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11자) · 밥줄

마예린

누가 보냈는지 아는 사람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예린은 문자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나는 주소를 알고 있었다. 우체국 사람은 주소를 안다. 알면 안 되는 방법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나는 알면 안 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예린이 삼 년 전 동기 단체 대화방에 올린 돌잔치 초대장에 주소가 있었다. 그 초대장에 나는 답하지 않았었다.

토요일 오전 열한 시, 예린의 아파트는 신도시 끝 단지였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소리가 났다. 십오 층.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손을 두 번 쥐었다 폈다.

문을 연 것은 아이였다. 다섯 살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고 한 손에 크레파스를 쥐고 있었다.

“누구세요?”

“엄마 친구야.”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다가 크레파스로 내 코트를 가리켰다. 「아줌마 옷 우체부 아저씨 거랑 똑같아.」 청명우체국 겨울 점퍼를 입고 온 걸 그제야 알았다. 「아줌마 우체부야?」 「응.」 「그럼 편지 가져왔어?」 「아니. 편지 받으러 왔어.」 아이는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소리쳤다. 「엄마, 우체부 친구래!」 부엌 쪽에서 물 끄는 소리가 났고, 앞치마를 두른 예린이 나왔다. 나를 보고 걸음이 멈췄다. 행주를 쥔 손이 앞치마 앞에서 멈췄다.

십이 년이었다. 예린은 머리를 짧게 잘랐고, 얼굴이 조금 둥글어졌고, 눈 밑에 그늘이 있었다. 그 그늘 말고는 그대로였다. 놀라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는 버릇도.

“하윤아.”

“잠깐만 얘기해.”

예린은 아이를 거실로 들여보냈다. 텔레비전을 켜 주고, 현관으로 나와 문을 등 뒤로 닫았다. 복도에 둘이 섰다. 복도 창으로 놀이터가 내려다보였다.

“문자 봤어. 답 안 한 거 알지.”

“알아.”

“그럼 왜 왔어.”

“너 뭐 받는 거 있어?”

“없어.”

예린은 너무 빨리 대답했다. 앞치마에 크레파스 자국이 묻어 있었다. 빨강, 노랑. 아이가 그린 해 같았다. 나는 그 속도를 들었다. 십이 년 전 경찰서에서 형사가 「즉시 신고하셨죠」 하고 물었을 때 예린이 「네」 하던 속도와 같았다.

“석진 선배가 너한테 연락했지.”

예린이 입술을 말아 넣었다.

“지난주에. 너 요즘 이상한 거 받는다고. 네가 흔들리면 우리 다 흔들린다고. 나한테 너 좀 챙기라고.”

“챙기라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예린은 복도 창을 봤다. 놀이터에서 누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진우가 나 졸업 논문 봐 줬던 거 알아? 사 학년 때. 맞춤법 틀린 데 빨간 펜으로 다 고쳐 줬어. 한 장에 스무 개씩. 끝에 한 줄 적어 놨더라. 결론이 제일 좋다고. 나 그 종이 아직 있어. 버리질 못해서.”

예린은 앞치마 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우리 남편 한결물산 다녀. 물류팀. 석진 선배 밑이야. 오 년 전에 선배가 넣어 줬어. 나 결혼할 때 축의금도 제일 많이 했어. 그때 나는 그게 고마웠어. 진짜로.”

예린은 웃었다. 웃음이 끝까지 안 갔다.

“지난주에 남편이 지방 물류센터로 발령 얘기 들었대. 세종. 주말부부. 선배가 전화한 다음 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복도 창밖에서 그네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하윤아. 난 애가 둘이야. 둘째는 이제 돌 지났어. 그날 일, 나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살았어. 너도 그랬잖아. 십이 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했잖아.”

“응. 안 했어.”

“근데 왜 이제 와서.”

“예린아. 우리 그날 몇 분 서 있었는지 기억해?”

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십육 분이야. 열한 시 십사 분부터 사십 분까지. 누가 그걸 적어 뒀어. 다리 위에서.”

예린의 얼굴이 하얘졌다.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입을 막았다.

그날 밤 둔치에서 예린은 내 팔을 쥐고 있었다. 손톱이 코트를 뚫고 들어오도록. 나는 그걸 십이 년 동안 예린이 무서워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복도에서 입을 막은 예린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예린은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물로 가지 못하게. 아니면 내가 전화를 누르지 못하게. 둘 중 어느 쪽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예린도 모를 것이다.

그 이십육 분 동안 나는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을 켰다가 껐다가. 112를 눌렀다가 지웠다가. 석진 선배가 우리 앞에 서서 말했다. 아무것도 못 봤어. 진우가 혼자 미끄러졌어. 교각 기초에 발을 헛디뎠어. 우리는 저쪽에 있었어. 소리 듣고 왔을 때 이미 없었어. 따라 해 봐.

진우가 혼자 미끄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봤다. 석진 선배와 진우가 교각 옆에서 언성을 높였다. 진우가 뭔가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종이였다. 석진 선배가 그 종이를 빼앗으려 했다. 진우가 뒤로 물러섰다. 석진 선배가 두 손으로 진우 가슴을 밀었다. 그다음이 물소리였다.

그 장면을 나는 십이 년 동안 조각으로만 떠올렸다. 조각으로 두면 순서가 없고, 순서가 없으면 문장이 안 된다. 문장이 안 되면 진술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십이 년을 살았다.

“예린아. 진우가 흔들던 종이 기억해?”

예린은 입에서 손을 뗐다.

“기억 안 나.”

