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20자)

같은 식탁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효란은 동규가 부엌 식탁 앞에 앉기 전에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구월 마지막 주 오후 세 시였고⁠, 시계는 이 초 늦게 가고 있었다⁠. 동규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동규의 귀도 이제 늦은 초침 소리를 잡았다⁠.

“⁠이 초 늦습니다⁠.⁠”

“⁠일부러요⁠. 원장님 병원 따라 하느라⁠.⁠”

“⁠이제 원장이 아닙니다⁠.⁠”

동규는 칠 벗겨진 의자에 앉으려다가 효란의 눈짓을 보고 새 의자로 옮겨 앉았다⁠. 칠 벗겨진 의자는 이겸의 자리였다⁠. 이겸은 아래층 가게에서 현주 밑에서 뒷판을 따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딸깍 소리가 이따금 올라왔다⁠.

동규는 짙은 양복 대신 낡은 회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사회가 사직을 받아들인 지 보름이 지났다고 했다⁠. 효란은 보리차를 따라 동규 앞에 놓았다⁠. 동규가 컵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병원 보리차보다 진하네요⁠.⁠”

“⁠공짜 아니에요⁠. 나중에 청구할 거예요⁠.⁠”

동규는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점퍼 주머니에서 손목 화면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뉴스 두 줄이 떠 있었다⁠. 「⁠장기 수면자 치료제 공공 재원 법⁠, 본회의 통과⁠」⁠. 아래 줄은 「⁠장기 수면 혼인 정리 법안 수정 … 혼인이 끝나는 것을 기본에서 빼고⁠, 기상 뒤 한 해 동안 두 사람이 함께 정하도록⁠」⁠.

“⁠여사님 말씀이 법안에 들어갔습니다⁠.⁠”

“⁠제 말 아니에요⁠. 대기실에 반지 뺀 선생님 말이랑 반반이에요⁠.⁠”

“⁠그분은 지난주에 혼인을 끝내셨습니다⁠. 아내분이 아직 주무셔서⁠, 깨어나시는 날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서약서를 따로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규가 화면을 넘겼다⁠. 법원 화면이었다⁠. 「⁠탁효란 대 에버슬립 손해배상 청구 · 첫 변론 · 시월 이십일⁠」⁠.

“⁠다음 달 기상이 다시 잡혔습니다⁠. 공공 재원으로요⁠. 그런데 이 판결이 먼저 나면 그 재원 가운데 일부가 여사님께 먼저 갑니다⁠. 법이 그렇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러 오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번째요⁠. 시계방⁠, 국회 복도⁠, 이겸이한테 법원 계단에서⁠, 오늘⁠.⁠”

“⁠세고 계셨군요⁠.⁠”

“⁠시계방 사람은 다 세요⁠.⁠”

효란은 식탁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오후 볕을 받았다⁠.

“⁠거둘게요⁠.⁠”

동규가 고개를 들었다⁠.

“⁠마흔 해 치⁠, 안 받을게요⁠. 원장님 위해서 거두는 거 아니에요⁠. 지하 3층에 아직 회장님 아들이 있고⁠, 반지 뺀 선생님 아내가 있고⁠, 저처럼 깨어 있는 사람들이 매달 돈을 부치고 있어요⁠. 저는 마흔 해를 이미 살았어요⁠. 돈으로 다시 사지 않을래요⁠.⁠”

“⁠감사⁠…⁠…⁠.⁠”

“⁠조건이 있어요⁠.⁠”

동규가 말을 멈추었다⁠. 효란은 동규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기상 다시 하는 날⁠, 가족들 앞에 서세요⁠. 지하 3층 홀에서요⁠. 그 밤에 깨운 넷의 이름을 원장님 입으로 다 부르세요⁠. 고장 말고 이름으로요⁠. 돌아가신 두 분도요⁠. 저는 그 두 분 이름을 몰라요⁠. 마흔 해 동안 고장이라고만 들어서요⁠.⁠”

동규는 한참 말이 없었다⁠. 컵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가 풀렸다⁠.

