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51자) · 발신인 칸
백사십오 번째
누가 보냈는지 아는 사람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번호표는 이십칠 번이었다. 청명우체국 창구 대기 의자에 앉아 전광판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봤다. 십사 년 동안 나는 저 숫자를 부르는 쪽이었다. 부르는 쪽에서 보면 숫자는 빨리 올라간다. 기다리는 쪽에서 보면 한 칸이 길다. 앞에 앉은 할머니가 손녀에게 부칠 김치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국물이 샐까 봐 비닐을 세 겹 감았다고, 옆자리 사람에게 두 번 말했다.
무릎 위에 내 것도 둘이 있었다. 하나는 서명옥 씨의 등기. 감사실 앞. 발신인 서명옥. 다른 하나는 3호 상자.
병원에서 내가 십이 초 만에 접은 그 상자였다. 어제 칠 층을 나올 때 간호사가 복도까지 들고 쫓아왔다. 「환자분이 이거 가져가시래요. 이제 하윤 씨 차례라고.」 빈 상자였다. 백사십오 번째 자리.
안에 넣을 것을 나는 밤새 골랐다. 물건을 넣으려고 했다. 진우 사진, 사원증, 흰 단추. 하나씩 넣어 봤다가 다시 꺼냈다. 그 사람은 십이 년 동안 물건으로 썼다. 물건은 그 사람의 말이었다. 내 말은 아니었다. 나는 우체국 사람이다. 송장을 쓰는 사람이다. 칸을 채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썼다. 편지지 넉 장. 새벽 네 시까지. 이십육 분 동안 내가 한 일을, 순서대로.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린 횟수를 기억나는 대로. 석진 선배의 말을 세 번 따라 한 것. 장례식장에서 그 눈을 피한 것. 옷장 위에 상자를 올리면서 한 번도 줄을 세우지 않은 십이 년. 조금이라는 말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마지막 장 끝에 한 줄을 적었다.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제가 쓰겠습니다.
“이십칠 번 고객님.”
진의 목소리였다. 진은 창구 유리 너머에서 나를 보고 눈이 커졌다가, 곧바로 업무용 얼굴을 만들었다. 이마에 힘을 주는 얼굴. 진이 처음 입사했을 때 나에게 배운 얼굴이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보내시겠어요.”
“등기 하나, 소포 하나 보낼게요.”
“소포는 검색대 통과하셔야 합니다. 규정입니다.”
“종이 넉 장이에요.”
“규정입니다, 고객님.”
진은 상자를 받아 검색대에 넣었다. 화면을 들여다봤다. 흰 네모가 네 장 겹쳐 떴다. 진은 오래 봤다. 뒤에 선 손님이 헛기침을 할 만큼 오래.
“예뻐요.”
진이 작게 말했다. 업무용 얼굴이 조금 풀렸다.
“송장 써 주세요, 고객님.”
진이 송장을 밀어 주었다. 받는 사람 칸에 적었다. 서명옥. 청명의료원 칠 층 끝 방. 그리고 발신인 칸에 볼펜을 댔다.
십사 년 동안 나는 이 칸을 남이 채우는 것만 봤다. 백사십사 번, 이 칸이 비어 있는 상자를 받았다. 비어 있는 칸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받는 사람이 없으면 보관함으로 가고, 일 년을 기다리고, 폐기된다.
나는 적었다. 하윤. 청명우체국 소포계. 주소. 전화번호. 한 칸도 비우지 않고.
진이 송장을 받아 단말기에 입력했다. 발신인 칸이 채워지자 커서가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딸깍. 그 소리가 창구 안에서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그때 계장이 사무실 쪽에서 나왔다. 창구 앞에 선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어색하게 손을 비볐다. 그러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유리를 들어 올렸다. 명함 스무 장 가운데 맨 위의 한 장을 꺼냈다. 한결물산 상무 권석진. 계장은 그 명함을 들고 한참 서 있다가, 문서 파쇄기에 넣었다. 파쇄기가 명함 한 장을 씹는 소리가 짧았다. 계장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하 주임, 징계위원회 날짜 나오면 나도 나갈게. 그날 하역장 얘기, 내가 한 거 말고 본 거 말할게.」
그다음 일들은 순서대로 왔다. 이제 나는 순서를 셀 줄 안다.
