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9자)

총회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이겸은 칠월 초하루 아침에 지하 3층 홀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몇 층 가시냐고 물었고⁠, 이겸은 지하 3층이라고 대답했다⁠. 엘리베이터는 외래 환자는 지하 3층에 가실 수 없다고 했다⁠. 이겸이 면회라고 하자 엘리베이터는 한참 생각하더니 노래를 틀고 내려갔다⁠. 이겸은 퇴원한 지 스무 날째였고⁠, 두 번째 주사를 맞은 손끝은 이제 엘리베이터 단추의 오톨도톨한 점자를 하나하나 셀 수 있었다⁠.

홀은 여전히 물속처럼 푸르스름했다⁠. 상훈은 접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대패 대신 작은 탁상 달력을 올려놓고 있었다⁠. 칠월 장 첫 칸에 붉은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상훈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위에 줄을 긋고 있었다⁠. 한 번 긋고⁠, 또 한 번 그었다⁠. 줄이 겹쳐서 동그라미가 검게 뭉개졌다⁠.

“⁠아저씨⁠.⁠”

상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주 놈이 오늘 아침에 전화했어⁠. 할머니 생일 축하한다고⁠. 케이크 사 간다고⁠.⁠”

이겸은 상훈 옆 빈 의자에 앉았다⁠. 캡슐 유리 안에서 윤인화가 땋은 머리를 어깨로 넘긴 채 자고 있었다⁠. 서른두 살 얼굴이었다⁠. 옆면 화면의 글자 맨 아래 줄이 바뀌어 있었다⁠. 「⁠기상 예정 · 미정⁠」⁠.

“⁠죄송해요⁠.⁠”

“⁠너한테 듣자고 한 말 아니야⁠.⁠” 상훈은 볼펜을 달력 위에 내려놓았다⁠. “⁠네 아내가 법원 앞에서 하는 말⁠, 나도 봤어⁠. 맞는 말이더라⁠. 하나도 안 틀렸어⁠. 그래서 더 화가 나⁠.⁠”

상훈은 달력을 덮었다⁠. 손바닥으로 캡슐 유리를 한 번 쓸었다⁠. 김이 하얗게 남았다가 사라졌다⁠.

“⁠오늘 저녁에 총회 있다⁠. 와라⁠. 가서 사람들이 너희를 뭐라고 하는지 들어⁠. 나도 들으러 간다⁠.⁠”

*

오후에 이겸은 탁 시계방 작업대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퇴원한 다음 주부터 현주 밑에서 일을 배웠다⁠. 일당은 현주가 정했다⁠. 첫날 현주는 일당을 말해 놓고 너무 적다며 스스로 미안해했고⁠, 이겸은 너무 많다며 미안해했다⁠. 둘이 서로 미안해하는 사이 효란이 위층에서 내려와 두 사람 말의 한가운데로 정해 주었다⁠.

“⁠견습생 서이겸 씨⁠, 뒷판 몇 개 땄어요⁠?⁠”

“⁠여덟 개요⁠, 사장님⁠.⁠”

“⁠사장님이라고 하지 마요⁠. 소름 돋아요⁠. 현주 씨라고 해요⁠.⁠”

“⁠현주 씨⁠, 오늘 일당 나와요⁠?⁠”

“⁠나와요⁠. 근데 긁은 뒷판 두 개는 빼요⁠.⁠”

이겸은 손목 화면에 청구서를 띄워 놓고 오늘 일당을 빼 보았다⁠. 동그라미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맨 끝자리 숫자만 조금 바뀌었다⁠. 이겸은 맨 끝자리를 손끝으로 짚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현주가 어깨 너머로 보다가 혀를 찼다⁠.

“⁠그거 다 갚으려면 몇 년 걸려요⁠?⁠”

“⁠계산해 봤는데요⁠. 백열두 살이요⁠.⁠”

“⁠그럼 사장님⁠, 아니 효란 할머님보다 오래 사셔야겠네요⁠.⁠”

말해 놓고 현주가 입을 막았다⁠. 이겸은 웃었다⁠. 웃으면서 위층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효란이 계단 중간에 앉아 약 상자를 열고 있었다⁠. 저녁 약을 미리 꺼내는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겸은 뒷판 따는 칼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었다⁠. 아홉 번째 뒷판이 딸깍 열렸다⁠.

*

본관 강당은 기자회견 날보다 더 꽉 찼다⁠. 지하 3층에 가족을 재운 집마다 한 사람씩만 와도 강당이 모자랐다⁠. 통로 계단에도 사람들이 앉았다⁠. 맨 앞줄 탁자에 가족회 회장이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 축구공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무대 위에는 의자 하나와 마이크 하나만 있었다⁠.

이겸은 효란과 함께 맨 뒤 벽에 붙어 섰다⁠. 이번에는 둘 다 모자를 쓰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보았다⁠. 돌아본 얼굴들이 오래 머물렀다⁠. 효란은 이겸의 손을 잡지 않고 제 왼손을 카디건 밖에 내놓았다⁠.