“⁠그리고 원장님 남은 해는 지하 3층에서 쓰세요⁠. 원장 말고⁠, 봉사 보호자로요⁠. 저 엄 여사 할 때처럼요⁠. 날마다 오후 세 시에 가서 아무 캡슐 옆에나 앉아 계세요⁠. 깨어 있는 가족이 못 오는 날⁠, 그 사람 대신 앉아 계세요⁠.⁠”

“⁠그건 벌입니까⁠?⁠”

“⁠아니요⁠. 마흔 해 동안 제가 한 일이에요⁠. 기다리는 거요⁠. 원장님도 해 보세요⁠.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요⁠.⁠”

동규는 컵을 내려놓고 식탁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머리를 깊이 숙였다⁠. 하얀 정수리가 효란 앞에 보였다⁠. 동규는 고개를 든 뒤에야 짧게 대답했다⁠.

“⁠세 시에 가겠습니다⁠.⁠”

동규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손목 화면이 떨렸다⁠. 태민이 할머니에게 말했고⁠, 할머니가 동네에 말했다⁠. 「⁠낙원동 할매회⁠」가 한꺼번에 울렸다⁠.

「⁠미용실 순혜⁠: 거뒀다고⁠?⁠?⁠?⁠?⁠?⁠? 그 돈이면 미용실이 열 개야⁠」

「⁠떡집⁠: 떡집은 스무 개⁠」

「⁠미용실 순혜⁠: 동수 아저씨는 부스 백 개래⁠」

「⁠떡집⁠: 부스 백 개 어디다 놔⁠」

효란은 웃으며 화면을 엎어 놓았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지팡이 없는 발소리였고⁠, 일곱 번째 칸에서 한 번 쉬었다⁠. 이겸이 부엌 문턱에 서서 손에 묻은 기름을 앞치마에 닦았다⁠. 현주가 빌려준 앞치마였다⁠. 다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원장님 계단에서 울던데⁠.⁠”

“⁠우는 거 봤어⁠?⁠”

“⁠아니⁠. 계단 중간에서 한참 서 있다가 내려가더라⁠. 숨소리가 그랬어⁠.⁠”

이겸은 칠 벗겨진 의자에 앉아 동규가 남긴 보리차 컵을 들여다보았다⁠. 컵 바닥에 보리차가 한 모금 남아 있었다⁠.

“⁠당신 백열두 살까지 혼자 갚아⁠.⁠”

“⁠알아⁠. 그게 내 몫이야⁠.⁠”

이겸이 남은 보리차를 마셨다⁠. 식은 보리차였다⁠. 이겸은 컵을 내려놓으며 얼굴을 찡그렸고⁠, 효란은 찡그린 얼굴을 보며 웃었다⁠.

*

시월 둘째 주⁠, 에버슬립 동관 1층 기상실에 아침 해가 길게 누웠다⁠. 효란은 문가에서 두 걸음 안에 서 있었다⁠. 이겸이 효란 옆에 지팡이 없이 서 있었다⁠. 지팡이는 지난달부터 집에 두고 다녔다⁠. 기상실 맨 뒤 벽에 회색 점퍼 차림의 동규가 붙어 서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바닥 가운데 네모난 뚜껑이 열리고 하얀 캡슐이 올라왔다⁠. 이음새마다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캡슐 옆에 상훈이 서 있었다⁠. 제일 좋은 작업복을 입고 왔다고 했는데 효란이 보기에는 늘 입던 작업복이었다⁠. 손에 대패를 쥐고 있었다⁠. 왜 대패를 들고 왔느냐고 이겸이 묻자 상훈은 손이 허전해서라고 했다⁠.

창가에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2019년 가을의 사진이었다⁠. 서른아홉의 상훈과 서른둘의 인화가 공방 앞에서 대팻밥을 뒤집어쓰고 웃고 있었다⁠.