징계위원회는 사월 둘째 주에 열렸다. 백사십사 건의 절도 혐의는 빠졌다. 발신인이 자기 이름을 댔으니까. 우편물 훼손 한 건은 남았다. 감봉 삼 개월. 십이 년 전 허위 진술은 경찰에서 따로 입건됐다가 기소유예로 끝났다. 전과는 아니지만 기록은 남는다. 나는 그 기록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이었으니까. 오월에 창구로 돌아갔다. 진이 접어 준 3호 상자에 짐을 도로 담아서.
석진 선배는 후보를 사퇴했다. 현수막은 내려지는 데 이틀이 걸렸다. 검찰은 살인으로 기소했다. 밀어서 빠뜨린 것, 그리고 교각에 손을 건 사람에게서 종이를 빼낸 뒤 이십육 분 동안 구조하지 않은 것.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아무것도 못 봤다고 말한다고 했다. 예린의 휴대폰에 든 한 시간 십이 분이 그 말을 한 줄씩 지운다고, 오 경위가 전화로 알려 주었다.
예린의 남편은 세종에서 석 달을 버티다 한결물산을 그만뒀다. 지금은 집 근처 물류 창고에서 일한다. 월급이 줄었다고 예린이 말했다. 줄었는데 저녁을 같이 먹는다고. 세종에 있는 동안 첫째는 날마다 아빠에게 편지를 썼고, 나는 그 편지를 날마다 부쳤다. 발신인 칸에는 아이가 삐뚤빼뚤 제 이름을 썼다. 아홉 살이 되면 우체부가 되겠다고 했다. 폭발물 검사를 하고 싶다고. 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백사십오 번째 상자는 그날 오후 칠 층에 도착했다. 등기로. 받는 사람 본인 서명.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 주었다. 서명란에 이름이 적혀 있는데, 획이 두 번 끊겼다고.
그 주 토요일에 나는 칠 층에 갔다. 서명옥 씨는 누워 있었다. 등받이를 세우지 못했다. 편지지 넉 장이 베개 밑에 있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사흘 동안 몇 번을 꺼냈다 넣었는지 모서리가 말해 주었다.
“다 읽었어요.”
“네.”
“조금이라는 말이 한 번도 없더라고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하윤 씨. 나는 이제 안 세도 되죠.”
“네. 제가 셀게요.”
그녀는 이불 밑에서 손을 꺼냈다. 손바닥 안에 작은 것이 있었다. 나무 손잡이가 닳아 반들반들한 도장. 인면에 두 글자. 분류. 파란 잉크가 인면 홈마다 말라붙어 있었다.
“센터에 반납해야 되는 거예요. 해지 통보 받고 나서 못 했어요. 하윤 씨가 돌려줘요.”
나는 도장을 받았다. 가벼웠다. 십이 년 동안 하루에 수천 번 찍힌 무게가 이 정도였다.
“반납 기한이 언제예요.”
“다음 주 월요일.”
서명옥 씨는 눈을 감은 채로 덧붙였다.
“하루 일찍 돌려줘요. 걔처럼.”
나는 일요일 오후에 분류 센터에 갔다. 처음으로 정문을 지나갔다. 이제 따라올 세단이 없었다. 야간조 반장이 도장을 받아 들고 한참 내려다봤다. 「이모님 거네. 손잡이가 이렇게 닳은 건 이모님 거밖에 없어.」 반장은 도장을 서랍에 넣지 않고,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사진이 떼어진 자리에 누렇게 남은 테이프 자국 네 개. 반장은 그 사물함 칸 안에 도장을 세워 두었다. 「다음 사람 오기 전까지는 여기 둘게요.」
사월 첫째 주 화요일 아침 열 시 이십 분, 나는 직위해제된 채로 집에 있었다.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상자가 오지 않는 첫째 주 화요일이었다. 나는 그 시각에 창가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을 끝까지 기다렸다. 그것도 셈이었다.
