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15자)

그날 왜 말 안 했어요

국토횡단 패러글라이딩 · 이수

여주 들머리 하늘이 달라지고 있었다⁠. 오후 한 시 사십 분이었다⁠. 아까까지 손바닥만 하던 뭉게구름들이 몸을 불리고 있었다⁠. 위로만 크지 않고 옆으로 퍼졌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 있던 파란 틈이 좁아졌다⁠. 땅에 드리운 구름 그림자가 이어 붙기 시작했다⁠.

우한은 1⁠,700m에서 구름 바닥을 따라 미끄러지며 그림자를 봤다⁠. 그림자가 덮인 땅은 데워지지 않았다⁠. 데워지지 않은 땅에서는 써멀이 솟지 않았다⁠. 구름이 너무 잘 자라면 제 발밑의 햇빛을 가려 제 뿌리를 끊었다⁠. 기철은 그런 하늘을 「⁠과발달⁠」이라고 불렀다⁠. 석주는 「⁠구름이 욕심부린다⁠」고 불렀다⁠.

이어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송신 단추를 눌렀다가 떼는 소리였다⁠. 칙⁠.

그다음에 목소리가 들어왔다⁠.

“⁠이우한 씨⁠.⁠”

범수였다⁠.

보람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기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수의 회사 무전기도 조용했다⁠. 범수가 자비대 채널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범수는 어섬에서 승합차를 몰고 사라졌다⁠. 활공장으로 갔을 거라고들 생각했다⁠.

“⁠여주에서 내려요⁠.⁠”

우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후에 구름 퍼집니다⁠. 지금 위성 사진 봤어요⁠. 여주부터 원주까지 다 덮여요⁠. 세 시 전에 남한강 못 건너면 강가 논에 내리게 돼요⁠. 거기 전깃줄 많아요⁠.⁠”

범수의 목소리 뒤로 엔진 소리가 깔려 있었다⁠. 차가 달리고 있었다⁠. 활공장 쪽이 아니었다⁠. 우한은 바리오 옆에 꽂아 둔 휴대전화를 꺼내 볼 수 없었다⁠. 대신 기철이 낮게 말했다⁠.

“⁠범수 차⁠, 영동고속도로다⁠. 문막 나들목 지났다⁠.⁠”

“⁠위치 공유 켜셨어요⁠?⁠”

“⁠단톡방에 들어와 있다⁠. 아까 들어왔어⁠. 아무 말도 안 쓰고⁠.⁠”

범수는 우한보다 앞에 있었다⁠. 차로 먼저 원주 쪽으로 가 있었다⁠. 막으러 가는 건지 받으러 가는 건지 우한은 알 수 없었다⁠.

“⁠이우한 씨⁠, 들려요⁠?⁠”

우한은 송신 단추에 손가락을 댔다⁠. 누르지 않았다⁠. 어젯밤 들은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되살아났다⁠.

어젯밤 열한 시⁠, 우한은 남수의 물류센터 창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형광등 아래 흰 날개가 바닥 가득 펼쳐져 있었다⁠. 지게차들이 서 있는 사이로 날개 줄 수백 가닥을 하나씩 손가락에 걸어 훑었다⁠. 무릎의 철심이 시멘트 바닥에 닿아 시큰거렸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은솔이었다⁠.

“⁠아직 거기예요⁠?⁠”

“⁠예⁠. 줄 보고 있습니다⁠.⁠”

“⁠줄 다 봤어요⁠?⁠”

“⁠삼분의 이요⁠.⁠”

은솔이 잠깐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낡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테이프가 감기는 소리였다⁠.

“⁠상자 안에 이게 있었어요⁠. 아까 말 안 했죠⁠. 그 사람이 비행할 때마다 무전기에 작은 녹음기를 꽂고 다녔어요⁠. 비행 일지 쓴다고⁠. 그날 것도 있었어요⁠.⁠”

“⁠들으셨습니까⁠?⁠”

“⁠오늘 들었어요⁠. 처음으로⁠. 십 년 동안 못 들었는데 날개를 보내고 나니까 들리더라고요⁠.⁠”

은솔이 숨을 들이쉬었다⁠.

“⁠우한 씨도 들어요⁠. 대관령 앞부분만⁠.⁠”

테이프가 돌았다⁠. 지직거리는 소리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헬멧 마이크가 잡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목소리⁠.

“⁠범수야⁠, 나 대관령 앞이다⁠. 1⁠,400⁠.⁠”

석주였다⁠. 우한은 십 년 만에 석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생각보다 높고 가벼웠다⁠.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앞에 구름 끊겼다⁠. 능선 위로는 하나도 없어⁠. 바람이 세⁠. 서풍이 능선 넘어가는 게 보인다⁠. 나무들이 다 동쪽으로 누웠어⁠.⁠”

잠깐 쉬었다⁠.