뚜껑이 열렸다⁠. 찬 김이 피어올라 햇빛 속으로 흩어졌다⁠. 땋은 머리를 어깨로 넘긴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의사가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속눈썹이 떨렸다⁠. 인화가 눈을 떴다⁠. 흐린 눈이 천장을 헤매다가 캡슐 옆의 노인에게 닿았다⁠. 인화의 마른 입술이 열렸다⁠.

“⁠아버님⁠…⁠… 오셨어요⁠?⁠”

상훈의 얼굴이 굳었다⁠. 이겸이 효란의 손을 꽉 쥐었다⁠. 효란은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다른 손으로 막았다⁠. 상훈은 대패를 들어 인화의 눈앞에 내밀었다⁠.

“⁠남편이다⁠, 이 사람아⁠. 대패 소리 몰라⁠? 마흔 해 동안 매일 당겼는데⁠.⁠”

인화는 대패를 한참 보았다⁠. 흐린 눈이 대패 손잡이의 글씨를 더듬었다⁠. 공방 이름이었다⁠. 인화가 대패에서 노인의 손으로 눈을 옮겼다⁠. 마디마다 흉터가 있는 손이었다⁠. 인화의 손가락이 캡슐 가장자리를 넘어 상훈의 손등에 닿았다⁠. 둔한 손끝이 흉터 하나를 더듬었다⁠. 서른두 살 때도 있던 흉터였다⁠.

“⁠당신⁠, 손 또 다쳤네⁠.⁠”

상훈이 무릎을 꺾고 캡슐 옆에 주저앉았다⁠. 대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의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효란은 맨 뒤 벽을 보았다⁠. 동규가 벽에 등을 대고 서서⁠,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 있었다⁠.

오후 세 시⁠, 동규는 지하 3층 홀 한가운데에 섰다⁠. 가족들이 홀 가장자리를 둘러섰다⁠. 동규는 마이크 없이 이름 넷을 불렀다⁠. 둘은 효란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나는 진상훈이었고⁠, 마지막은 탁효란이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홀의 파란 불빛 사이로 목소리가 퍼졌다가 잦아들었다⁠. 회장이 축구공 사진을 가슴에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동규는 이름을 다 부르고 나서 가장 가까운 캡슐 옆 접이의자에 앉았다⁠. 누구의 캡슐인지 묻지 않았다⁠.

*

십이월 둘째 주 아침⁠, 이겸의 세 번째 주사가 있는 날이었다⁠. 부엌 창으로 겨울 해가 낮게 들어와 식탁 위에 네모나게 누웠다⁠. 효란은 새벽 다섯 시부터 식탁에 앉아 있었다⁠. 확대경을 이마에 올리고 핀셋을 쥐었다⁠. 식탁 위 천 위에 이겸의 손목시계가 뒷판이 열린 채 엎어져 있었다⁠.

마흔 해 동안 감지 않은 태엽은 굳어 있었다⁠. 효란은 굳은 기름을 하나씩 닦아 내고 새 기름을 바늘 끝으로 찍어 넣었다⁠. 평형 바퀴 축에 낀 먼지를 불어 냈다⁠. 핀셋 끝이 떨리지 않았다⁠. 마흔 해 동안 남의 시계를 고친 손이 마흔 해 만에 제 시계를 고쳤다⁠.

이겸이 작은 방에서 나와 부엌 문턱에 섰다⁠. 부스스한 머리였다⁠. 효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앉아⁠. 칠 벗겨진 데⁠.⁠”

이겸이 앉았다⁠. 효란은 뒷판을 닫았다⁠. 손바닥 아래 단단히 물리는 소리가 났다⁠. 효란은 시계를 식탁 가운데에 놓고 확대경을 이마 위로 밀어 올렸다⁠.