강당 중간쯤에서 낯익은 뒤통수 다섯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순혜와 떡집 할매와 「⁠낙원동 할매회⁠」였다⁠. 입구에서 가족 확인을 하던 가족회 사람이 순혜에게 어느 캡슐 가족이냐고 물었고⁠, 순혜가 탁효란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이겸은 들었다⁠. 가족회 사람이 탁효란 님은 캡슐에 안 계신다고 하자 순혜는 그러니까 가족이 직접 왔다고 했다⁠. 가족회 사람은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냥 들여보냈다⁠. 떡집 할매가 무릎 위에서 떡 상자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동규가 무대에 올랐다⁠. 흰 가운을 벗고 짙은 양복을 입었다⁠. 강당이 한 번에 조용해졌다⁠. 동규는 의자에 앉지 않고 마이크 앞에 섰다⁠.

“⁠에버슬립 원장 마동규입니다⁠. 오늘은 숫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다음에 제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규는 투자사 세 곳의 이름을 대지 않고 숫자만 말했다⁠. 치료제 한 번이 집 한 채라는 것⁠, 지하 3층의 치료제 값을 병원이 먼저 내 왔다는 것⁠, 세 곳이 빠지면서 다음 기상에 들어갈 돈이 끊겼다는 것⁠. 동규는 숫자를 하나 말할 때마다 잠깐씩 쉬었다⁠. 쉬는 사이마다 강당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제 이름입니다⁠. 2020년 8월 9일 밤⁠, 지하 수면실의 캡슐 넷을 끈 당직 기술자는 저였습니다⁠. 스물여섯이었습니다⁠. 넷을 꺼야 스물이 아침까지 버텼습니다⁠. 그 계산은 지금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밤을 사십 년 동안 기계 고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 덕분에 이 병원이 문을 닫지 않았고⁠, 그 말 때문에 지금 이 병원이 멈췄습니다⁠.⁠”

강당이 술렁였다⁠. 동규는 술렁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제가 덮지 않았으면 여러분 가족 가운데 상당수는 이 병원에 오지 못하셨을 겁니다⁠. 이 병원은 2020년 가을에 문을 닫았을 테니까요⁠. 제가 덮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여기 계십니다⁠. 그 말을 드리려고 나왔습니다⁠. 용서를 빌러 나온 게 아닙니다⁠.⁠”

맨 앞줄에서 회장이 일어났다⁠. 회장은 마이크를 받지 않고 앉았던 자리에서 소리쳤다⁠.

“⁠원장님이 덮어 준 덕에 우리 애가 열아홉 해를 잤어요⁠. 그건 알아요⁠. 원장님한테는 화 안 냅니다⁠.⁠” 회장이 몸을 돌려 강당 맨 뒤를 보았다⁠. “⁠화가 나는 건 저 사람들이에요⁠. 마흔 해 동안 돈 받고 가만있다가⁠, 남편 깨고 나니까 이제 와서 말해서⁠, 우리 애들 차례를 다 멈췄잖아요⁠.⁠”

강당의 얼굴들이 한꺼번에 맨 뒤로 돌아갔다⁠. 수백 개의 눈이 이겸과 효란에게 닿았다⁠. 효란의 왼손이 카디건 자락을 쥐었다⁠. 이겸은 효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말할 기회 주세요⁠.⁠”

동규가 무대 위에서 이겸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마이크를 들어 보였다⁠. 이겸은 통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마다 사람들이 무릎을 비켜 주었고⁠, 비켜 주는 무릎마다 차가웠다⁠. 중간쯤에서 누군가 종이컵을 던졌다⁠. 컵이 이겸의 어깨에 맞고 바닥에 굴렀다⁠. 보리차가 하늘색 셔츠에 번졌다⁠. 순혜가 벌떡 일어났고 떡집 할매가 순혜의 허리띠를 붙잡아 앉혔다⁠.

이겸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받았다⁠. 손끝이 아직 완전하지 않아 두 손으로 감쌌다⁠.

“⁠저는 그 스물 가운데 하나였어요⁠. 제 아내는 그 넷 가운데 하나였고요⁠.⁠”

강당이 조용해졌다⁠.

“⁠여러분 가족도 그 밤에 지하에 계셨으면 스물이었을 수도 있고 넷이었을 수도 있어요⁠. 원장님 계산이 맞아요⁠. 저도 살았으니까 맞다고 해야죠⁠. 그런데 그 계산이 맞으려면 넷이 입을 다물어야 했어요⁠. 마흔 해 동안이요⁠. 원장님이 덮어 준 게 아니라⁠, 넷이 덮어 준 거예요⁠. 제 아내랑⁠,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진상훈 아저씨랑⁠, 돌아가신 두 분이요⁠.⁠”

회장이 무언가 소리치려 했다⁠. 동규가 무대 위에서 이겸에게 다가와 마이크 앞에 같이 섰다⁠. 두 사람이 한 마이크를 사이에 두었다⁠.

