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105자) · 이오 · 3월 19일

내 글씨

겨울 정거장의 편지 · 서지오

3월 19일 밤 열 시, 대합실 문이 열리고 반하람이 들어왔다. 까만 코트에 운동화, 한 손에 백화점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쇼핑백 손잡이가 무게에 늘어나서 그녀의 손가락을 파고들고 있었다. 영감님은 그 시간에도 아직 대합실에 남아 있었다. 요즘은 밤늦게까지 난로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쇼핑백을 난로 앞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쪽이 기울면서 안에 든 편지가 쏟아졌다. 고무줄로 묶은 편지 뭉치가 열 개 넘게 바닥에 흩어졌다. 뭉치마다 흰 종이 띠가 둘러져 있었고, 띠에 연도가 적혀 있었다. 2012, 2013, 2014. 반듯한 그 필체가 반석환의 글씨라고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 생신 저녁 먹고, 아버지 서재에서 커피 드시는 동안 열었어요. 비밀번호 안 바꿨더라고요. 제 생일 그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또렷했는데 말이 조금 빨랐다. 코트 단추가 하나 어긋나게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아세요?”

“금고 문 열어 놓고 나왔어요. 커피잔 옆에 쪽지 하나 두고요. 가져간다고.”

영감님이 의자에서 몸을 숙여 뭉치 하나를 집었다. 띠에 2016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감님은 고무줄을 풀지 않았다. 뭉치를 손에 든 채로 한참 있다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여덟 해 동안 신문지에 싸서 서랍에 넣던 그 편지들이었다. 누구의 앞날인지 영감님은 그때도 한 통도 몰랐고 지금도 몰랐다.

반하람은 두 번째 쇼핑백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여든한 장짜리 동의서 원본이었다. 그녀가 그중 스물여섯 장을 따로 빼서 난로 옆 선반에 펼쳤다. 이름은 다 달랐는데 글씨는 하나였다. 모든 받침의 ㄹ이 같은 각도로 꺾여 있었다.

“본부장님 글씨예요. 제가 회사에서 본부장님 결재 서류를 삼 년 봤어요.”

그리고 그녀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투명한 비닐 파일 하나를 꺼냈다. 안에 봉투가 한 통 들어 있었다. 다른 편지들과 따로, 금고 맨 안쪽 칸에 이것만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게도 영감님에게도 내밀지 않았다. 선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봉투가 거의 백지였다. 불빛에 대고 기울여 보아야 연필 자국 같은 선들이 겨우 보였다. 수신 칸에 윤순례. 발신일 칸에 2027년 4월 1일. 발신인 칸의 세 글자는 거의 날아가서, 받침 두어 개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영감님이 그것을 봤다. 영감님의 손에서 2016년 뭉치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제가 못 열었어요. 수신인이 제가 아니라서요.”

“이미 뜯겨 있습니다.”

“알아요. 그래도요.”

그녀는 난로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쬐었다. 손등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정선읍에서 여기까지 사십 분을 오는 동안 차 히터를 한 번도 안 켰다고 했다. 켜면 졸릴 것 같아서, 졸면 돌아갈 것 같아서. 나는 장작을 하나 넣었다. 그녀가 그 불을 보면서 말했다.

“금고 문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본 게 이거였어요. 맨 안쪽 칸에 이것만 따로 비닐에 싸여 있었어요. 다른 건 다 고무줄로 묶어서 쌓아 뒀는데. 아버지가 이것만 따로 뒀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가끔 꺼내 보셨다는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오래 멈추지 않았다.

*

나는 윗골로 뛰어 올라갔다. 이장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장은 내복 바람에 점퍼만 걸치고 나왔다.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방으로 들어가서 바지를 입고 나왔다.

대합실에 들어선 이장은 바닥의 편지 뭉치들을 넘어 곧장 선반 앞으로 갔다. 비닐 파일 안의 봉투를 봤다. 수신인 칸의 이름을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그거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장은 비닐을 벗기고 봉투를 꺼냈다. 봉투는 이미 뜯겨 있었다. 여덟 해 전에 누가 뜯었는지 모두가 알았다. 이장이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 불빛에 댔다.

