 두 줄이 산모퉁이까지 누워 있고, 역사는 문짝 하나 떨어진 데 없이 그대로 서 있다. 대합실에는 나무 의자가 여섯, 무쇠 난로가 하나, 그리고 벽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우편함이 열여섯 있다. 옛날 여량우체국 사서함을 폐국 때 누가 떼어다 여기 붙였다고 하는데, 누가 그랬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아침 여덟 시 사십 분에 대합실 문을 밀면 늘 심만석 영감님이 먼저 와 있다. 폐선 전까지 이 역 역무원이었던 사람이고, 폐선 뒤로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십사 년째 난로를 지핀다. 영감님이 부지깽이로 재를 헤집으면 송진 냄새가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연통이 달궈지는 쇳내가 올라오고, 마지막에 밤새 성에가 낀 유리창이 가장자리부터 물러지면서 바깥 눈빛이 대합실 바닥에 뿌옇게 깔린다.

“왔나.”

“왔습니다. 9번 함에 뭐 있습니까?”

영감님은 대답 대신 부지깽이 끝으로 9번 함을 가리켰다.

우편함 열여섯 가운데 명패가 걸린 것은 열하나다. 놋쇠 명패에 옛 사서함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중 몇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편지는 명패가 걸린 함에만 온다. 눈 오는 날 저녁에만 오고, 봉투에 찍힌 발신일은 늘 앞날이다. 나는 그 규칙을 누구한테 배운 적이 없다. 이 년 동안 함을 열고 닫으면서 손으로 익혔다.

“명패 없는 함은 그냥 쇠통이야.” 첫 겨울에 영감님이 한 말이다. “이름이 붙어 있어야 거기로 오지. 사람도 그렇고.”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명패 없는 다섯 함을 하나씩 열어 봤다. 거미줄과 병뚜껑과 누가 넣어 둔 옛날 승차권 한 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승차권에는 설운에서 증산까지, 요금 칠백 원이라고 찍혀 있었다.

9번 함 명패에는 함봉례라고 새겨져 있다. 지난주 눈 오던 날 들어온 봉투를 꺼내 들자 종이가 손끝에 착 붙었다. 이 함에서 나오는 편지는 언제나 조금 젖어 있다. 발신일은 2038년 12월 3일이었다.

*

봉례 할머니 집은 역에서 오 리 아래, 슬레이트 지붕에 눈이 한 뼘 얹힌 집이다. 마루 끝에 홍시가 열두 개 줄지어 얼어 있었고, 할머니는 그중 제일 물러 보이는 것을 골라 내 손에 쥐여 주고 나서야 봉투를 받았다.

“어디서 왔대?”

“십이 년 뒤에서 왔습니다.”

할머니가 봉투를 뒤집어 보다가 웃었다.

“그럼 내가 여든까지 산다는 거네.”

“그렇게 되겠습니다.”

“읽어 봐라. 나는 까막눈이다.”

“수신인 말고는 안 여는 게 규칙입니다.”

“수신인이 읽으라잖아. 니가 내 눈 해라.”

그래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남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할머니의 손자 동하가 보낸 편지였다. 할머니 팔순 잔치를 역 대합실에서 한다고, 심 할아버지가 난로를 두 개나 피우겠다고 우긴다고, 할머니는 그날 고무신 말고 운동화를 신고 오시라고 적혀 있었다.

할머니가 무릎을 쳤다.

“심가 그 양반은 그때도 살아 있나 보네. 징하다.”

“할머니도 계십니다. 운동화 신고 걸어서 올라오신다고 적혀 있습니다.”

“오 리를? 여든에?”

“동하가 그렇게 썼습니다.”

할머니는 한참 마당 쪽을 보다가, 신발장 맨 아래 칸에서 먼지 앉은 흰 운동화 한 켤레를 꺼내 마루에 올려놓았다. 딸이 서울에서 사 보낸 것인데 아까워서 한 번도 안 신었다고 했다. 뒤축을 눌러 보고, 끈을 한 번 당겨 보고, 도로 넣지 않고 그대로 마루 끝에 두었다.

“한 번 더 읽어 봐라. 난로 두 개 피운다는 데부터.”

나는 그 대목을 다시 읽었다. 할머니는 두 번째에 더 크게 웃었다.

