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39자) · 조금이라는 말
진술
누가 보냈는지 아는 사람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월요일 아침 아홉 시, 율천경찰서 형사과 앞 복도 의자에 예린과 나란히 앉았다. 예린의 남편은 그 시각 세종행 기차 안에 있었다. 예린은 아침에 역까지 배웅하고 왔다고 했다. 둘째를 안고. 첫째는 아빠한테 편지를 써서 주머니에 넣어 줬다고. 우체부 친구한테 부탁하면 매일 보낼 수 있다고 했다고.
“너한테 부탁할 거래. 편지.”
“보내 줄게. 매일.”
“너 직위해제잖아.”
“창구에 못 설 뿐이야. 우표는 붙일 수 있어.”
예린이 웃었다. 입술을 말아 넣지 않고.
우리를 맞은 형사는 사십 대 여자였다. 오지선 경위. 강력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나와서 우리 이름을 부르고, 한 사람씩 얼굴을 봤다. 내 얼굴에서 조금 오래 멈췄다.
“하윤 씨. 2014년 2월 17일. 율천교.”
“네.”
“저 그때 순경이었어요. 율천 지구대. 그 사건 첫날 다리 위 할아버지가 수첩 들고 찾아왔을 때, 받아 적은 게 저예요.”
나는 그 얼굴을 봤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경찰서에는 얼굴이 많았다. 형광등 아래 전부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 선배가 그랬어요. 목격자 셋이 일치하는데 늙은이 수첩을 왜 붙이냐고. 빼라고. 저는 안 뺐어요. 대신 복사해서 기록 맨 뒤에 붙였어요. 아무도 안 보는 자리에. 그게 제가 한 전부예요. 십이 년 동안 그 자리에서 안 움직였어요.”
오 경위는 서류철을 폈다. 맨 뒷장. 흐릿한 복사본. 손바닥만 한 수첩 한 쪽. 2014.02.17 · 3 / 0. 그 아래 작은 글씨. 23:14, 23:40.
강 노인의 셈은 뺏기지 않았다. 십이 년 전 젊은 순경이 복사기에 한 번 올려놓은 덕분에.
진술실은 작았다. 창이 없었다. 탁자 위에 녹음기가 놓였다. 오 경위가 예린의 휴대폰을 받아 들고, 충전기를 꽂고, 파일을 증거 복제 장비로 옮기는 동안 나는 탁자 모서리를 봤다. 합판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다. 십이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여기 손을 얹었을 것이다.
“하윤 씨. 먼저 말씀드릴게요. 2014년에 하신 진술을 지금 고치시면, 그때 진술이 허위였다는 걸 인정하시는 겁니다. 그 부분은 따로 입건될 수 있어요. 공무원 신분에도 영향이 있을 거고요.”
“알아요.”
“그리고 살인죄는 2015년 법 개정으로 공소시효가 없어졌습니다. 개정 당시 시효가 남아 있던 사건에도 적용돼요. 이 사건이 거기 해당합니다. 과실이었다면 이미 끝났어요. 과실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줄 수 있으면, 열립니다.”
“열어 주세요.”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 순서대로. 동기 모임 뒤풀이. 노래방. 진우가 노래를 정말 못했다는 것. 예린이 놀리려고 녹음을 켰다는 것. 둔치. 자갈. 교각 아래 주황 가로등. 석진 선배와 진우의 언성. 종이. 두 손으로 민 것. 물소리. 그리고 이십육 분.
이십육 분을 말하는 데 이십 분쯤 걸렸다. 나는 그 시간을 한 번도 순서대로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말하면서 알았다. 순서대로 말하면 조각이 아니게 된다. 조각이 아니게 되면 내가 그 안에 서 있는 게 보인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112를 눌렀다가 지웠다가, 석진 선배의 말을 세 번 따라 한 나. 나는 그 사람을 빼지 않고 말했다.
