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00자) · 꽃바구니
분류
누가 보냈는지 아는 사람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나머지 열다섯 줄은 숫자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 숫자들을 나흘 동안 봤다. 병가는 사흘이었다. 나흘째에는 출근해서 봤다. 점심시간에, 휴게실에서, 퇴근 뒤 식탁에서. 숫자가 안 풀리면 물건을 다시 들었다. 백사십사 개를 하나씩. 여섯 시간이 걸렸다.
들면서 알았다. 물건 아랫면이나 안쪽에 점이 찍혀 있었다. 아주 작은 점. 볼펜으로 찍은 것. 점이 하나인 것, 둘인 것, 셋인 것.
세었다. 점 하나 마흔여덟 개. 점 둘 마흔여덟 개. 점 셋 마흔여덟 개. 정확히 셋으로 나뉘었다.
거실 바닥에 무더기 셋을 만들었다. 무더기마다 도착 순서대로 줄을 세웠다. 석 달 간격이었다. 점 하나짜리가 삼월에 오면, 점 둘짜리가 사월, 점 셋짜리가 오월. 세 계열이 돌아가며 한 달씩 왔다. 십이 년 동안.
첫 무더기 숫자만 뽑아서 적었다. 날짜가 나왔다. 셋째 줄에서 멈췄던 그 날짜, 2014년 2월 17일이 첫 무더기에서는 세 번 되풀이됐다. 둘째 무더기에서는 시각이 나왔다. 23:14와 23:40이 번갈아. 셋째 무더기에서는 숫자 셋과 영이 나왔다. 3, 0, 3, 0.
한 사람이 날짜만, 한 사람이 시각만, 한 사람이 셋과 영만 보낸 것처럼. 그런데 점을 확대경으로 다시 보니, 점 셋짜리 마흔여덟 개 가운데 서른두 개는 점이 삼각형으로 찍혀 있었고, 열여섯 개는 일자로 찍혀 있었다. 일자 열여섯 개는 전부 종이였다. 접힌 종이. 십오 장은 백지였고, 마지막 한 장이 지난달 온 것이었다. 세 줄이 적힌.
2014.02.17 2314 2340 0003 0000
나는 백지 열다섯 장을 하나씩 폈다. 십이 년 동안 펴 본 적이 없었다. 백지니까 펼 이유가 없었다. 형광등에 비춰 봤다. 눌린 자국이 있었다. 위에 다른 종이를 놓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자국.
문지르는 건 진이 도왔다. 퇴근 뒤 우리 집에 와서, 식탁에 신문지를 깔고, 4B 연필 여섯 자루를 깎아 줄 세웠다. 진은 종이 한 장에 연필 한 자루씩 쓰자고 했다. 흑연이 섞이면 증거가 오염된다고. 드라마에서 봤다고 했다.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진은 첫 장을 문지르다가 글씨가 떠오르자 연필을 떨어뜨렸다. 식탁 밑으로 굴러간 연필을 줍지 않고 종이만 봤다. 「선배, 이거 진짜 드라마예요.」
연필을 눕혀 종이를 문질렀다. 우체국에서 배운 방법이다. 주소가 번진 봉투, 빗물에 지워진 송장을 살릴 때 쓴다. 흑연이 눌린 자리만 피해 가면서 글씨가 하얗게 떠올랐다.
첫 장. 아직 못 쓰겠습니다.
둘째 장. 이번 달에도 못 썼습니다.
셋째 장. 당신이 세고 있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래도 보냅니다.
넷째 장부터 열넷째 장까지, 열한 장이 같은 말이었다. 못 쓰겠습니다. 못 썼습니다. 다음 달에. 날짜만 달랐다. 석 달에 한 장씩, 지난 사 년 동안. 그전 팔 년 동안에는 종이가 한 장도 없었다. 사 년 전 어느 날부터 보낸 사람은 물건 대신 백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쓰려고 했던 것이다.
열다섯째 장. 다음 달에 쓰겠습니다.