나는 홍시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가 시려서 한참 입을 못 다물었다. 할머니는 봉투를 부엌 찬장 맨 위 칸, 쌀 포대 옆에 세워 두었다. 거기가 이 집에서 제일 마른 자리라고 했다.

*

역으로 돌아왔을 때 승강장 앞에 일 톤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짐칸에 공구 상자와 빈 마대가 실려 있었고, 대합실 안에서 모르는 목소리가 났다.

양복 위에 검은 패딩을 걸친 남자가 우편함 앞에 서 있었다. 목장갑 낀 인부 둘이 그 뒤에서 드라이버를 들고 기다렸다. 남자는 나를 보자 명함부터 내밀었다. 설운리조트 개발본부장 도재혁.

“집배원이세요? 마침 잘됐네. 이거 우체국 비품입니까?”

“비품 목록에는 없습니다.”

“그럼 고철이네요.”

그가 서류 한 장을 난로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정선군청 직인이 찍힌 계고서였다. 설운역 부지는 군이 철도공단에서 사들였고, 다시 리조트에 넘기기로 했다. 3월 31일에 행정대집행으로 역사를 헐고, 그 자리에 곤돌라 하부 승강장이 들어선다. 그 전에 안에 있는 집기는 전부 반출한다.

“오늘은 이 함들만 떼어 갑니다. 녹이 슬어서 손님들 옷 걸려요.”

“손님이 없습니다. 폐역입니다.”

“그러니까 떼어 간다는 거죠.”

그는 목소리를 낮추지도 높이지도 않았다. 서류를 읽어 주는 사람의 말투였다.

“정선군이 한 해에 이천 명씩 줄어요. 여기 설운리만 해도 예순다섯 넘은 분이 여든하나고요. 곤돌라가 들어오면 일자리가 삼백 개 생기고, 가구마다 보상금이 천이백만 원 나갑니다. 집배원님이 이 쇠통 앞에서 버티면 그 돈이 늦어져요. 누구 좋으라고 버팁니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우편함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등에 닿은 놋쇠 명패들이 패딩 너머로도 차가웠다.

“이 안에 우편물이 있습니다. 우편물은 수신인 말고는 못 가져갑니다.”

도재혁이 9번 함 뚜껑을 손가락으로 톡 열었다. 안이 비어 있었다. 오늘 아침 내가 비웠으니까.

“비었는데요?”

“지금은 비었습니다.”

“언제는 차요?”

“눈 오는 날 저녁에 찹니다.”

인부 하나가 킥 웃었다. 도재혁은 웃지 않고 나를 오래 봤다. 그러다 턱짓을 했고, 인부가 드라이버를 1번 함 모서리 나사에 댔다. 그때 난롯가에서 영감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나사 역방향이오.”

인부가 드라이버를 반대로 돌렸다. 나사가 더 깊이 박혔다. 다시 돌렸다. 또 박혔다. 사십 초쯤 그러다가 인부가 드라이버를 내려놓고 영감님을 봤다.

“어느 쪽이 역방향인데요?”

“그걸 알면 내가 뗐지.”

도재혁이 한숨을 쉬고 계고서를 도로 집어 들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그가 나를 돌아봤다.

“다음엔 경찰이랑 옵니다. 공무집행이에요. 그쪽 일자리도 우체국이죠?”

트럭이 눈길을 긁으며 내려갔다. 나는 한참 우편함에 등을 대고 서 있었고, 영감님은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삼월 삼십일일이면 눈이 몇 번 남습니까?”

“잘 오면 세 번. 안 오면 한 번.”

“그 뒤에는요?”

영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로 뚜껑을 닫는 쇳소리가 대합실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앉았다. 이 함에 들어온 편지들의 발신일은 전부 앞날이다. 삼 년 뒤, 오 년 뒤, 십이 년 뒤. 그 앞날 어느 날 누군가가 이 대합실에 와서 이 함에 봉투를 넣는다. 대합실이 삼월에 없어진다면, 그 사람들은 어디에 넣는가? 나는 그 물음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배달 가방을 멨다. 승강장 끝에 가서야 휴대폰 안테나가 한 칸 떴고, 여량우체국 허만길 국장님의 부재중 전화가 네 통 찍혀 있었다. 오후 배달이 두 시간 밀려 있었다. 다시 걸자 국장님은 인사도 없이 물었다.

