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96자)

보호자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이겸은 응급실 접수대 앞에서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으로 접수대를 짚었다⁠. 숨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국회 복도에서 구급차까지⁠, 구급차에서 이 접수대까지 지팡이를 짚고 뛰었다⁠. 다리가 떨렸고 손끝이 저렸다⁠. 유리문 너머 침대 위에서 효란이 산소 가리개를 쓰고 누워 있었다⁠. 은빛 머리가 하얀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접수대 직원은 이십 대 후반쯤 된 여자였다⁠. 화면을 보며 빠르게 물었다⁠.

“⁠환자분 성함이요⁠.⁠”

“⁠탁효란이요⁠. 일흔이요⁠.⁠”

“⁠보호자분 성함이랑 관계 알려 주세요⁠.⁠”

“⁠서이겸이요⁠. 남편이요⁠.⁠”

직원의 손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직원은 고개를 들어 이겸을 위아래로 보았다⁠. 부스스한 머리⁠, 창백한 얼굴⁠, 지팡이⁠, 보리차 얼룩이 아직 희미하게 남은 하늘색 셔츠⁠.

“⁠손자분이세요⁠?⁠”

“⁠남편이요⁠.⁠”

“⁠아⁠, 네⁠. 그⁠…⁠… 남편분⁠.⁠”

직원이 화면에 무언가를 적으려다 다시 멈췄다⁠. 화면 속 관계 칸에 「⁠배우자⁠」를 누르자 나이 칸의 숫자 둘이 나란히 떴다⁠. 일흔과 서른이었다⁠. 직원은 숫자를 한참 보았다⁠. 화면이 붉게 깜박였다⁠. 「⁠확인 필요⁠」⁠.

뒤에서 조용한 걸음이 다가왔다⁠. 구급차에 같이 탔던 동규였다⁠. 양복 소매가 대리석 바닥의 먼지로 하얬다⁠. 동규가 접수대에 손을 얹었다⁠.

“⁠남편분 맞습니다⁠. 에버슬립 원장입니다⁠. 제가 확인해 드립니다⁠.⁠”

직원이 동규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뉴스에서 본 얼굴이었다⁠. 직원은 아무 말 없이 확인 단추를 눌렀다⁠. 화면이 초록이 되었다⁠. 이겸은 동규를 보았다⁠. 마흔 해 전 아내를 깨운 사람이 지금 아내의 남편을 남편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이겸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삼켰다⁠. 동규도 바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시술 동의서입니다⁠. 보호자분 손끝 대 주세요⁠.⁠”

이겸은 오른손 검지를 판에 댔다⁠. 판이 붉게 깜박였다⁠. 「⁠지문을 읽을 수 없습니다⁠」⁠. 은행에서 본 글씨였다⁠. 이겸은 왼손 검지를 댔다⁠. 또 붉었다⁠.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펜 하나를 내밀었다⁠.

“⁠그럼 손글씨로 이름 써 주세요⁠.⁠”

이겸은 펜을 쥐었다⁠. 손끝으로 쥐지 않고 둘째 마디로 받쳤다⁠. 화면 위에 서이겸 세 글자를 썼다⁠. 글자가 떨렸다⁠. 이 자는 받침이 비뚤어졌고 겸 자는 획이 하나 겹쳤다⁠. 마흔 해 전 원장실에서 효란이 쓴 이름도 두 줄로 겹쳤다고 했다⁠. 이겸은 겹친 획을 내려다보았다⁠. 직원이 동의서를 받아 넘겼다⁠.

*

시술은 한 시간 반 걸렸다⁠. 의사는 효란의 심장 혈관 하나를 넓혔다고 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약을 바꾸고 계단을 줄이고 화를 덜 내면 된다고 했다⁠. 이겸은 몇 해냐고 물었다⁠. 의사는 효란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몇 해라고만 할 수 있다고⁠. 시계처럼 말해 드릴 수 없다고⁠.

밤이 되어 효란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산소 가리개를 벗긴 얼굴이 작았다⁠. 이겸은 침대 곁 의자에 앉아 효란의 왼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손등에 주삿바늘 자국이 하나 있었다⁠. 반지가 마디 밑에 그대로 있었다⁠.

은희가 귤 봉지를 두고 갔다⁠. 이겸은 귤 하나를 집어 엄지손톱으로 꼭지 옆을 눌렀다⁠. 효란처럼 껍질을 한 줄로 돌려 깠다⁠. 반 바퀴쯤 돌았을 때 껍질이 끊겼다⁠. 다시 해 보았다⁠. 이번에는 한 바퀴 반에서 끊겼다⁠. 이겸은 끊긴 껍질 두 조각을 침대 위 효란의 손 옆에 나란히 놓았다⁠.

넉 달 전에는 효란이 이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겸이 침대에 누워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지금은 효란이 침대에 누웠고 이겸이 의자에 앉아 껍질을 떨어뜨렸다⁠. 이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효란의 맥박을 손끝으로 찾았다⁠. 손끝이 이제 맥박을 찾았다⁠. 느렸고⁠, 가끔 한 박씩 쉬었다⁠. 쉬었다가 다시 왔다⁠.

