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79자)

열한 시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성재담

광석 씨의 오른손이 이불 위에서 조금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손가락이 펴지지 않고 갈고리처럼 굽어 있었다⁠. 광석 씨는 나를 보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왼쪽 입꼬리가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

“⁠국대⁠…⁠… 왔는가⁠?⁠”

말이 한 마디씩 끊겨 나왔다⁠. 숨을 한 번 쉬고 한 마디⁠, 다시 쉬고 한 마디⁠. 해미가 창가에서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래도 많이 돌아오신 거래요⁠. 오른쪽은 재활해야 하고⁠, 말은 시간이 걸린대요⁠.⁠”

엄평구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에게 자리를 내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앉지 않았다⁠. 다시 앉아 해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엄평구의 무릎 위에 갈색 서류 봉투가 있었다⁠.

“⁠아까 하던 말 마저 할게요⁠, 해미 씨⁠. 아버님이 두 해 전에 협심증 진단을 받으셨어요⁠. 혀 밑에 넣는 알약 처방도 받으셨고요⁠. 채용 때 건강 문진표에는 심장 질환 없음에 표시하셨어요⁠.⁠”

해미의 팔짱이 풀렸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공단이 산재 조사할 때 진료 기록을 다 떼요⁠. 회사 노무사가 미리 확인했어요⁠. 숨기고 들어오셨으면 공단은 지병으로 봐요⁠. 산재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회사는 그걸 문제 삼지 않을게요⁠. 채용 때 거짓으로 적은 거⁠, 회사가 다투면 해미 씨 쪽이 더 힘들어져요⁠.⁠”

해미는 봉투를 침대 머리맡 과일 바구니 옆에 올려놓았다⁠.

“⁠위로금은 다시 생각해 볼게요⁠. 이천⁠. 조용히 가시는 게 서로 좋아요⁠.⁠”

삼천이 이천이 되었다⁠. 해미가 이 숫자를 입속으로 따라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았다⁠. 광석 씨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약 드시는 분이었으면 더 빨리 119 불렀어야죠⁠.⁠”

내가 말했다⁠. 엄평구가 고개를 돌렸다⁠.

“⁠몰랐어요⁠. 본인이 숨겼으니까⁠. 모르는 걸 어떻게 해요⁠, 지숙 씨⁠.⁠”

*

“⁠…⁠…열한 시에⁠.⁠”

광석 씨의 목소리였다⁠. 엄평구도 해미도 나도 그쪽을 보았다⁠. 광석 씨는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왼손이 이불 위에서 가슴께로 천천히 올라왔다⁠.

“⁠열한 시에⁠…⁠… 내가⁠…⁠… 반장한테⁠…⁠… 집에 보내 달라고 했어⁠.⁠”

숨을 쉬었다⁠. 기계가 이 사람의 맥박을 초록 선으로 그렸다⁠.

“⁠가슴이⁠…⁠… 조여서⁠. 약을⁠…⁠… 안 가져와서⁠.⁠”

“⁠아빠⁠.⁠”

“⁠반장이⁠…⁠… 무전 올렸어⁠. 센터장한테⁠. 그라고⁠…⁠… 고개 젓더라⁠. 안 된대⁠. 성수기에⁠…⁠… 빠지믄⁠…⁠… 다음 주⁠…⁠… 자리 없다고⁠.⁠”

병실이 조용했다⁠. 복도에서 누군가 링거대를 밀고 지나가는 바퀴 소리가 났다⁠. 나는 이 열한 시를 보았다⁠. 도크 끝에서 반장이 무전기를 입에 대던 것⁠, 무전기가 지직거리던 것⁠, 반장이 고개를 젓던 것⁠. 돌아온 광석 씨의 얼굴이 생수 비닐처럼 하얗던 것⁠. 이날 나는 묻지 않았다⁠. 묻는 대신 쌀 포대를 하나 더 들었다⁠.

엄평구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엄평구는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말했다⁠.

“⁠반장이 그렇게 말했어요⁠? 저는 그런 무전 받은 적 없습니다⁠, 노광석 씨⁠. 반장이 혼자 판단했나 보네요⁠. 그건 제가 확인해 볼게요⁠.⁠”

“⁠센터장님이 알면서 일 시키신 거네요⁠.⁠”

해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아서 더 무서운 목소리였다⁠.

“⁠지병이라고 하셨죠⁠. 맞네요⁠. 아빠 지병 있었네요⁠. 그래서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못 가게 하셨네요⁠.⁠”

“⁠해미 씨⁠, 무전 기록은 없어요⁠. 채널 2는 녹음이 안 돼요⁠. 반장 말하고 제 말하고⁠, 그리고 아버님 말씀이 다르면⁠…⁠…⁠.⁠”

“⁠그럼 반장님 데려오세요⁠.⁠”

엄평구는 일어섰다⁠. 점퍼 지퍼를 올리고 과일 바구니 옆의 봉투를 손끝으로 해미 쪽으로 조금 밀었다⁠.

