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6,291자)
대관령
국토횡단 패러글라이딩 · 이수
대관령 서쪽 비탈 앞에서 바리오 액정의 숫자는 1,400이었다.
우한은 1,400이라는 숫자를 오래 봤다. 진부 들판에서 1,600까지 벌었다. 대관령까지 오는 12km 동안 200m를 잃었다. 산 그림자 속을 지나며 바리오는 내내 낮게 울었다. 이제 앞에 능선이 있었다. 능선은 해발 1,100m 남짓이었다. 풍력발전기 날개 끝은 그보다 백 미터쯤 더 높이 돌았다. 우한은 날개 끝보다 조금 높은 데 떠 있었다.
1,400. 은솔의 노트북 화면에서 본 숫자였다. 십 년 전 석주가 대관령 앞에서 무전으로 말한 숫자였다.
능선 위 나무들이 동쪽으로 누워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누운 게 아니라 쓸리고 있었다. 바람이 서쪽 비탈을 타고 올라와 능선을 넘으며 나무 꼭대기를 동쪽으로 쓸어 넘겼다. 나뭇잎들이 뒷면을 드러냈다. 잎 뒷면이 하얗게 반짝였다. 능선 전체가 하얀 물결처럼 일렁였다.
바람이 산을 넘으면 반대쪽에서 쏟아졌다. 비탈을 타고 내리꽂히다가 골짜기 바닥에 부딪혀 말려 올라왔다. 빨래를 비틀어 짜듯 공기가 소용돌이를 쳤다. 패러글라이더 조종사들은 그걸 로터라고 불렀다. 능선 뒤의 회전 난기류. 거기에 들어가면 날개가 접혔다. 한쪽이 접히고, 펴지려는 순간 다른 쪽이 접혔다. 바람이 세고 능선이 높을수록 소용돌이는 컸다. 소용돌이 위로 넘으려면 높아야 했다. 능선보다 한참.
“우한아.”
기철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날도 이랬다. 서풍이 높은 데서 시속 25km. 능선 위 바람이 세다. 넘을 거면 1,800은 있어야 한다. 1,400으로는.”
기철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십 년 전 석주가 떨어진 날 예보를 낸 사람이 기철이었다. 기철은 동호회 게시판에 「오늘은 된다」고 썼다. 우한은 다 알았다. 자비대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아무도 기철 앞에서 예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한은 송신 단추에 손가락을 댔다.
넘을까.
입속에서 말이 굴렀다. 우한은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 누르면 누군가 대답해야 했다. 십 년 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들은 사람이 저 아래에 있었다.
칙.
우한이 누르지 않았는데 단추 소리가 났다. 범수였다.
“이우한 씨.”
엔진 소리가 없었다. 바람 소리가 무전기를 때렸다. 범수가 차에서 내려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옛 휴게소 주차장이에요. 대관령 옛길 꼭대기. 우한 씨 보여요. 흰 날개.”
십 년 전에도 범수는 거기 서 있었다. 같은 주차장, 같은 능선 아래. 우한은 휴게소 쪽을 내려다봤다. 주차장에 은색 점 하나. 점 옆에 사람 점 셋, 넷.
“우한 씨, 내 말 들어요. 끝까지 들어요.”
범수가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이 숨소리를 찢었다.
“그날 아침에 석주 형이 그랬어요. 시흥 바닷가에서 뜨기 전에. 「범수야, 내가 대관령 앞에서 넘을까 물으면 넘으라고 해 줘. 네가 넘으라고 하면 나 넘는다.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고.」 웃으면서 그랬어요. 농담인 줄 알았어요.”
우한은 원을 그리지 않고 능선과 나란히 떠 있었다. 날개가 바람에 밀려 제자리에 멈춘 듯했다.
“형이 물었어요. 넘을까. 나는 여기 서서 저 하얀 잎들 보고 있었어요. 바람이 세다는 거 알았어요. 기다리라고 해야 한다는 거 알았어요. 근데 형이 그 말 하려고 십 년을 준비했어요. 기다리라고 하면 해가 져요. 해 지면 그날은 끝이에요. 형이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랐어요. 형 나이가 쉰이었어요.”
범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날 때 쓰는 존댓말이 아니었다. 다른 존댓말이었다.
“넘으라고 하면 형이 떨어질 것 같았고, 기다리라고 하면 형 꿈이 떨어질 것 같았어요. 단추를 눌렀어요. 아무 말도 안 나왔어요. 두 번 눌렀어요. 두 번 다 안 나왔어요. 형은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범수가 거기서 멈췄다. 칙. 단추가 떨어졌다. 다시 칙. 다시 눌렀다.
“형은 그걸 넘으라는 말로 들었어요. 내가 넘으라고 한 거예요. 말을 안 해서.”
채널에 바람 소리만 남았다. 보람이 우는 소리가 작게 섞였다. 기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수의 사무실도 조용했다.
은솔의 무전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은솔은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
“이우한 씨.”
범수가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단단해져 있었다.
“기다려요. 높이 더 벌고 넘어요.”
십 년 늦은 말이었다.
우한은 송신 단추를 눌렀다.