“⁠넘을까⁠?⁠”

테이프가 지직거렸다⁠. 바람 소리만 났다⁠. 오 초⁠, 십 초⁠.

칙⁠.

송신 단추를 누르는 소리였다⁠. 누가 단추를 눌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뗐다⁠.

다시 바람 소리⁠. 이십 초쯤⁠.

칙⁠.

또 한 번⁠. 말 없이 누르고 뗀 소리⁠.

“⁠범수야⁠?⁠”

석주가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고개 다 왔으면 위에서 보이지⁠? 나무 보여⁠?⁠”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에 석주가 말했다⁠. 웃음기가 빠진 목소리였다⁠.

“⁠넘는다⁠. 하늘은 자유다⁠.⁠”

은솔이 테이프를 멈췄다⁠. 철컥 소리가 났다⁠. 물류센터 창고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지게차 배터리 충전기에서 빨간 불이 깜빡였다⁠.

“⁠그 앞부분에 범수 씨가 계속 말해요⁠. 형 나 고개 다 왔어⁠, 형 바람 세다⁠, 형 밥은 먹었어⁠. 계속 말하다가 저기서 안 해요⁠. 저 소리만 두 번 들려요⁠.⁠”

“⁠칙 소리⁠.⁠”

“⁠그 사람이 그랬어요⁠. 단추 누르면 칙 소리 나고 떼면 또 난다고⁠. 누르고 말 안 하면 그 소리만 간다고⁠. 나 저거 알아요⁠. 그 사람이 집에서 무전기 가지고 장난칠 때마다 들었어요⁠.⁠”

우한은 날개 줄을 쥔 채로 앉아 있었다⁠. 손에 쥔 줄이 빨간 줄이었다⁠.

“⁠범수 씨가 무전기를 들고 있었어요⁠. 말을 하려고 했어요⁠. 두 번이나⁠. 그런데 안 했어요⁠.⁠”

“⁠형수님⁠.⁠”

“⁠왜 안 했어요⁠?⁠”

은솔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학원에서 아이들 앞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목소리였다⁠. 우한이 들은 바로는 그랬다⁠.

“⁠그 사람은 물어봤어요⁠. 넘을까⁠, 하고⁠. 그 사람이 남한테 묻는 거 나 그때 처음 들었어요⁠. 결혼하고 십오 년 동안 하늘 일은 한 번도 나한테 안 물었어요⁠. 근데 저기서 물었어요⁠. 범수 씨한테⁠. 그리고 범수 씨는⁠.⁠”

은솔이 말을 끊었다⁠. 한참 뒤에 이었다⁠.

“⁠우한 씨⁠, 대관령까지 가요⁠. 가서 알아 와요⁠. 왜 안 기다렸는지도⁠, 왜 말 안 했는지도⁠.⁠”

전화가 끊겼다⁠. 우한은 남은 삼분의 일의 줄을 훑었다⁠. 새벽 세 시에 끝났다⁠. 끊어진 줄은 없었다⁠.

“⁠이우한 씨⁠!⁠”

범수가 다시 불렀다⁠.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엔진 소리도 커졌다⁠. 범수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들리면 대답해요⁠! 여주에서 내리라고요⁠! 강변 들판 넓은 데 있어요⁠. 신륵사 지나서 하천 둔치⁠. 거기 전깃줄 없어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우한은 석주의 말을 귀에 담았다⁠. 범수는 앞질러 가서 우한이 내릴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막으러 가는 것도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십 년 전과 같은 일을 하러 가고 있었다⁠. 회수차를 몰고⁠,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의 앞을 달리고 있었다⁠.

1⁠,550m⁠. 그림자 사이로 마지막 햇빛 조각이 여주 시내 위에 떨어져 있었다⁠. 시내 남쪽 아파트 단지 주차장 위였다⁠. 우한은 그쪽으로 날개를 돌렸다⁠. 거기서 기둥 하나만 잡으면 남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못 잡으면 범수가 말한 둔치였다⁠.

보람이 작게 말했다⁠.

“⁠우한 씨⁠, 회장님한테 대답 안 해요⁠?⁠”

“⁠보람아⁠.⁠”

기철이 말했다⁠. 채널을 비우라는 뜻이 아니었다⁠. 기철의 목소리에 그런 뜻이 없었다⁠.

“⁠우한이가 알아서 한다⁠.⁠”

우한은 송신 단추를 눌렀다⁠.

칙⁠.

무전기가 우한의 입 마이크를 열었다⁠. 열린 채로 몇 초가 지났다⁠. 바람이 마이크를 때리는 소리가 채널을 탔다⁠. 범수도⁠, 기철도⁠, 보람도⁠, 남수도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은솔은 듣지 못했다⁠. 은솔에게는 무전기가 없었다⁠.