“⁠오늘 주사 맞으면 손끝 다 돌아온대⁠?⁠”

“⁠의사가 그러던데⁠. 봄쯤엔 지문도 돌아온대⁠.⁠”

“⁠그럼 봄에 은행 가서 계좌부터 열어⁠.⁠”

“⁠열면 제일 먼저 보리차 값부터 보낼게⁠. 원장님이 마신 거까지⁠.⁠”

효란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졌다⁠. 웃음이 가라앉자 효란이 핀셋을 내려놓았다⁠.

“⁠당신한테 할 말 있어⁠.⁠”

“⁠응⁠.⁠”

“⁠내가 먼저 가는 날 말이야⁠.⁠”

이겸이 효란을 보았다⁠. 효란은 이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날 기다리지 마⁠. 캡슐이 없어도 사람은 기다리면서 자⁠. 나는 마흔 해를 깨어서 잤어⁠. 당신은 그러지 마⁠. 그다음 날 가게 셔터 올리고⁠, 동수 아저씨 없으면 현주한테 굽 갈고⁠, 누가 손 내밀면 잡아⁠.⁠”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효란은 식탁 위에 왼손을 올렸다⁠. 오른손으로 반지를 쥐었다⁠.

“⁠이거 빼서 줄게⁠. 당신 반지도 이제 당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효란은 반지를 돌렸다⁠. 반지가 마디까지 올라왔다⁠. 겨울 아침이라 손가락이 부어 있었다⁠. 반지는 마디 앞에서 멈췄다⁠. 한 번 더 돌렸다⁠. 꿈쩍하지 않았다⁠. 효란은 반지를 노려보며 비누를 가지러 일어나려 했다⁠. 이겸이 효란의 손목을 잡았다⁠.

“⁠식용유 줄까⁠?⁠”

효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겸도 웃었다⁠. 웃음이 부엌을 채우고 벽시계 초침 소리를 덮었다⁠. 효란은 웃다가 가슴을 눌렀고⁠, 이겸이 웃음을 멈추고 효란의 등을 쓸었다⁠. 효란의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겸의 손바닥이 효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 빠지네⁠.⁠”

“⁠나도 안 빼⁠. 당신 가고 나서 빼고 싶어지면⁠, 그때 내가 정할게⁠. 서로 대신 정하지 말자며⁠.⁠”

효란은 반지를 도로 마디 밑으로 내렸다⁠. 반지가 마흔 해 동안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효란은 식탁 가운데의 시계를 집어 이겸에게 내밀었다⁠.

“⁠감아⁠. 당신이⁠.⁠”

이겸은 시계를 받아 들었다⁠. 용두를 손끝으로 쥐었다⁠. 손끝이 용두의 가는 톱니를 하나씩 알았다⁠. 이겸은 용두를 천천히 돌렸다⁠. 태엽이 감기는 소리가 났다⁠. 몇 바퀴 돌리자 시계 속에서 평형 바퀴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침이 아홉 시 사십일 분에서 떨어져 나와 한 칸 움직였다⁠. 또 한 칸 움직였다⁠.

이겸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효란이 손을 뻗어 이겸 손의 용두를 당겼다⁠. 둘이 같이 바늘을 돌려 지금 시각에 맞췄다⁠. 일곱 시 이십삼 분이었다⁠. 벽시계보다 이 초 빨랐다⁠. 효란은 고치지 않았다⁠.

이겸이 시계를 왼손목에 찼다⁠. 효란이 가죽 줄 구멍을 하나 당겨 채워 주었다⁠. 서른 살의 손목은 마흔 해 전보다 가늘었다⁠. 이겸은 왼손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고⁠, 효란은 왼손을 이겸의 손 옆에 놓았다⁠. 낮은 겨울 해가 식탁 위의 손 둘을 비췄다⁠. 주름진 손과 창백한 손이었다⁠. 약지마다 같은 금반지가 있었고⁠, 이겸의 손목에서 초침이 한 칸씩 갔다⁠. 식탁 위 보리차 두 잔에서 김이 올라와 볕 속에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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