“예.”
단추를 뗐다. 칙.
우한은 날개를 남쪽으로 돌렸다. 능선과 나란히, 서쪽 비탈을 따라. 해가 서쪽에서 비탈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해였다. 산 반대편은 이미 그늘이었지만 서쪽 비탈은 지금이 가장 뜨거웠다. 서풍이 비탈을 타고 올라왔다. 데워진 비탈과 비탈을 오르는 바람.
어섬 둔덕과 같았다. 바람이 비탈에 부딪혀 위로 꺾였다. 우한은 비탈을 따라 남쪽으로 몇백 미터를 갔다가 돌아서 북쪽으로 몇백 미터를 갔다. 둔덕이 산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갯벌 대신 고랭지 배추밭이 발밑에 있었다. 소나무 대신 풍력발전기가 날개를 돌렸다.
바리오가 울었다. 삐, 삐. 오르는 공기와 데워진 비탈의 열기가 겹쳤다. 날개가 한 번 오갈 때마다 수십 미터씩 올랐다.
1,500. 다섯 시 이십 분.
1,600. 다섯 시 삼십 분.
해가 낮아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우한은 비탈을 오가며 서쪽을 봤다. 지나온 산들이 겹겹이 노을빛을 받았다. 어섬에서 해 질 녘에 보던 빛이었다. 다만 갯벌 대신 산이 빛을 받았다.
1,700. 1,750.
“우한아, 다섯 시 사십오 분이다.”
기철이 말했다. 해 지기까지 한 시간 반. 경포대까지 능선에서 20km 남짓. 이 날개로 미끄러지면 20km에 2,500m가 필요했다. 우한에게는 없었다. 능선을 넘은 다음에도 어딘가에서 높이를 더 얻어야 했다. 기철도 우한도 높이 얻을 자리를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릉 위에서 서풍과 부딪치는 선. 기철이 아침에 말한 선이었다.
1,850.
비탈 위로 바람이 더 오르지 않았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비스듬히 누우며 비탈의 열기가 식기 시작했다. 여기가 오늘의 천장이었다.
우한은 송신 단추를 눌렀다.
“넘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다. 범수가 대답했다.
“넘어요.”
우한은 날개를 동쪽으로 돌렸다. 가속 발판은 밟지 않았다. 능선 위에서 날개를 가장 단단하게 쥐려면 발판을 놓아야 했다. 우한은 조종줄을 손목에 한 번 감았다. 두 손을 가슴 높이로 올렸다. 날개를 머리 위에 팽팽하게 매달았다.
풍력발전기 날개가 발밑을 지나갔다. 거대한 날개 셋이 느리게 돌았다. 돌 때마다 「후웅」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올라왔다. 날개 그림자가 우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능선이 발밑으로 지나갔다. 하얀 잎들이 물결쳤다. 우한은 능선 위 750m 높이에 있었다. 기철이 말한 숫자에 50m 모자랐다.
능선을 넘었다.
공기가 사라졌다.
날개가 떨어졌다. 엘리베이터 줄이 끊긴 것 같았다. 위장이 목구멍으로 솟았다. 바리오가 비명을 질렀다. 뚜우우우우우. 끊기지 않는 낮은 소리. 숫자가 미친 듯이 줄었다. 1,800, 1,700.
다음 순간 아래에서 무언가가 날개를 쳤다. 오른쪽에서. 말려 올라오는 공기였다. 날개 왼쪽 반이 툭 꺾였다. 흰 천 절반이 안으로 접혀 들어갔다. 빨간 날개 끝이 우한의 왼쪽 어깨 옆으로 떨어졌다. 날개 반쪽만 남았다.
하네스가 왼쪽으로 뒤집히듯 기울었다. 남은 반쪽 날개가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하늘이 돌았다. 산이 돌았다. 풍력발전기가 돌았다. 우한의 몸이 바깥으로 쏠렸다. 원심력이 피를 다리로 밀어냈다.
오른손이 배 앞으로 갔다. 비상 낙하산 손잡이였다. 손바닥만 한 빨간 손잡이. 당기면 배 앞 주머니에서 둥근 낙하산이 튀어나왔다. 날개를 버리는 손잡이였다. 우한의 손가락이 손잡이에 걸렸다.
땅이 보였다. 골짜기였다. 대관령 동쪽 비탈 아래로 굽이굽이 내려가는 옛길. 옛길 옆 어딘가에서 석주의 선이 끊겼다.
우한은 손잡이를 놓았다.
오른손을 조종줄로 되돌렸다. 오른쪽 줄을 당겼다. 남은 반쪽 날개가 왼쪽으로 도는 것을 막았다. 몸무게를 오른쪽 엉덩이에 실었다. 돌던 하늘이 느려졌다. 왼손으로 접힌 쪽 줄을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펌프질하듯 당겼다. 석주가 가르친 대로였다. 「접히면 펌프질해라. 바람을 불어 넣어라. 공기가 들어갈 길을 열어 줘라.」
접힌 천 안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퍽.
흰 천이 펴졌다. 빨간 날개 끝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날개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우한의 머리 위에 반달 모양으로, 팽팽하게.