“⁠회장님⁠.⁠”

엔진 소리가 멈칫했다⁠. 범수가 페달에서 발을 뗀 것 같았다⁠.

“⁠그날 왜 말 안 했어요⁠.⁠”

우한은 단추를 뗐다⁠. 칙⁠.

채널이 비었다⁠. 지직거리는 소리만 났다⁠. 오 초⁠, 십 초⁠. 바리오가 낮게 울었다⁠. 뚜우우⁠. 1⁠,500m⁠. 1⁠,480m⁠. 여주 시내 위 햇빛 조각이 조금씩 작아졌다⁠.

칙⁠.

누군가 송신 단추를 눌렀다⁠.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엔진 소리도 없었다⁠. 차를 세운 것 같았다⁠. 범수의 숨소리 같은 것이 지직거림 사이로 한 번 지나갔다⁠.

칙⁠.

단추가 떨어졌다⁠.

문막 휴게소 못 미쳐 갓길에서 마범수는 승합차 비상등을 켜 두고 있었다⁠. 왼손에 무전기를 쥐고 있었다⁠. 십 년 된 무전기였다⁠. 자비대 회원들은 몇 해 전부터 작고 가벼운 새 무전기를 썼다⁠. 범수만 이걸 썼다⁠. 고무 안테나 끝이 하얗게 닳아 있었다⁠.

범수는 단추를 한 번 더 누르려다 말았다⁠. 엄지손가락이 단추 위에서 떨렸다⁠. 오른손은 핸들을 쥐고 있었다⁠. 핸들 가죽이 땀에 젖어 미끈거렸다⁠.

「⁠그날 왜 말 안 했어요⁠.⁠」

같은 무전기였다⁠. 같은 채널이었다⁠. 십 년 전에도 범수는 이 무전기를 왼손에 쥐고 있었다⁠. 대관령 옛 고갯길 꼭대기 주차장이었다⁠. 차에서 내려 능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능선 위 나무들이 모두 동쪽으로 누워 있었다⁠. 나뭇잎 뒷면이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바람이 능선을 넘어 반대편 비탈로 쏟아지고 있었다⁠. 범수는 하얀 잎들을 봤다⁠. 석주가 「⁠넘을까⁠」라고 물었다⁠.

범수는 단추를 눌렀다⁠. 입을 열었다⁠. 입 안에서 두 낱말이 부딪쳤다⁠. 범수는 어느 쪽도 내보내지 못했다⁠. 단추를 뗐다⁠. 다시 눌렀다⁠. 다시 뗐다⁠. 석주가 「⁠넘는다⁠」라고 말했다⁠.

십 년 동안 범수는 대관령 능선의 자리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동호회 사고 보고서에는 「⁠갑작스러운 난기류⁠」라고 썼다⁠. 장례식장에서 은솔에게 고개를 숙였다⁠. 은솔은 범수를 보지 않았다⁠. 범수는 장례 뒤로 활공장 계약서에 조항을 넣고⁠, 보험을 들고⁠, 회칙을 만들었다⁠. 회칙 7조를 만든 사람도 범수였다⁠. 회장 허락 없는 장거리 비행 금지⁠. 회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넘을지 묻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대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범수는 무전기를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비상등을 껐다⁠. 핸들을 꺾어 갓길에서 빠져나왔다⁠. 휴대전화가 조수석 무전기 옆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이름이었다⁠. 범수는 다음 나들목에서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다시 하늘⁠. 우한은 범수의 침묵을 들으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보람이 「⁠회장님⁠?⁠」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기철이 보람을 부르지 않았다⁠.

우한은 햇빛 조각을 향해 미끄러졌다⁠. 바리오가 울지 않았다⁠. 남한강이 동쪽에서 넓게 빛나고 있었다⁠. 강 위로 구름 그림자가 강물보다 짙게 흘러가고 있었다⁠.

햇빛 조각 끝자락에서 바리오가 한 번 울었다⁠. 삐⁠. 곧 끊겼다⁠. 남은 열기 한 줌이었다⁠. 우한은 바리오가 운 자리에서 원을 두 바퀴 그렸다⁠. 얻는 높이보다 잃는 높이가 컸다⁠. 원을 풀었다⁠. 남한강까지 6km였다⁠. 계산이 끝나기 전에 날개가 먼저 강 쪽을 향했다⁠. 강물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미동도 없이 떠 있었다⁠. 갈매기는 강을 따라 서쪽으로⁠, 우한은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갈매기도 오늘 바다에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이어폰 속에서 남수가 처음으로 말을 했다⁠.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범수야⁠.⁠”

남수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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