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57자)

간판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효란은 수도를 잠그지 않은 채 싱크대에 등을 기댔다⁠. 이겸의 손에 하얀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 수돗물 소리가 부엌을 채웠고⁠, 위층 창밖으로 골목의 가로등이 켜졌다⁠. 효란은 손을 뻗어 수도를 잠갔다⁠. 물이 멎자 벽시계 초침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언제부터야⁠.⁠”

“⁠세 해 됐어⁠.⁠”

“⁠왜 말 안 했어⁠.⁠”

“⁠당신도 말 안 했잖아⁠. 첫 주에 알아본 거⁠.⁠”

“⁠그거랑 이거랑 같아⁠?⁠”

“⁠같아⁠. 둘 다 상대가 도망갈까 봐 안 한 거야⁠.⁠”

이겸은 약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칠 벗겨진 의자의 등받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효란의 눈에도 보였다⁠.

“⁠얼마나 가는 병이야⁠.⁠”

“⁠죽는 병 아니야⁠. 오래 가는 병이야⁠.⁠”

“⁠얼마나 오래⁠.⁠”

“⁠의사가 시계처럼 말을 안 해 줘⁠. 몇 해라고만 해⁠. 몇 해가 세 해일 수도 있고 열 해일 수도 있대⁠. 약 잘 먹고 계단 조심하고 화 덜 내면 길어진대⁠.⁠”

“⁠화 덜 내⁠.⁠”

“⁠당신이 화나게 하잖아⁠.⁠”

이겸이 웃으려다 말았다⁠. 의자 등받이를 놓고 효란 앞으로 걸어왔다⁠. 지팡이 없이 세 걸음이었다⁠. 세 번째 걸음에서 무릎이 휘청했고⁠, 효란이 이겸의 팔꿈치를 받았다⁠. 이겸은 받친 팔로 효란을 끌어안았다⁠. 효란의 이마가 이겸의 쇄골에 닿았다⁠. 환자복이 아니라 효란이 사 온 면 티셔츠였다⁠. 새 옷 냄새 아래에서 이겸의 냄새가 났다⁠. 마흔 해 전과 같은 냄새였다⁠.

“⁠당신은 맨날 먼저 짐 싸⁠.⁠”

이겸이 효란의 정수리에 대고 말했다⁠. 효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깨기 전에 이혼 서류 받아 놓고⁠, 나 깨니까 엄 여사 하고⁠, 지금은 약 숨기고⁠. 맨날 당신이 먼저 나가려고 해⁠. 나 아직 문 안에 있는데⁠.⁠”

효란은 이겸의 티셔츠 앞자락을 쥐었다⁠. 쥔 손이 떨렸다⁠. 떨림이 이겸의 가슴으로 옮겨 갔다⁠.

밤이 깊어 효란은 작은 방에 깔아 둔 새 이불을 걷어 큰 방으로 가져왔다⁠. 두 이불을 나란히 깔고 불을 껐다⁠. 창으로 가로등 불빛이 들어와 천장에 네모를 그렸다⁠. 이겸이 이불 밑으로 손을 뻗어 효란의 손을 찾았다⁠. 손끝이 효란의 손등을 지나 손목 안쪽에서 멈췄다⁠. 맥박 뛰는 자리였다⁠.

“⁠느려⁠.⁠”

“⁠일흔이니까⁠.⁠”

“⁠가끔 건너뛰어⁠.⁠”

“⁠심부전이니까⁠.⁠”

이겸이 손목을 놓지 않고 효란 쪽으로 돌아누웠다⁠. 효란도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서른 살의 숨과 일흔 살의 숨이 한 뼘 거리에서 엇갈렸다⁠. 이겸의 숨이 빨랐고 효란의 숨이 길었다⁠. 효란은 이겸의 손바닥을 끌어다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카디건 없이 얇은 잠옷 위였다⁠. 이겸의 손바닥 아래에서 효란의 심장이 느리게⁠, 가끔 한 박씩 쉬어 가며 뛰었다⁠. 이겸은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효란은 이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두 반지가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쳐 작은 소리를 냈다⁠. 마흔 해 만이었다⁠.

*

일주일 뒤 아침⁠, 효란은 현주를 작업대 앞에 앉혔다⁠. 현주는 효란이 내민 종이를 두 번 읽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사장님⁠, 이거 장난이에요⁠?⁠”

“⁠가게 팔 거야⁠. 너한테⁠.⁠”

“⁠저 돈 없어요⁠.⁠”

“⁠청년 창업 대출이 있잖아⁠. 태민이가 알아봤어⁠. 너희 엄마가 보태 준다는 것도 들었어⁠. 모자라는 건 나눠서 내⁠. 이자는 안 받아⁠.⁠”

현주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손에 든 핀셋을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사 년 동안 한 번도 핀셋을 먼저 내려놓은 적이 없는 손이었다⁠.