중급 날개라서 펴졌다. 고급 날개였다면 펴지는 데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에델이 망하기 전에 만든 날개. 십 년 동안 창고 상자 밑에 눌려 있던 날개. 펴졌다.
바리오가 여전히 낮게 울었다. 숫자는 1,350이었다. 500m를 잃었다. 우한은 날개를 똑바로 동쪽으로 향했다. 발밑으로 골짜기가 지나갔다. 능선에서 4km.
석주의 선이 끊긴 자리였다.
우한은 석주가 떨어진 자리를 내려다봤다. 골짜기가 좁아졌다가 넓어지는 목이었다. 양옆 산비탈이 골짜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능선을 넘은 바람이 골짜기로 쏟아져 내려와 이 목에서 한 번 더 말렸다. 석주는 능선을 넘으며 한 번 접혔을 것이다. 우한처럼 폈을 것이다. 1,400에서 넘었으니 펴고 나면 1,000m도 안 되었을 것이다. 천 미터도 안 되는 높이로 이 목에 들어왔을 것이다. 두 번째 소용돌이는 골짜기 바닥에 더 가까웠다.
우한은 1,350m로 골짜기 목을 지났다. 날개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접히지 않았다. 높이가 남아 있었다.
골짜기 목 아래로 회색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져 지나갔다. 우한은 처음에 구름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늘에 구름이 없었다.
그림자가 지나간 다음에 소리가 왔다.
우우우우웅. 땅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골짜기 양쪽 산비탈이 소리를 받아 되던졌다. 소리가 사방에서 한꺼번에 우한을 덮쳤다. 헬멧이 떨렸다. 가슴뼈가 울렸다. 바리오 소리가 묻혔다.
우한은 고개를 돌렸다. 골짜기 아래, 우한보다 수백 미터 낮은 곳을 비행기 한 대가 강릉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짙은 회색 몸통, 꼬리 쪽에 높이 얹힌 둥근 엔진 두 개, 엔진 뒤로 쌍둥이처럼 선 꼬리 날개 둘. 기수 밑에 굵은 대포 총신이 튀어나와 있었다. 날개가 곧고 넓었다.
A-10이었다. 미 공군이 땅 위의 전차와 진지를 치려고 만든 공격기였다. 일부러 낮게, 산골짜기를 따라 날았다. 오산 기지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동호인들 사이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저 비행기를 봤다는 이야기가 가끔 돌았다. 우한은 처음 봤다. 비행기는 골짜기를 따라 굽이를 돌며 날개를 한 번 기울였다. 그러고는 산 너머로 사라졌다.
소리가 늦게 따라 나갔다. 비행기가 산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골짜기에는 소리가 한참 맴돌았다. 우한은 비행기가 다가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엔진이 꼬리에 달려 소리를 뒤로 뿜었다. 앞에서 오는 동안은 바람 소리에 묻혔다. 지나가고 나서야 소리가 덮쳤다. 너무 빨라서 지나간 다음에야 알 수 있는 비행기였다.
몇 초 뒤 날개가 다시 흔들렸다. 비행기가 휘저어 놓은 공기가 골짜기를 따라 올라왔다. 우한은 조종줄을 꽉 쥐었다. 날개는 접히지 않았다.
“우한 씨! 방금 그거 뭐예요? 여기까지 쾅 했어요! 휴게소 유리창이 흔들렸어요!”
보람이었다.
“비행기.”
“무슨 비행기요? 우한 씨 옆으로 지나갔어요?”
“아래로.”
기철이 낮게 말했다.
“저 골짜기가 저공 훈련 길이다. 십 년 전에도 그랬다.”
우한은 숨을 고르며 비행기가 사라진 산 너머를 봤다. 시속 수백 km로 몇 초 만에 골짜기를 빠져나간 쇳덩어리. 우한은 오늘 아침부터 일곱 시간을 날아 이 골짜기에 닿았다. 둘 다 같은 하늘을 썼다.
석주가 기다렸다면. 범수가 말했다면. 은솔에게 줄 대답이 거기 있었다.
골짜기 목을 빠져나가자 산들이 갑자기 물러섰다.
눈앞이 열렸다.
바다였다.
동쪽 끝까지, 하늘 끝까지. 짙고 푸른 물이 수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해가 등 뒤로 기울어 바다 위에 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 끝에서부터 바다가 노을을 받아 반짝였다. 바다 앞에 강릉 시내가 엎드려 있었다. 시내 북쪽에 둥근 호수 하나가 하늘을 담고 있었다. 호수 너머에 흰 모래밭이 활처럼 휘어 바다와 땅을 갈랐다.
경포호, 경포대.
이어폰 속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무전기 넷이 모두 조용했다. 우한은 들었다. 바리오 소리와 바람 소리 사이로, 채널 저편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칙.
은솔의 무전기였다. 단추가 눌렸다.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가 길게 이어지다가 끊겼다.
칙.
단추가 떨어졌다. 우한은 바다를 향해 미끄러졌다. 경포대까지 18km, 높이 1,300m. 모자랐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 쪽으로 밀려와 서풍과 부딪치는 선이 어딘가에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