“⁠몸조리 잘하세요⁠, 노광석 씨⁠. 반장한테 확인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병실을 나가면서 내 옆을 지나쳤다⁠. 이번에는 어깨에 손을 얹지 않았다⁠. 대신 내 조끼 등판을 보았다⁠. 주황색 위의 흰 글씨를⁠.

“⁠조장님⁠, 내일 저녁에 봬요⁠.⁠”

*

해미는 봉투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져 앉는 것이 보였다⁠. 나는 광석 씨 침대 옆에 남았다⁠.

“⁠국대⁠…⁠… 그 조끼⁠…⁠… 뭐여⁠.⁠”

“⁠조장 조끼요⁠. 아저씨 쓰러지고 나서 받았어요⁠.⁠”

이 사람은 내 조끼를 한참 보았다⁠. 왼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로 주황색 천을 꾹 눌렀다⁠. 힘이 없어서 손가락이 천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거 입으믄⁠…⁠… 남의 허리로⁠…⁠… 드는 거여⁠.⁠”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숨을 몇 번 고르고⁠, 입꼬리를 한쪽만 다시 올렸다⁠.

“⁠나⁠…⁠… 문어 못 잡겄다⁠. 손이 이래서⁠. 문어가⁠…⁠… 나를 잡겄어⁠.⁠”

웃음이 터졌다⁠. 터지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광석 씨가 이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남이 우는 것을 오래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약⁠…⁠… 끊은 거⁠…⁠… 내가 한 거여⁠. 숨긴 것도⁠. 그건⁠…⁠… 내 잘못이여⁠.⁠”

광석 씨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근디⁠…⁠… 그날⁠…⁠… 나 집에 가려고 했어⁠. 그것도⁠…⁠… 말해 줘⁠. 둘 다⁠…⁠… 말해 줘⁠.⁠”

나는 조끼 지퍼를 내렸다⁠. 소매에서 팔을 빼는 데 허리가 걸려 시간이 걸렸다⁠. 다 벗고 나서 이것을 반으로 접어 침대 옆 보호자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흰 글씨가 안으로 들어가게⁠. 주황색 천에는 내 손바닥 먼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말할게요⁠. 둘 다⁠.⁠”

광석 씨가 눈을 감았다⁠. 기계의 초록 선이 조금 느려졌다⁠. 광석 씨는 잠들어 있었다⁠.

복도로 나가자 해미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봉투가 놓여 있었고⁠, 봉투 위에 백미러에 걸려 있던 목장갑이 얹혀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몸에서 주황색이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거 벗으면 언니 월 사백 날아가잖아요⁠.⁠”

“⁠알아요⁠.⁠”

“⁠바보예요⁠.⁠”

이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옆 벽에 등을 대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허리가 바닥에 닿는 데 한참 걸렸다⁠. 간호사실 시계가 다섯 시를 넘겼을 때 해미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접힌 합의서 한 장과 이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수표를 꺼내 형광등에 비춰 보더니 도로 넣었다⁠.

“⁠이거 언니가 내일 그 사람한테 돌려줘요⁠. 제 손으로 주면 제가 그 사람 앞에서 울 것 같아요⁠.⁠”

“⁠산재는요⁠?⁠”

“⁠신청할 거예요⁠. 아빠가 숨긴 것도 쓰고⁠, 열한 시도 쓸 거예요⁠. 아빠가 둘 다 말하라고 했잖아요⁠. 다 들렸어요⁠, 문밖에서⁠.⁠”

이 사람은 봉투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천만 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종이 한 장 무게였다⁠.

*

다음 날 저녁⁠, 조끼 없이 출근했다⁠. 휴대폰은 다시 사물함에 넣었다⁠. 조장이 아니면 규칙도 원래대로였다⁠.

사물함에 가기 전에 센터장실 문을 두드렸다⁠. 엄평구는 모니터로 권역 처리량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빨간 선이 초록 선 밑으로 조금 내려가 있었다⁠. 나는 봉투를 엄평구의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해미 씨가 돌려 드리랍니다⁠. 산재 신청한답니다⁠. 열한 시 이야기도 쓴답니다⁠.⁠”

엄평구는 봉투를 열어 보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조장 조끼는요⁠?⁠”

“⁠병원 의자에 두고 왔습니다⁠.⁠”

“⁠그럼 직고용도 없어요⁠. 일당 십오만 원⁠, 13번 혼자⁠. 오늘부터⁠. 그리고 반장한테 확인했어요⁠. 열한 시 일은 반장이 혼자 판단했대요⁠. 무전은 없었고요⁠.⁠”

이 사람은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빨간 선이 화면 끝에서 깜빡였다⁠.