그다음 달이 올해 이월이었다. 세 줄이 적힌 종이가 온 달. 십이 년 동안 못 쓴 사람이 마침내 쓴 것이 날짜와 시각과 숫자 셋뿐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알았다. 이 사람도 문장을 못 쓰는 사람이다. 나처럼. 나도 십이 년 동안 그날에 대해 한 문장도 쓴 적이 없다. 조서 말고는.
그날 오후, 석진 선배가 우체국에 왔다.
나흘째 날이었다.
두 시 반이었다. 소포계 창구 앞이 한가한 시간. 유리문이 열리고 꽃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커다란 꽃바구니를 든 남자가 앞장섰고, 그 뒤로 석진 선배가 들어왔다. 회색 코트, 짙은 남색 목도리. 머리에 흰 것이 조금 섞였다. 그것 말고는 십이 년 전과 같았다. 키가 컸다. 코트 깃을 세우고 있었다.
꽃바구니가 소포계 창구 옆 탁자에 놓였다. 리본에 금색 글씨. 「청명우체국 직원 여러분 늘 감사합니다 — 한결물산 상무 권석진」. 소포계 계장이 창구에서 튀어나왔다. 석진 선배가 계장과 악수를 했다. 계장은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았다. 창구 뒤 직원들이 고개를 빼고 봤다. 진이 내 옆에서 속삭였다.
“선배, 저 사람 누구예요. 꽃이 저 정도면 폭발물 아니에요?”
석진 선배는 계장과 두어 마디 나누고, 창구로 왔다. 내 창구로. 유리 칸막이 너머에서 웃었다. 이가 고르고 하얬다.
“하윤아.”
“선배.”
“일하는 데 한번 보고 싶었어. 좋네. 깨끗하고. 상자 냄새 나네.”
그는 창구 칸막이 아래 서류 넣는 틈으로 봉투 하나를 밀어 넣었다. 두툼한 서류 봉투였다.
“이거 부탁 좀 하려고. 택배로 보내야 되는 서류.”
나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틈에 반쯤 걸친 채로 두었다. 봉투 모서리가 칸막이 유리에 닿아 작게 긁히는 소리를 냈다. 창구 뒤에서 진이 숨을 참는 게 들렸다.
“접수하시려면 송장 쓰셔야 돼요.”
“알아. 그런데 그것보다.”
석진 선배는 목소리를 낮췄다. 칸막이에 이마가 닿을 듯이 몸을 숙였다. 코트 깃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네가 받은 거. 그거 나 줘. 다. 내가 처리할게. 누가 보낸 건지 알아내서, 조용히 끝내게.”
“누가 보냈는지 알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얘기하지. 그만하라고. 그 사람도 이제 편해져야지. 너도 그렇고.”
나는 그의 눈을 봤다. 십이 년 전 둔치에서 우리 앞에 서서 손짓을 하던 눈. 그때도 눈이 차분했다. 물속에 진우가 있을 때도.
“선배. 진우는 혼자 미끄러졌어요?”
석진 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있었다. 웃음이 그대로 있는 게 더 무서웠다.
“하윤아. 조서에 그렇게 있잖아.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제일 먼저.”
그는 봉투를 칸막이 틈에서 도로 빼냈다.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아주 부드럽게.
“예린이는 아무것도 안 받아. 나도 안 받고. 너만 받아. 왜 너만 받는지 생각해 봤어? 네가 전화했잖아. 네 목소리가 녹음돼 있잖아. 즉시 신고했다고. 그 사람은 너를 원망하는 거야, 하윤아. 나 말고.”
그는 칸막이에서 몸을 떼고, 계장에게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유리문으로 나갔다. 꽃바구니가 탁자 위에 남아 있었다. 백합과 장미. 향이 소포계 전체에 퍼졌다.
계장이 창구로 와서 명함을 흔들었다. 「대단한 분이네. 한결물산 상무. 이번에 시의원 나오신대. 하 주임 아는 사이야?」 나는 대학 선배라고만 했다. 계장은 명함을 자기 책상 유리 밑에 끼웠다. 거기 이미 명함이 스무 장쯤 끼워져 있었다. 계장은 새 명함을 제일 위에 두었다.
진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선배. 저 꽃 검색대 넣어 볼까요?”
“넣지 마.”
“그럼 버릴까요?”