한참 아무 말도 없었다. 난로 속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 창틀이 바람에 떠는 소리, 그리고 이장의 숨소리만 들렸다. 숨이 점점 길어졌다가 점점 짧아졌다.

“이거 내 글씨다.”

이장이 중얼거렸다. 불빛에 댄 종이를 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내 글씨야. 내가 안 썼는데. 내가 쓴 적이 없는데.”

“발신일이 4월 1일입니다.”

내 말에 이장이 나를 돌아봤다.

“다음 달입니다. 이장님이 다음 달에 여기서 쓰시고, 이 함에 넣으십니다.”

이장은 다시 종이를 봤다. 그러고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옅어진 글씨라 한 줄 읽는 데 오래 걸렸고, 안 보이는 데서는 멈췄다가 짐작으로 건너뛰었다.

순례야. 칠월 열이틀 밤에 비가 많이 온다. 뒷산이 내려온다. 반가네가 깎아 놓은 자리다. 그날 나는 읍내 간담회에 가 있다. 가지 마라고 해도 나는 갈 거다. 그러니 네가 집에 있지 마라. 친정에 가라. 된장독은 두고 가라. 내가 퍼 먹을 테니.

이장이 거기서 멈췄다. 입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다음 줄은 거의 날아가 있었다. 그는 종이를 불빛에 더 가까이 댔다. 종이 가장자리가 난로 열기에 가볍게 휘었다.

미안하다. 이 편지가 너한테 가는지 나는 모른다. 역 함에 넣으면 앞날에서 옛날로 간다고 해서 넣는다. 가거든 읽어라. 안 가거든 내가 여기 넣은 것만 알아 다오.

그다음은 백지였다. 이장은 종이를 내리지 않았다. 불빛에 댄 채로 그 백지를 한참 봤다. 목에 힘줄이 섰다가 풀렸고, 다시 섰다. 턱이 떨리기 시작했고, 그러다 이장의 입에서 소리가 났다. 말이 아니었다. 사람이 오래 참던 숨이 한꺼번에 빠질 때 목구멍 깊은 데서 나는 소리였다.

영감님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장 쪽으로 한 걸음 가다가 멈췄다. 이장은 영감님을 보지 않았다. 영감님도 더 가지 않았다.

*

열한 시가 조금 넘어서 승강장 앞에 검은 SUV의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반석환이 혼자 운전해서 왔다. 기사도 도재혁도 없었다.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대합실 안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코트도 입지 않고 셔츠 바람으로 대합실에 들어왔다. 생일 저녁상에서 바로 일어난 차림이었다.

그는 딸을 먼저 봤다. 그다음에 바닥의 편지 뭉치를 봤고, 선반의 동의서를 봤고, 마지막으로 이장 손에 들린 종이를 봤다.

“하람아, 가자.”

“안 가요.”

“그건 아버지 물건이다.”

“아버지 물건 아니에요. 수신인 칸에 아버지 이름 하나도 없어요. 제가 다 봤어요.”

반석환은 딸에게서 눈을 떼고 이장을 봤다. 이장이 종이를 든 채로 돌아섰다. 두 사람 사이에 난로가 있었다.

“당신이 이걸 읽었어.”

“읽었지.”

반석환은 부인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담담했다. 그게 이장을 더 떨게 했다.

“칠월 삼일에 읽었어. 산이 위험하다는 건 오월에 보고서로 알았고. 그 편지를 순례 씨한테 줬으면 순례 씨가 군청에 갔겠지. 도로 공사가 멈췄을 거고, 허가 없이 깎은 게 드러났을 거고, 리조트 사업이 엎어졌을 거야. 이 골짜기에 들어올 돈이 다 빠졌을 거고.”

“그래서?”

“그래서 안 줬어. 비가 그렇게 올 줄은 몰랐어. 산이 정말 내려올 줄은 몰랐네.”