*

이튿날 점심때 동수와 순혜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혜는 떡 상자를⁠, 동수는 신발 상자를 들었다⁠. 효란은 아직 약 기운에 잠들어 있었다⁠. 순혜가 효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이마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머리를 자를 때 하던 손짓이었다⁠.

동수는 신발 상자를 침대 발치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굽 낮은 갈색 단화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바닥에 고무를 두 겹으로 덧댔다⁠.

“⁠계단에서 안 미끄러지게⁠. 대리석 바닥에서도⁠.⁠”

“⁠아저씨가 만드셨어요⁠?⁠”

“⁠내가 만들었지 누가 만들어⁠. 굽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이겸은 단화를 집어 들고 바닥을 손끝으로 쓸었다⁠. 고무의 오돌토돌한 결이 손끝에 하나씩 닿았다⁠. 이겸이 고맙다고 하자 동수는 대꾸하지 않고 침대 옆 짐가방을 끌어당겼다⁠. 효란의 갈아입을 옷과 약 상자가 든 가방이었다⁠.

“⁠퇴원할 때 이건 내가 든다⁠.⁠”

“⁠제가 들어요⁠. 남편이니까⁠.⁠”

“⁠너 지팡이 짚잖아⁠. 한 손은 지팡이⁠, 한 손은 효란이⁠. 가방 들 손이 어딨어⁠.⁠”

“⁠입에 물게요⁠.⁠”

“⁠이빨 나간다⁠. 너 백열두 살까지 일해야 된다며⁠.⁠”

순혜가 떡 상자 뚜껑으로 두 남자의 손등을 차례로 때렸다⁠. “⁠조용히들 해⁠. 환자 깬다⁠.⁠” 두 남자가 동시에 손을 거뒀다⁠. 순혜가 가방을 제 무릎 위로 가져가 꼭 끌어안았다⁠. “⁠퇴원 날 가방은 내가 들어⁠. 미용실 원장이 제일 힘세⁠.⁠”

해 질 녘에 순혜가 먼저 나가고 동수가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동수는 이겸을 복도로 불러냈다⁠. 복도 창가에서 동수는 이겸을 보지 않고 창밖의 강을 보았다⁠.

“⁠네가 남는 날 말이야⁠. 효란이 가고 나서⁠.⁠”

“⁠네⁠.⁠”

“⁠그날 나 없을 거다⁠. 내가 네 살 많아⁠.⁠” 동수는 구두약에 물든 엄지로 창틀을 한 번 문질렀다⁠. “⁠그러니까 굽 가는 거 현주한테 미리 배워 둬⁠. 효란이 신발은 왼쪽 굽이 바깥으로 닳아⁠. 걷는 버릇이 그래⁠. 그거 갈아 줄 사람이 있어야 돼⁠. 끝까지⁠.⁠”

이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동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굽 소리가 병원 복도 끝까지 또박또박 울렸다⁠.

*

가정법원 마지막 심문은 이틀 뒤였다⁠. 이겸은 혼자 갔다⁠. 은희가 따라오겠다는 것을 병실에 남겨 효란 곁을 지키게 했다⁠. 동수가 법원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것은 사양했다⁠. 동수는 이십 년 만에 차를 차고에서 꺼냈고⁠,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현주네 가게 화분을 깼다⁠. 이겸은 무인 택시를 탔다⁠.

심문실에는 판사와 병원 변호사와 동규가 있었다⁠. 은희가 신청을 거둔 뒤로 병원 혼자 신청인이었다⁠. 변호사는 회색 정장 대신 남색 정장을 입었고⁠, 화면을 판사 앞에 내밀었다⁠.

“⁠병원은 신청을 유지합니다⁠. 평가 결과는 존중합니다⁠. 다만 그 뒤의 일을 보아 주십시오⁠. 서이겸 님은 무료 치료를 거절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셨습니다⁠. 본인 계산으로도 백열두 살까지 갚으셔야 합니다⁠. 배우자분은 이틀 전 쓰러지셨습니다⁠. 일흔이시고 심장이 나쁘십니다⁠. 서른 살 남편분이 앞으로 아픈 배우자의 간병과 빚을 혼자 지시겠다는 겁니다⁠. 스스로에게 이로운 판단을 하실 수 있는지⁠, 법원이 한 번 더 보아 주셔야 합니다⁠.⁠”

판사가 이겸을 보았다⁠.

“⁠서이겸 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이겸은 휠체어가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탁자 옆에 기대 두고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손끝이 탁자의 나뭇결을 하나씩 짚었다⁠.