“정이오 씨, 거기 폐역이지?”

“네.”

“폐역에 우체국 일이 있나?”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국장님은 그러면 됐다고 하고 끊었다. 안테나 한 칸이 도로 꺼졌다.

*

오후 세 시부터 눈이 다시 왔다. 배달을 다 돌고 역에 올라온 것이 여섯 시 조금 전이었다. 영감님은 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서 창밖 승강장을 봤다.

여섯 시 이십 분이 되면 산모퉁이 쪽 선로가 먼저 밝아진다. 누런 불빛이 눈발을 헤치고 다가오고, 녹슨 레일 위로 한 칸짜리 차가 미끄러져 들어와 소리도 없이 선다. 문이 열린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차 안은 비어 있고 운전석 유리에는 늘 성에가 끼어 있어서, 누가 모는지는 이 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난다.

우편함 안쪽에서 종이가 서걱, 하고 결을 세우는 소리다.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생기는 소리다. 가느다란 칼로 얼음 위를 긋는 것처럼 짧고 맑아서, 대합실 안이 조용하면 몇 번 함에서 나는지까지 들린다. 오늘은 9번 함에서 한 번, 12번 함에서 한 번 났다. 12번 함은 윗골 전씨 할아버지 몫인데, 할아버지는 올해 아흔하나이고 받는 편지마다 손주 결혼 소식이라 이제는 봉투를 받자마자 축의금 봉투부터 찾는다.

그리고 3번 함에서 났다.

3번 함 명패는 놋쇠가 아니라 흰 종이다. 이 년 전 내가 집배 장갑이랑 창고 열쇠를 넣어 두려고 매직으로 정이오라고 써서 테이프로 붙인 명패다. 거기에 편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차가 문을 닫고 산모퉁이로 물러났다. 불빛이 다 사라진 뒤에야 나는 3번 함을 열었다.

장갑과 열쇠 위에 봉투가 하나 얹혀 있었다. 수신 정이오, 발신일 2030년 1월 9일. 삼 년 뒤 내 생일이다. 뒷면 발신인 자리에는 이담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모른다.

보육원에서 열아홉까지 살았다. 생일에는 원장님이 단체로 케이크를 샀고, 명절에는 후원회에서 과자 상자가 왔다. 내 이름이 적힌 봉투는 입대 통지서와 계약서와 공과금 고지서뿐이었다. 남이 나한테 쓴 편지를 나는 스물여섯 해 동안 한 통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봉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종이가 여러 장 든 무게였고, 역시 조금 젖어 있었다. 모서리를 엄지로 쓸어 보다가 나는 거기 글씨가 아주 조금, 번진 것처럼 흐린 것을 봤다. 나머지 글씨는 또렷했는데 발신일의 마지막 숫자만 연필로 쓴 것처럼 옅었다.

“뜯어 봐.”

영감님이 난로를 보면서 말했다.

“안 뜯습니다.”

“왜?”

“뜯으면 삼 년 뒤가 정해질 것 같습니다.”

영감님이 부지깽이로 장작을 한 번 굴렸다. 불똥이 튀어 올랐다가 연통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 뜯어도 삼 년은 와.”

나는 봉투를 패딩 안주머니에 넣었다. 가슴 한쪽이 종이 몇 장만큼 무거워졌고, 걸을 때마다 봉투 모서리가 갈비뼈 하나를 가만히 눌렀다. 대합실을 나서다 돌아보니 난로 불빛이 우편함 열여섯의 놋쇠 명패에 하나씩 옮겨 붙어 있었고, 그 가운데 3번 함의 흰 종이 명패만 불빛을 받지 못한 채 하얗게 떠 있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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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오작가2026.10.09· 1화

    작가 서지오입니다. 폐역 대합실 우편함에 아직 오지 않은 날의 편지가 생깁니다. 1화의 첫눈 오는 저녁, 여러분이라면 앞날에서 온 편지를 열어 보시겠어요?

  • 달밤에책2026.05.02· 1화

    대사 하나하나가 인물을 만들어 주네요.

    • 서지오작가2026.05.03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두 줄은 저도 오래 고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