“몰랐다고?”

“몰랐다고 하면 변명이 되나? 안 되지. 나도 알아.”

이장이 난로를 돌아 한 걸음 나섰다. 영감님이 그 앞을 막았다. 남색 제복 등판이 이장의 가슴에 닿았다. 이장이 영감님 어깨를 밀었다. 영감님은 밀리지 않았다. 두 발을 대합실 바닥에 박고 섰다.

“비켜요, 형님.”

“경수야, 네가 치면 저 사람이 이기는 거야.”

“비키라고!”

“나는 칠월 삼일에 저 사람한테 편지를 줬어. 오늘은 안 비켜.”

반석환은 그 둘을 보지 않았다. 그는 선반 위 비닐 파일을 봤다. 거의 백지가 된 봉투를.

“그 편지는 4월 1일에 백지가 되네. 이 건물이 3월 31일에 없어지면 4월 1일에 여기서 부칠 사람이 없어. 그러면 저 종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쓰인 종이가 되지. 경찰에 들고 가 봐야 백지야.”

그 말이 끝나자 대합실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반석환이 왜 3월 31일을 한 번도 미루지 않았는지. 왜 굴착기를 먼저 들이밀었는지. 곤돌라가 아니었다. 선반 위의 종이 한 장이었다.

이장도 알았다. 영감님 어깨를 밀던 손이 멈췄다.

“그래서 역을 헐려고 했어? 이거 지우려고?”

반석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

그때 승강장에 불빛이 두 개 더 비쳤다. 군청 차와 경찰차였다. 반하람이 금고를 열고 나오면서 연지석 주무관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동의서 원본을 확보했으니 경찰과 같이 와 달라고. 경찰관 둘이 들어와서 대합실 안을 둘러봤다. 바닥에 흩어진 편지 뭉치와 선반의 동의서와 서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보더니, 나이 든 쪽 경찰관이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었다. 연지석 주무관은 동의서 스물여섯 장을 한 장씩 넘겨 보고 나서 사진을 찍었다.

반석환은 경찰관을 보고 셔츠 소매를 내렸다. 변호사가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경찰관은 임의동행을 요청했고, 그는 응했다. 대합실을 나서기 전에 그가 딸을 봤다.

“네 생일로 해 둔 게 잘못이구나.”

“아버지 생일로 해 두셨으면 제가 몰랐을 거예요.”

반석환이 나갔다. 경찰차 뒷좌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반하람은 창가에 서서 경찰차 불빛이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봤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창틀을 쥔 손가락 끝만 하얬다.

이장은 그 사이 대합실을 나갔다가 이십 분 뒤에 경운기를 몰고 돌아왔다. 경운기 공구함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놋쇠 명패였다. 모서리가 조금 휘었고 녹이 앉았는데, 윤순례라는 세 글자는 반듯했다. 2019년 여름 장례를 치르고 떼어 간 것이라고 했다. 그 뒤로 경운기 공구함에 넣고 다녔다고.

이장은 14번 함 앞에 섰다. 네모나게 덜 바랜 자국, 나사 구멍 두 개. 그는 드라이버로 명패를 거기 박았다. 나사는 옛 구멍에 그대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매직을 달라고 했다. 나는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이장은 대합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라면 상자 하나를 주워 앞판에 목경수라고 썼다. 14번 함 바로 아래에 못을 박아 그것을 걸었다.

“4월 1일에 여기 와서 쓴다. 이 함에 넣는다.”

이장은 그 말을 하고 영감님을 봤다. 오늘 처음 영감님을 똑바로 봤다.

“형님, 그날 난로 피워 놔요. 손 시리면 글씨가 삐뚤어지니까.”

영감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패 걸린 함이 백서른셋이 되었다. 선반 위 비닐 파일 속 봉투를 불빛에 대 보니, 백지에 가깝던 발신인 칸에 목 자의 네모가 연필 자국만큼 돌아와 있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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