열 시 이십일 분에 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배, 컨베이어 봤어요. 안 왔어요.」 일 분 뒤에 한 통이 더 왔다. 「통계적으로 정상이에요. 근데 저 좀 울었어요. 검색대 뒤에서.」
서명옥 씨는 오월 첫째 주 화요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이날이었다. 우체국이 쉬는 날. 분류 센터 컨베이어도 일 년에 며칠 멈추는데, 그날이 그중 하루였다.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 주었다. 새벽 네 시 십 분. 창밖이 밝아 오기 전에. 베개 밑에 편지지 넉 장이 그대로 있었다고.
장례식장에서 나는 영정 앞에 절을 했다. 일어나서 얼굴을 들었다. 사진 속 서명옥 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래. 나는 피하지 않았다. 향이 다 탈 때까지 그 앞에 서 있었다. 예린이 옆에 와서 섰다. 우리는 둘이었다. 석진 선배는 오지 않았다. 올 수 없었다.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분류 센터 야간조 반장과 작업자 둘이 작업복 차림으로 와서 절을 하고 갔다. 오 경위가 사복으로 와서 오래 고개를 숙였다. 강 노인의 아내가 보온병을 들고 와 접객실 사람들에게 보리차를 따라 주었다. 진은 검은 양복을 빌려 입고 왔는데 소매가 길었다. 진은 영정 앞에서 절을 두 번 하고, 한 번 더 할까 망설이다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은 세 번째 절을 참았다. 참는 얼굴이 진이 지은 얼굴 가운데 제일 어른스러웠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밤에 다리에 올라갔다.
강 노인이 낚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슴 주머니에 단추가 두 개. 나를 보고 보온병 뚜껑에 보리차를 따랐다. 오늘은 대추가 두 알 들어 있었다.
“밤에 오는 건 처음이구려.”
“네.”
나는 난간을 잡았다. 손바닥 전체로. 강 노인이 그 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세는 셀 필요가 없는 자세요.”
그는 가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칠 권째. 그리고 코트 안쪽에서 한 권을 더 꺼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세 권째였다. 2014년. 그는 그 수첩을 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겼다. 그 줄에서 멈췄다.
2014.02.17 · 3 / 0
강 노인은 볼펜을 꺼냈다. 그 줄은 고치지 않았다. 그날은 그날의 숫자였다. 대신 그 바로 아래, 비어 있던 줄에 새로 적었다. 한 글자씩, 천천히.
2026 · 3 / 1 — 십이 년 늦게
“셋이 있었고, 하나가 들어갔소.”
강 노인이 수첩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 숫자를 오래 봤다. 영이 제일 좋은 숫자라고 그는 말했었다. 이 하나는 다른 하나였다. 물에 들어간 하나가 아니라, 그 이십육 분 안으로 다시 들어간 하나.
강물은 오월이라 따뜻한 색이었다. 교각 아래 주황 가로등은 흰 가로등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보리차를 마셨다. 대추 맛이 났다.
지금도 나는 청명우체국 소포계 창구에 앉는다. 하루에 상자를 이백 개쯤 만진다. 첫째 주 화요일 오전 열 시 이십 분이 되면 나는 컨베이어를 한 번 본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그래도 본다. 옷장 위의 상자는 이제 열 개다. 열 번째 상자에는 편지지 넉 장의 사본과, 강 노인의 수첩 그 쪽을 찍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다. 3 / 1. 이사할 일이 생기면 나는 그 상자를 제일 먼저 쌀 것이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가끔 손님이 송장의 발신인 칸을 비워 두고 내민다. 귀찮아서, 또는 숨기고 싶어서. 그러면 나는 볼펜을 돌려 내밀며 말한다.
“발신인 칸은 비우시면 안 돼요, 고객님. 돌아올 곳이 있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