“⁠서이겸 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분들께 필요한 건 다음 날짜입니다⁠. 진실로는 치료제를 살 수 없습니다⁠.⁠”

“⁠거짓말로는 살 수 있었어요⁠?⁠”

“⁠사십 년 동안은 살 수 있었습니다⁠.⁠”

동규의 목소리는 끝까지 낮았다⁠. 이겸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동규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강당의 침묵으로 들렸다⁠.

*

강당 중간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상훈이 일어서 있었다⁠. 등이 굽어서 일어서도 앉은 사람들과 키가 비슷했다⁠. 손에 탁상 달력을 쥐고 있었다⁠. 상훈은 마이크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목수가 공방에서 제자에게 소리치던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진상훈이야⁠. 지하 3층 윤인화 남편⁠. 오늘 깨기로 했던 사람⁠.⁠”

강당의 얼굴들이 상훈에게 돌아갔다⁠.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2020년 그 밤에 나도 깼어⁠. 넷 가운데 하나야⁠. 복도에서 손전등 든 젊은 놈이 스위치 내리는 거 내 눈으로 봤어⁠. 저기 저 원장⁠. 나도 위로금 받았어⁠. 그 돈으로 공방 차렸어⁠. 마흔 해 동안 입 다물었어⁠. 왜냐면 집사람 날짜가 밀릴까 봐⁠. 너희랑 똑같은 이유로⁠.⁠”

상훈은 달력을 들어 보였다⁠. 칠월 첫 칸의 검게 뭉개진 동그라미가 강당 조명 아래 보였다⁠.

“⁠오늘이 그 날짜였어⁠. 저 젊은 놈 아내가 법원 앞에서 말하는 바람에 날아갔어⁠. 나도 화가 나⁠. 아침에 동그라미에 줄 그으면서 저 여편네 욕 많이 했어⁠.⁠” 상훈은 효란이 있는 맨 뒤 벽을 한 번 보았다⁠. “⁠그래도 마흔 해 동안 우리 넷을 고장으로 불러 놓고 너희 차례를 지킨 거야⁠. 우리가 고장이었어⁠. 이제 그만 고장이라고 불러⁠. 나 오늘 날짜는 잃었어도 그 말은 안 듣고 죽을 거야⁠.⁠”

상훈은 자리에 앉았다⁠. 달력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덮었다⁠. 강당은 오래 조용했다⁠. 맨 앞줄의 회장이 축구공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박수를 쳤다가 멈췄다⁠.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쳤다⁠. 박수는 반쯤만 이어지다 흩어졌다⁠. 강당의 절반은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였다⁠.

이겸은 무대 위에서 맨 뒤 벽을 보았다⁠. 효란이 벽에서 등을 떼고 서 있었다⁠. 효란은 강당 중간의 상훈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일흔 살의 허리가 천천히 내려갔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상훈은 효란을 돌아보지 않았다⁠. 달력을 덮은 두 손 가운데 엄지 하나만 달력 모서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목수가 잘 맞은 이음새를 손끝으로 두드려 보는 손짓이었다⁠.

*

무대 뒤 통로는 좁고 어두웠다⁠. 이겸은 보리차에 젖은 셔츠를 손바닥으로 털며 벽에 기댔다⁠. 다리가 떨렸다⁠. 셔츠 어깨의 얼룩은 털수록 넓어졌다⁠. 효란이 사 준 셔츠였고⁠, 보리차는 병원 보리차였다⁠. 공짜라던 보리차에 새 셔츠 한 벌이 날아갔다⁠. 동규가 뒤따라 들어와 통로 끝 비상등 아래에 섰다⁠. 양복 깃이 비상등 빛에 초록으로 물들었다⁠.

“⁠진상훈 님이 일어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요⁠.⁠”

“⁠저 박수가 내일 투자를 데려오지는 않습니다⁠.⁠”

“⁠알아요⁠.⁠”

동규는 손목 화면을 켜서 이겸에게 보였다⁠. 「⁠의료위원회 · 다음 기상 일정 · 무기한 보류⁠」⁠. 위원회 이름 아래에 위원들의 이름이 나란히 있었고⁠, 맨 위가 동규였다⁠.

“⁠제 손으로 올렸습니다⁠. 돈이 없는 날짜를 가족들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날짜를 드렸다가 또 지우는 건⁠, 오늘 진상훈 님 같은 분을 삼천 번 만드는 일입니다⁠.⁠”

동규는 화면을 끄고 통로 벽에 등을 댔다⁠. 예순여섯의 원장이 처음으로 지친 얼굴을 그대로 내보였다⁠. 비상등 빛 아래에서 동규의 하얀 머리가 초록빛으로 보였다⁠.

“⁠서이겸 님⁠. 이제 아무도 안 깨어납니다⁠.⁠”

이겸은 벽에서 등을 뗐다⁠. 동규가 이겸을 똑바로 보았다⁠.

“⁠당신이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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