“⁠왜 저예요⁠? 부동산에 내놓으면 더 받으실 텐데⁠.⁠”

“⁠부동산에 내놓으면 여기 커피집 돼⁠. 시계 골목에 시계방이 둘 남았어⁠. 하나가 커피집 되면 하나 남아⁠.⁠”

“⁠저 사장님처럼 못 해요⁠. 뒷판도 아직 두 번에 한 번은 긁어요⁠.⁠”

“⁠나는 첫해에 세 번에 두 번 긁었어⁠.⁠”

현주가 울음을 터뜨렸다⁠. 효란은 현주의 등을 두드리지 않고 작업대 서랍에서 제일 오래된 핀셋을 꺼내 현주 앞에 놓았다⁠. 서른한 살에 시계 골목의 늙은 기술자에게 받은 핀셋이었다⁠. 끝이 조금 휘어 있었다⁠.

“⁠이거 끝 휜 거 고치지 마⁠. 휘어서 잘 집혀⁠.⁠”

계단 위에서 이겸이 내려왔다⁠. 난간을 잡고 한 칸씩 내려와 마지막 칸에 앉았다⁠. 다 듣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현주가 눈물을 닦으며 자리를 피해 가게 뒷문으로 나갔다⁠.

“⁠가게 팔지 말랬잖아⁠.⁠”

“⁠서로 대신 갚지 말자며⁠. 이건 내 빚이야⁠.⁠”

“⁠그 빚⁠, 원장 빚이야⁠.⁠”

“⁠원장 빚이어도 돈은 내가 받았어⁠. 내 손으로 받았으니까 내 손으로 돌려줘⁠.⁠”

이겸은 계단에 앉아 효란을 올려다보았다⁠. 효란은 작업대 앞에 서서 이겸을 내려다보았다⁠. 마흔 해 전 신혼집에서도 둘은 이런 자리에서 싸웠다⁠. 이겸이 현관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고 있으면 효란이 부엌 문턱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누가 설거지를 하느냐로 싸웠다⁠.

“⁠당신 마흔 해가 여기 다 있잖아⁠. 벽에⁠.⁠”

“⁠벽은 떼 가면 돼⁠. 사진은 내 거야⁠.⁠”

효란은 벽의 사진 하나를 떼어 이겸에게 내밀었다⁠. 서른한 살의 효란이 핀셋을 쥐고 찡그린 사진이었다⁠. 이겸이 사진을 받아 들고 오래 보았다⁠.

“⁠이때 무슨 생각 했어⁠?⁠”

“⁠핀셋이 너무 작다고⁠. 당신 손가락처럼 굳으면 어쩌나 하고⁠.⁠”

이겸은 사진을 무릎 위에 엎어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리지 않았다⁠.

*

마지막 영업일은 토요일이었다⁠. 아침부터 골목에 사람이 줄을 섰다⁠. 마흔 해 단골들이 저마다 멈춘 시계를 하나씩 들고 왔다⁠. 고칠 시계가 없는 사람은 서랍에서 멀쩡한 시계를 꺼내 들고 왔다⁠. 효란은 시계를 하나씩 받아 귀에 대 보고⁠, 멀쩡한 시계에는 멀쩡하다고 말해 주었다⁠. 손님들은 멀쩡하다는 말을 듣고도 돈을 놓고 갔다⁠.

「⁠낙원동 할매회⁠」는 미용실을 닫고 통째로 왔다⁠. 순혜는 떡집 할매와 함께 가게 앞에 접이 탁자를 펴고 떡을 돌렸다⁠. 떡집 할매가 지난번 법원에 들고 갔던 팻말을 다시 꺼냈다⁠. 「⁠탁효란 힘내라⁠」 아래에 매직으로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현주도 힘내라⁠」⁠. 현주가 팻말을 보고 또 울었다⁠.

동수는 부스 문을 닫고 시계방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님이 하나 나갈 때마다 손님의 구두 굽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굽 갈아요⁠.⁠” “⁠굽 갈아요⁠.⁠” 열 번째 손님이 동수 부스 앞에 줄을 섰다⁠. 동수는 투덜거리며 부스 문을 다시 열었다⁠.

이겸은 작업대 끝에 앉아 손님들의 시계 뒷판을 땄다⁠. 효란이 시계를 넘기면 이겸이 뒷판을 열어 효란 앞에 놓았다⁠. 손님 하나가 이겸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으려 했다⁠. 순혜가 떡을 손님 입에 밀어 넣어 막았다⁠.

오후 세 시에는 은희가 왔다⁠. 손에 작은 상자를 들었고⁠, 뒤에 열 살쯤 된 손녀가 따라왔다⁠. 은희는 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효란이 손짓해도 앞으로 오지 않았다⁠. 차례가 되자 은희는 상자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상자 안에 남자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이겸과 은희의 아버지 시계였다⁠. 2046년에 어머니가 이 가게에 들고 왔던 시계였다⁠.

“⁠엄마가 이거 차고 돌아가셨어요⁠. 이 년 전부터 또 서요⁠.⁠”

효란은 시계를 귀에 대 보았다⁠. 태엽 소리가 약했다⁠. 뒷판을 따고 들여다보았다⁠. 열네 해 전 제 손으로 갈아 끼운 부품이 그대로 있었다⁠.