“버리지도 마. 그냥 둬. 시들 때까지.”
“시들면요?”
“그땐 버려. 그 사람이 준 게 시든 걸 다들 보게.”
진은 나를 봤다. 처음으로 농담 없는 얼굴이었다.
“선배, 저 사람이에요? 택배.”
“아니야. 저 사람은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 내가 받은 걸 받고 싶어 해.”
퇴근길에 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십이 년 만이었다. 번호가 바뀌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신호가 갔다. 다섯 번. 여섯 번.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나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문자를 보냈다. 「예린아, 하윤이야. 석진 선배가 너한테 내 번호 물어봤대. 너 뭐 받는 거 있어?」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버스가 세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읽음 표시만 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녹음 파일을 찾았다. 112 신고 녹취는 본인이 정보공개를 청구하면 받을 수 있다. 십이 년 전 것은 보존 기한이 지나 폐기됐을 것이다. 나는 청구서를 쓰다가 멈췄다. 폐기됐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 녹음 속 내 목소리를 안다. 십이 년 동안 한 번도 안 들었지만 안다.
방금 사람이 빠졌어요. 율천교 아래요. 방금이요.
방금. 이십육 분 뒤에 한 말이었다.
석진 선배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보낸 사람은 나를 원망하는지도 몰랐다. 전화를 건 목소리를. 방금이라고 한 목소리를.
그런데 그렇다면 왜 백지에 못 쓰겠다고 썼을까. 원망하는 사람은 쓴다. 쓸 말이 많다. 못 쓰는 사람은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백지 열다섯 장을 겹쳐 형광등에 비춰 봤다. 흑연 글씨가 겹쳐서 하나의 문장처럼 보였다. 못 쓰겠습니다, 못 썼습니다, 다음 달에. 그 겹친 글씨 사이로 처음 보는 자국이 하나 보였다. 모든 장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똑같은 자리에 눌린 작은 네모. 도장 자국이었다. 볼펜으로 쓴 게 아니라 무언가를 찍은 자국.
나는 그 네모를 연필로 한 번 더 문질렀다. 테두리 안에 글자가 두 개 떠올랐다. 흐릿했다. 분류.
우체국 분류 센터 작업자가 소포 모서리에 찍는 확인 도장. 하루에 수천 번 찍는 그 도장을, 누군가 이 백지 아래 깔린 책상에서 찍은 것이다. 사 년 동안, 석 달에 한 번.
우체국 분류 센터는 전국에 스물몇 곳이다. 그중 우리 청명우체국 소포가 거쳐 가는 곳은 중부권 소포 분류 센터 한 곳. 밤새 컨베이어가 돌고, 수백 명이 교대로 상자를 나누고, 상자마다 모서리에 확인 도장을 찍는다. 그 도장 자국이 발신인 칸 대신 백지 아래 눌려 있었다.
발신인 없는 소포가 접수되는 방법을 나는 그제야 떠올렸다. 접수 창구를 거치지 않으면 된다. 분류 센터 안에서, 송장이 훼손된 상자에 재부착 라벨을 붙이는 작업이 있다. 그 라벨은 발신인 칸을 비워도 넘어간다. 원래 송장에 있었다고 치니까. 그 작업은 분류 센터 사람만 한다.
나는 강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이 년 전 다리에 온 여자. 예순쯤. 서진우의 엄마. 진우 어머니 얼굴을 나는 한 번 봤다. 장례식장에서. 흰 소복을 입고 영정 옆에 서서, 조문 온 우리 셋에게 고개를 숙였다. 석진 선배가 제일 앞에서 절을 했다. 나는 그 뒤에서 절을 했다. 일어나서 얼굴을 들었을 때 그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래. 나는 그 눈을 피했다. 그 뒤로 그분 이름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새벽 세 시였다. 식탁 위에 흑연 가루가 얇게 깔려 있었다. 손가락 끝이 까맸다. 창밖으로 청명우체국 쪽 하늘이 조금 밝았다. 분류 센터로 가는 첫 트럭이 출발하는 시각이었다. 그 트럭이 가는 곳에서, 지금도 누군가 도장을 찍고 있을 것이다.
보낸 사람은 우체국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