“⁠지숙 씨가 하는 일 때문에 저 선이 내려가요⁠. 저 선이 세 번 내려가면 야간조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말했었죠⁠. 그때 가서 마흔다섯 명한테 지숙 씨가 설명할 거예요⁠?⁠”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서랍을 보았다⁠. 이천만 원이 들어간 서랍이었다⁠.

“⁠열한 시에 집에 가겠다는 사람을 못 가게 해서 저 선이 그동안 초록이었다고요⁠. 그 사람이 두 시 칠 분에 쓰러졌다고요⁠. 그건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센터장님이 못 하시는 거죠⁠.⁠”

엄평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엄평구의 오른손이 마우스 위에서 한 번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 끝 창문으로 냉동 도크 쪽 불빛이 보였다⁠. 거기서 탄이 비닐 발을 헤치고 나와 내 쪽을 보았다⁠. 내 몸에 주황색이 없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장갑 낀 엄지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냉동 도크로 들어갔다⁠.

사물함 앞에서 공삼분 언니가 나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주황색 어데 갔노⁠.⁠”

“⁠병원에 두고 왔어요⁠.⁠”

“⁠병원에서 그걸 누가 입노⁠. 간호사가 입나⁠.⁠”

“⁠광석 아저씨가 깨어났어요⁠.⁠”

언니의 손가락이 멈췄다⁠. 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많은 사람이 말을 안 하니 사물함 줄 전체가 조용해졌다⁠. 언니는 지게차 열쇠를 손에 쥐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노래 없이 지게차 쪽으로 걸어갔다⁠. 대학생 안경이 내 옆에서 속삭였다⁠. 공 기사님이 노래 안 하는 거 처음 본다고⁠. 열한 해 동안 사물함 앞에서 한 소절도 안 부른 날이 없었다고 쉰 넘은 형님이 거들었다⁠.

레일이 돌기 시작하고 삼십 분쯤 지났을 때⁠, 기봉 반장이 13번 앞으로 왔다⁠. 반장의 초시계가 손목에서 조금 헐거워져 있었다⁠. 이날 낮에 센터장실에 불려 갔다는 말이 사물함 앞에서 돌았다⁠.

“⁠조장 그만뒀다며⁠.⁠”

“⁠네⁠.⁠”

“⁠13번 혼자다⁠. 오늘 트럭 세 대⁠. 조장 하다 내려오면 원래 더 힘든 거야⁠.⁠”

“⁠그 전에 하나만 물을게요⁠.⁠”

나는 쌀 포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컨테이너 입구에 서서 이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도크 바닥이 컨테이너보다 한 뼘 낮아서⁠, 이 자리에 서면 내가 그보다 컸다⁠.

“⁠열한 시요⁠. 아저씨가 집에 보내 달라고 했죠⁠. 가슴이 조인다고⁠. 반장님이 무전 올렸고요⁠. 센터장님이 안 된다고 했죠⁠. 성수기에 빠지면 다음 주 자리 없다고⁠.⁠”

“⁠물 마시러 간다고 했다고 했잖아⁠.⁠”

“⁠아저씨가 깨어났어요⁠. 본인이 그렇게 말했어요⁠. 해미 씨도 들었고 센터장님도 들었어요⁠.⁠”

기봉 반장의 눈이 한 번 흔들렸다⁠. 반장은 초시계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헐거워진 줄이 손목뼈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래⁠, 집에 간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했어⁠. 내가⁠.⁠”

“⁠무전은요⁠?⁠”

“⁠무전은 안 했어⁠. 내가 판단한 거야⁠. 성수기에 사람 빠지면 13번이 안 돌아가니까⁠. 내가 혼자 안 된다고 한 거야⁠. 센터장님은 몰라⁠.⁠”

기봉 반장은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누가 써 준 문장을 외우는 사람처럼⁠. 나는 반장이 오늘 낮에 센터장실에서 무슨 말을 듣고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반장이 혼자 판단했나 보네요⁠.⁠” 병실에서 엄평구가 했던 이 말이⁠, 반장의 입에서 반장의 말이 되어 나오고 있었다⁠.

“⁠반장님이 혼자 지는 거예요⁠, 그럼⁠.⁠”

“⁠지긴 뭘 져⁠. 그 무전은 없었어⁠. 없었다고⁠.⁠”

이때 머리 위에서 지게차 후진 경보음이 멈췄다⁠. 13번 옆 통로에 공삼분 언니의 지게차가 서 있었다⁠. 포크 위에 빈 팔레트 두 장이 얹혀 있었고⁠, 언니는 운전석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게차 시동이 꺼졌다⁠. 레일 소리만 남았다⁠.

이날 밤 열한 시에도 언니는 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채널 2는 지게차 기사들도 다 듣는다⁠.

“⁠기봉아⁠.⁠”

언니가 불렀다⁠. 반장님이 아니라 이름으로⁠. 반장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의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운전대를 잡은 언니의 손가락이 하얬다⁠.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열한 시 ·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