“⁠기름이 말랐네⁠. 십 분이면 돼⁠.⁠”

효란이 기름을 치는 동안 은희는 작업대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녀가 이겸 옆에 붙어 앉아 이겸의 부스스한 머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겸이 손녀에게 나는 너희 할머니의 오빠라고 말하자 손녀가 거짓말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오빠가 왜 우리 삼촌보다 어리냐고 했다⁠. 이겸은 대답을 못 하고 웃었다⁠.

시계가 다시 갔다⁠. 효란은 뒷판을 닫아 은희에게 건넸다⁠. 은희가 지갑을 꺼냈다⁠. 효란이 손을 저었다⁠. 은희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작업대 위에 놓았다⁠. 열네 해 전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였다⁠.

“⁠언니⁠. 고생이 많아요⁠.⁠”

은희는 한마디만 남기고 손녀의 손을 잡아 나갔다⁠. 문 앞에서 손녀가 돌아보며 이겸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이겸도 혀를 내밀었다⁠. 효란은 만 원짜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저녁 여섯 시⁠, 마지막 손님이 나갔다⁠. 효란은 작업대 한가운데 유리 덮개를 두 손으로 들었다⁠. 마흔 해 동안 한 번도 들지 않은 덮개였다⁠. 현주가 숨을 멈췄다⁠. 효란은 덮개 안의 아홉 시 사십일 분을 꺼내 손수건에 쌌다⁠. 시계는 손바닥 위에서 가벼웠다⁠.

“⁠이건 안 팔아⁠.⁠”

“⁠당연하죠⁠.⁠”

해 질 녘에 간판 칠하는 사람이 사다리를 들고 왔다⁠. 현주가 사다리 밑에서 손을 저었다⁠.

“⁠이름은 안 바꿀 거예요⁠. 탁 시계방 그대로요⁠. 이름 바꾸면 손님들이 못 찾아요⁠. 그 밑에 작게 한 줄만 넣어 주세요⁠.⁠”

칠하는 사람이 붓을 들었다⁠. 반쯤 벗겨진 「⁠탁 시계방⁠」 금색 글씨 아래에 작은 글씨가 새로 생겼다⁠. 「⁠사장 바뀜⁠. 솜씨 안 바뀜(⁠노력 중⁠)⁠」⁠. 골목의 할머니들이 다 같이 웃었다⁠. 효란도 웃었다⁠. 웃다가 계단 난간을 잡았다⁠. 이겸이 효란의 허리에 손을 댔다⁠.

*

월요일 아침⁠, 효란은 가정법원 앞 계단에 섰다⁠. 태민이 곁에 있었다⁠. 위로금은 마흔 해 이자까지 쳐서 법원에 맡겼다⁠. 태민이 손목 화면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 아래에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취재 드론 여남은 대가 머리 위에서 윙윙거렸다⁠. 효란은 드론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카디건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 계단 난간 위에 올려 두었다⁠. 반지가 아침볕을 받았다⁠.

효란은 법원에 낸 진술을 기자들 앞에서 그대로 말했다⁠. 마흔 해 전 물난리 밤에 지하의 캡슐 넷이 사람 손으로 꺼졌고⁠, 넷 가운데 하나가 제 캡슐이었다고 했다⁠. 깨어난 지 이틀 만에 고장이라는 말에 서명했고⁠, 서명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시계방 보증금을 냈다고 했다⁠. 효란은 동규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당직 기술자라고만 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저는 마흔 해 동안 돈을 받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오늘 돈을 돌려드리고 입을 엽니다⁠. 다른 가족분들께 마흔 해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기자들이 한꺼번에 질문을 던졌다⁠. 태민이 효란의 팔을 잡아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끝에 동규가 서 있었다⁠. 회색 점퍼를 입었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기자들이 동규를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동규는 기자들을 손바닥으로 막고 효란에게 다가왔다⁠.

“⁠제 이름은 왜 빼셨습니까⁠?⁠”

“⁠원장님 이름은 원장님 입으로 말하세요⁠.⁠”

동규는 한동안 효란을 보았다⁠. 동규의 눈 밑이 검었다⁠. 며칠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여사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런데 여사님이 지금 무엇을 하셨는지도 아셔야 합니다⁠.⁠”

동규의 손목 화면이 떨렸다⁠. 기자들의 손목 화면도 한꺼번에 떨렸다⁠. 계단 위아래에서 알림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동규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이미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태민이 제 화면을 효란 앞에 들어 보였다⁠.

「⁠에버슬립 투자사 세 곳 투자 철회 … 에버슬립⁠, 다음 기상 일정 전부 중단 발표⁠」

화면 아래로 가족회 회장의 얼굴이 작게 떴다⁠. 회장은 병원 정문 앞에서 축구공 사진을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자막이 지나갔다⁠. 「⁠수면자 가족회 “⁠한 사람의 진술이 삼천 명의 차례를 멈췄다⁠”⁠」⁠.

효란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동규가 아직 거기 서 있었다⁠.

“⁠칠월 초하루도 멈췄습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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