“⁠변호사님 말씀 다 맞아요⁠. 저 빚졌어요⁠. 백열두 살까지 갚아야 돼요⁠. 아내는 아프고⁠, 저보다 먼저 갈 거예요⁠.⁠”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겸은 탁자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요⁠, 판사님⁠. 이로운 거 고르는 게 판단이면⁠, 제 아내는 마흔 해 동안 판단을 한 번도 못 한 사람이에요⁠. 다달이 보존료 내고⁠, 이혼 서류 받아 놓고 안 내고⁠, 자기 가게 팔아서 남의 위로금 갚고⁠. 하나도 안 이로웠어요⁠. 저는 그 사람이 판단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판사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이겸은 이어서 말했다⁠.

“⁠병원이 정해 준 대로 하면 저한테는 이로워요⁠. 두 해 웃고⁠, 빚 없고⁠, 동생네 가서 살고⁠, 아내는 아내대로 살고요⁠. 근데 저는 마흔 해 동안 남이 정해 준 대로 잤어요⁠. 깨우는 날도 병원이 정했고⁠, 바깥소식도 병원이 정했고⁠, 면회도 병원이 정했어요⁠. 이제 하나는 제가 정하고 싶어요⁠. 손해 보는 걸로요⁠.⁠”

“⁠무엇을 정하시겠습니까⁠?⁠”

“⁠아내 옆에 있는 거요⁠. 아내가 먼저 가는 날까지요⁠. 그다음 날부터는 그다음에 정할게요⁠.⁠”

심문실이 조용했다⁠. 동규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변호사는 동규를 돌아보았고⁠, 동규는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판사는 화면에 오래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후견 개시 신청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서이겸 님은 스스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결정의 손익은 법원이 대신 따지지 않습니다⁠. 두 분의 혼인은 유효합니다⁠. 국회에서 무엇이 바뀌든⁠, 오늘 이 결정은 두 분 얼굴을 보고 했다고 적어 두겠습니다⁠.⁠”

*

법원 계단은 한낮 볕에 하얗게 달아 있었다⁠. 이겸은 지팡이를 짚고 한 칸씩 내려갔다⁠. 동규가 뒤따라 내려와 이겸 옆에 섰다⁠. 계단 아래 큰길 전광판에 뉴스가 지나갔다⁠. 「⁠장기 수면자 치료제 공공 재원 법안⁠, 상임위 통과 … 본회의 표결 앞둬⁠」⁠. 동규는 전광판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통과되면 다음 기상이 다시 잡힙니다⁠. 가을쯤⁠.⁠”

“⁠잘됐네요⁠.⁠”

“⁠다만 손해배상 판결이 먼저 나면 공공 재원의 일부가 여사님께 먼저 갑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이겸 님⁠, 여사님께 손해배상만은 거둬 달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저는 이미 원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이사회에 말했습니다⁠. 벌은 제가 받습니다⁠. 돈은 지하 3층에 먼저 가게 해 주십시오⁠.⁠”

이겸은 계단 중간에 멈췄다⁠. 동규를 돌아보았다⁠. 예순여섯의 원장이 한 계단 위에서 이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머리가 볕에 반짝였다⁠.

“⁠원장님⁠. 그건 아내 일이에요⁠. 마흔 해가 아내 거니까⁠, 마흔 해 치 돈도 아내가 정해요⁠. 저는 대신 말 안 해요⁠. 서로 대신 갚지 않기로 했어요⁠.⁠”

동규는 한동안 이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십 년 전에도 누가 그렇게 말해 줬으면 좋았겠습니다⁠.⁠”

“⁠그때 원장님은 아무한테도 안 물어보셨잖아요⁠.⁠”

“⁠네⁠. 그래서 지금 묻습니다⁠.⁠”

동규는 이겸을 앞질러 계단을 내려갔다⁠. 이겸은 볕 아래에서 손바닥을 펴 보았다⁠. 손끝이 볕의 뜨거움을 손바닥보다 먼저 알았다⁠.

*

병실에 돌아온 것은 밤 열 시였다⁠. 은희는 보호자 의자에서 졸고 있다가 이겸을 보자 일어나 오빠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나갔다⁠. 창밖으로 강변 아파트의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협탁 위에 이틀 전 이겸이 끊어 놓은 귤 껍질 두 조각이 말라 있었다⁠.

이겸은 의자에 앉아 효란의 손을 잡았다⁠. 효란의 손가락이 이겸의 손바닥 안에서 움찔했다⁠. 이겸은 숨을 멈추었다⁠. 효란의 속눈썹이 떨렸다⁠.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갈색 눈이 천장을 헤매다가 이겸의 얼굴에 닿았다⁠. 마른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몇 시야⁠?⁠”

이겸은 웃음이 터졌다⁠. 웃음과 같이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다⁠. 이겸은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고 손목의 단말을 보았다⁠.

“⁠열 시 십사 분⁠.⁠”

“⁠아⁠, 다행이다⁠. 내일 오후 근무라⁠.⁠”

“⁠당신 가게 팔았어⁠.⁠”

“⁠아⁠, 맞다⁠.⁠”

효란이 웃었다⁠. 웃다가 가슴을 눌렀다⁠. 이겸은 효란의 손을 이불 위에 올려놓고 제 손으로 덮었다⁠. 두 반지가 서로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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