“지금 말씀하신 걸 진술서로 쓰시겠어요. 직접.”
오 경위가 종이와 볼펜을 밀어 주었다. 나는 볼펜을 쥐었다. 십이 년 전 내 진술서 글씨가 떠올랐다. 조금 떨어져 있었다. 조금 뒤에 소리가 났다. 조금을 두 번 쓴 스물여섯 살.
나는 썼다. 조금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몇 미터였는지 모르면 모른다고 썼다. 몇 분이었는지 알면 숫자로 썼다. 23시 14분. 23시 40분. 이십육 분. 마지막 장 아래에 이름을 적고 서명했다. 서명하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떨려야 할 것 같은데 안 떨렸다. 떨리는 건 서명하기 전까지였다.
진술실을 나오자 복도가 소란했다. 형사과 입구에 석진 선배가 서 있었다. 변호사 둘과 도형준을 데리고. 양복 차림이었다.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있었다. 현수막 속 사람처럼 소매를 걷지는 않았다.
“하윤아. 예린아.”
그는 웃었다.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여기서 뭐 해. 아침부터. 나한테 말하지.”
변호사 하나가 오 경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권석진 후보님이 참고인으로 자진 출석하셨습니다. 허위 제보에 대한 입장을 밝히시려고요.」 오 경위는 명함을 받지 않았다. 「참고인 아니시고요. 오늘 오후에 피의자로 부를 예정이었는데, 먼저 오셨네요. 편하게 됐습니다.」
석진 선배의 웃음이 조금 흔들렸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을 나는 봤다. 십이 년 만에 처음 본 흔들림이었다.
그는 예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예린아. 남편 오늘 세종 내려갔지. 거기 숙소 좋아. 내가 신경 써 뒀어. 애들 주말마다 보러 가게 기차표도 회사에서 대 줄 거야. 너 지금 무슨 말 했는지 모르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예린은 둘째를 안았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기가 없는 빈 팔이었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맡기고 왔다.
“선배. 그날 노래방에서 진우 노래 녹음한 거 기억나? 선배가 그거 지우라고 했잖아. 창피하다고. 나 안 지웠어. 까먹었어. 십이 년 동안.”
석진 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다 사라졌다.
“그 파일 한 시간 십이 분이야. 선배 목소리도 들어 있어. 놔, 진우야. 종이 놔. 놓으면 잡아 줄게.”
변호사 하나가 석진 선배의 팔을 잡았다. 석진 선배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봤다.
“하윤아. 너 이거 끝나면 파면이야. 알지.”
“네.”
“그럼 왜.”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오래 준비하지 않았다.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십이 년 전 둔치에서 그가 우리에게 가르친 말이 있었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됐다.
“선배. 따라 해 보세요. 우리는 다 봤어. 진우는 혼자 미끄러지지 않았어. 우리는 이십육 분 동안 아무도 안 들어갔어.”
석진 선배는 따라 하지 않았다. 오 경위가 그의 앞으로 나섰다. 도형준이 한 발 물러섰다. 그 한 발을 나는 셌다.
점심 무렵 경찰서 뒤 계단참에서 도형준을 다시 만났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보고 담배를 비벼 껐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수첩. 표지가 닳았고, 모서리에 흙이 묻어 있었다.
“영감님께 돌려드리세요.”
나는 받지 않고 그를 봤다.
“자전거 탄 건 제 조카예요. 제가 시켰습니다. 상무님이 시킨 걸 제가 또 시켰어요. 그 안에 제 차 번호가 적혀 있더군요. 석 달에 한 번씩, 날짜랑 같이. 이 년 치.”
그는 웃지 않았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아까 복도에서 하윤 씨가 한 말 듣고 나니까 그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따라 해 보세요, 우리는 다 봤어. 저도 다 봤거든요. 이 년 동안.”
나는 수첩을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말은 오 경위한테 직접 하시라고. 도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데 한참 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형사과 쪽으로 사라졌다.