“석진 선배가 그걸 가져갔어. 이십육 분 동안 한 일 중에 그게 첫 번째였어. 둔치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어.”

“하윤아, 그만해.”

현관문이 열렸다. 예린의 남편이 나왔다. 사십 대 초반, 트레이닝복 차림. 한 손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 둘째였다. 아기가 아빠 어깨에 볼을 대고 나를 봤다.

“누구세요.”

“대학 동기예요. 하윤이라고.”

남편은 나를 위아래로 봤다. 그 이름을 아는 얼굴이었다.

“아, 그분. 상무님이 말씀하시던.”

“뭐라고 하셨는데요.”

“힘든 일 있으신 분이라고. 혹시 찾아오면 잘 대해 드리라고.”

남편은 아기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봤다. 예의 바른 얼굴이었다. 그 예의 뒤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얼굴.

“죄송한데요. 우리 집 좀 가만히 놔두세요. 저 다음 달에 세종 갈지도 몰라요. 애들 두고. 그게 누구 때문인지 저도 대충 알아요. 옛날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지금 우리 집 밥줄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들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틀린 말이 없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버튼을 눌렀다. 층수 표시가 올라오는 동안 뒤에서 예린이 불렀다.

“하윤아.”

돌아봤다. 예린이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남편은 아기를 안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다리 위 사람. 누구야.”

“다리 지키는 할아버지. 십오 년째 매일 나와서 난간 앞에 선 사람을 세.”

예린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그날 할아버지가 소리 질렀어.”

예린이 말했다.

“들어가라고. 나 들었어. 너도 들었을 거야. 석진 선배도. 다 들었어. 아무도 안 들어갔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 나는 손을 넣어 막았다. 예린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입술을 말아 넣었다. 그리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석진 선배였다.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예린이네 갔다며. 애들 있는 집에 그러면 안 되지, 하윤아. 예린이 남편이 걱정 많이 한다. 다음엔 나한테 먼저 연락해.」

버스 창밖으로 신도시 아파트들이 지나갔다. 똑같은 창이 수백 개씩 붙은 건물들. 저 창 하나하나 뒤에 밥줄이 있다. 예린네 창도 저 가운데 하나다. 내가 진술을 고치면 그 창 하나가 흔들린다. 석진 선배는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예린의 남편을 먼저 흔들었다.

나는 답장을 썼다. 「선배가 먼저 흔든 거 알아요.」 지웠다. 「세종 발령 선배가 한 거죠.」 지웠다. 「진우가 흔들던 종이 어디 있어요.」 그건 지우지 않고 한참 봤다. 버스가 두 정거장을 지났다. 옆자리 학생이 이어폰을 빼고 내 화면을 흘끔 봤다가 도로 꽂았다. 나는 그 문장도 지웠다. 십이 년 전처럼. 눌렀다가 지우고, 눌렀다가 지우고.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가 달랐다. 지운 문장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례대로 남았다. 흔들었다, 발령, 종이. 순서가 생기고 있었다. 순서가 생기면 문장이 된다. 나는 그게 무서웠고, 무서운 것보다 조금 더 반가웠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두 번째 문자가 왔다.

「하윤아, 너 이번 달 정기 인사 있지? 소포계 계장님이 너 칭찬 많이 하시더라. 꽃은 잘 받았다고. 좋은 분이야.」

인사 얘기를 선배가 어떻게 아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계장 책상 유리 밑, 명함 스무 장 위에 놓인 새 명함이 떠올랐다. 제일 위에. 선배는 꽃바구니 하나로 내 책상 옆자리까지 들어와 앉아 있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샀다. 계산대 청년이 「봉투 드려요?」 하고 물었다. 「아뇨.」 나는 김밥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한 번 더 떨었다. 이번에는 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진은 사흘 동안 중부권 소포 분류 센터에 다니는 입사 동기에게 전화를 돌렸다고 했다. 재부착 라벨 작업을 누가 하는지. 야간조 셋이 돌아가며 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십이 년째 그 자리라고 했다. 계약직. 한 번도 정규직 전환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 이름은 동기도 몰랐다. 다들 「이모님」이라고만 부른다고. 대신 동기가 한 가지를 기억했다. 그 이모님 사물함 문 안쪽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고.

“선배, 흰 셔츠래요. 젊은 남자. 단추를 목까지 다 채운.”

나는 전화를 쥔 채로 한참 말이 없었다. 진이 「선배? 선배 듣고 있어요?」 하고 세 번 불렀다. 네 번째에 나는 대답했다. 고맙다고. 진은 「통계적으로 흰 셔츠는 흔해요」 하고 말했다가, 스스로 말을 거뒀다. 「아니다. 이건 통계 아니다.」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늘었다. 나는 우체국 수첩 맨 뒷장을 폈다. 거기 강 노인 이름을 적어 둔 줄이 있었다. 그 다음 줄에 적었다. 예린. 아이 둘. 남편. 세종.

적어 놓고 보니, 십이 년 전 그 이십육 분 동안 석진 선배가 한 것과 같은 셈이었다. 누가 다칠지, 누가 입을 닫을지, 누구를 먼저 흔들지. 나는 그 셈을 반대 방향으로 하고 있었다. 반대 방향이라도 셈은 셈이었다.

수첩을 덮기 전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흰 셔츠. 사물함. 그 줄은 셈이 아니었다. 주소였다.

4화는 어땠나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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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05.22· 4화

    이 장면 묘사가 오래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줄이요.

마예린 · 누가 보냈는지 아는 사람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