그날 오후 다리에 들러 강 노인에게 수첩을 건넸다. 강 노인은 수첩을 펴서 맨 마지막 쪽부터 거꾸로 넘겼다. 한 쪽도 빠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뜯긴 주머니는 아내가 새로 기워 놓았다. 단추가 두 개로 늘어 있었다.
“하나 더 달았소. 마누라가.”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이번엔 나도 좀 들어가 보려고.」
오후에 오 경위와 칠 층에 갔다. 서명옥 씨는 앉아서 우리를 맞았다. 간호사가 등받이를 세워 주었다. 창가의 꽃바구니는 다 시들어 있었다. 백합 잎이 누렇게 말려서 탁자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 옆에 분류 센터 계약 해지 통보 봉투가 세워져 있었다.
오 경위가 침대 옆에 앉아 진술을 받았다. 서명옥 씨는 짧게 말했다. 추천서. 교수님 말. 진우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사원증. 그리고 백사십사 개. 자기가 보냈다고. 재부착 라벨을 사사로이 썼다고. 그건 자기 잘못이라고.
진술이 끝나고 오 경위가 복도로 나가자, 서명옥 씨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작았다.
“하윤 씨. 녹음에 진우 목소리 있다면서요.”
“네.”
“어땠어요.”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물소리를 말할 수는 없었다. 이건 교수님 거야, 형 거 아니야. 그 문장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파일 맨 앞이 떠올랐다. 예린이 켜 놓은 노래방.
“노래 진짜 못했어요.”
서명옥 씨가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내어. 산소 줄이 흔들렸다. 웃다가 기침을 했고, 기침하다가 울었다. 웃음과 울음이 한 숨 안에서 섞였다.
“걔가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음을 하나도 못 맞췄어요. 그런데 끝까지 불렀어요. 박자도 틀리면서. 다 부르고 나서 꼭 인사를 했어요.”
“인사도 했어요. 녹음에. 감사합니다, 하고.”
서명옥 씨는 한참 창밖을 봤다. 다리 쪽을.
“감사실에도 제가 쓸게요. 발신인은 저라고. 하윤 씨는 받기만 했다고.”
“어머님, 그러면.”
“내 이름은 내가 대요.”
서명옥 씨는 탁자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미 써 둔 것이었다. 우정사업본부 감사실 앞. 등기. 발신인 칸에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서명옥. 청명의료원 칠 층.
“하윤 씨가 부쳐 줘요. 창구에 못 선다면서요. 그래도 우표는 붙일 수 있잖아요.”
나는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알았다. 아침에 내가 예린에게 한 말이었다. 간호사가 전했을 리 없었다. 그냥 같은 말을 한 사람이 또 하나 늘었을 뿐이었다.
저녁 뉴스에 율천동 선거 사무소가 나왔다. 권석진 시의원 후보, 십이 년 전 대학 동기 익사 사건 관련 긴급 체포. 현수막이 화면 뒤로 스쳐 갔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
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배, 뉴스 봤어요. 통계적으로 이건 기적이에요.」 조금 뒤 한 통이 더 왔다. 「아니다. 이건 통계 아니다. 사람이 한 거다.」
나는 서명옥 씨의 봉투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사원증 옆에, 사진 옆에. 내일 아침 우체국 창구에 가서 줄을 설 것이다. 손님으로.
자기 전에 거실 바닥의 물건들을 다시 봤다. 금요일에 내야 할 백사십사 개. 이제 절도 목록이 아니었다. 발신인이 자기 이름을 대기로 했으니까. 나는 흰 단추를 집어 손바닥에 올렸다. 방바닥 온도였다. 나는 그것을 쥐고 한참 앉아 있다가, 줄의 맨 앞, 제자리에 도로 놓았다. 그리고 그 줄 끝에 빈자리를 하나 남겨 두었다. 백사십오 번째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