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85자)

조장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성재담

“⁠레일 한 칸 내려 주세요⁠. 원래 속도로⁠.⁠”

새벽 한 시 십 분⁠, 센터장실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올라온 길이었다⁠. 엄평구는 책상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돼요⁠. 권역에는 내가 말할게요⁠.⁠”

“⁠자정 쉬는 시간 삼십 분⁠, 반장님이 초시계 들고 이십 분에 깨우지 않게⁠. 그리고 작업 중 대화 금지 종이 떼 주세요⁠.⁠”

“⁠그것도 돼요⁠. 종이는 내일 아침에 떼죠⁠.⁠”

이 사람은 쉽게 내주었다⁠. 너무 쉬웠다⁠. 나는 세 번째를 말했다⁠.

“⁠비상 정지 누른 사람한테 경위서 받지 마세요⁠.⁠”

엄평구가 처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손가락 두 개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그건 본사 규정이에요⁠. 내가 못 없애요⁠. 대신 이렇게 하죠⁠. 조장이 누르면 경위서 없어요⁠. 조장은 현장 판단 권한이 있으니까⁠. 지숙 씨가 조장 하세요⁠. 13번부터 20번 도크까지⁠. 그 구역에서 누가 손이 끼면 지숙 씨가 누르면 돼요⁠.⁠”

엄평구가 서랍을 열고 주황색 조끼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등판에 흰 글씨로 「⁠조장⁠」이 박혀 있었다⁠.

“⁠조장 수당은 일당에 삼만 원 얹어요⁠. 성수기 끝나면 직고용⁠. 월 사백⁠. 그건 명함에 적은 대로고요⁠.⁠”

나는 조끼를 내려다보았다⁠. 사천칠백을 열여덟만 원으로 나누는 셈과 월 사백으로 나누는 셈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돌아갔다⁠. 두 번째 셈이 먼저 끝났다⁠. 이것이 내가 조끼를 집어 든 까닭이었다⁠. 비상 정지 단추는 핑계였다⁠.

조끼를 팔에 걸치고 나서야 물었다⁠.

“⁠해미 씨한테 문진표 이야기는 왜 하셨습니까⁠?⁠”

“⁠사실이니까요⁠. 노광석 씨가 채용 때 문진표에 뭘 안 적었는지⁠, 공단은 다 봐요⁠. 나중에 그걸로 뒤집히면 해미 씨가 더 다쳐요⁠. 미리 아는 게 나아요⁠.⁠”

이 사람은 서랍을 닫다가 덧붙였다⁠.

“⁠지숙 씨는 정직하던데요⁠. 파견 회사 문진표에 허리 수술이랑 진통제 다 적었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조장 해야죠⁠.⁠”

엄평구는 내 문진표를 읽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숨길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조끼는 가벼웠다⁠. 가죽 벨트보다 훨씬⁠.

*

한 시 사십 분에 주황 조끼를 입고 바닥에 내려가자 13번 도크 앞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다 지게차 운전석에서 공삼분 언니가 소리를 질렀다⁠.

“⁠쇳덩이가 주황 쇳덩이 됐다⁠! 녹슬었나⁠!⁠”

웃음이 났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안경이 왼손으로 제 조끼를 두드렸고⁠, 쉰 넘은 형님 몇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이 반 박자 느려진 것을 다들 발바닥으로 알았다⁠. 누군가 사물함 앞 종이는 언제 떼냐고 물었고⁠, 나는 아침에 뗀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이 내 입에서 나온 것이 이상했다⁠. 이것은 센터장의 대답이었다⁠.

냉동 도크 쪽에서 탄이 나를 보았다⁠. 탄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다시 분류대로 몸을 돌렸다⁠. 탄이 주황 조끼를 보는 눈이 어떤 눈이었는지 나는 확인하지 못했다⁠.

새 사람 둘이 비운 13번 트럭에는 상자가 반 넘게 남아 있었다⁠. 밀린 물량이 사천 상자였다⁠. 레일은 느려졌고⁠, 할당은 그대로였다⁠. 이 사이를 메우는 것이 조장의 일이었다⁠.

나는 역도장에서 하던 대로 했다⁠. 사람들을 둘씩 짝 지어 도크에 세우고⁠, 사십 분 들고 오 분 쉬게 했다⁠. 세트와 휴식이었다⁠. 처음 한 시간은 잘 돌았다⁠. 안경이 왼손으로 상자를 받으며 이거 헬스장 같다고 웃었다⁠. 두 시간째부터 숫자가 모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오 분 쉬는 시간을 삼 분으로 줄였다⁠. 그리고 쉰 넘은 형님 하나가 생수 묶음을 레일에 늦게 올리자 이 앞에 서서 말했다⁠.

“⁠형님⁠, 빨리요⁠. 그거 하나에 이 초 더 걸리면 한 시간에 백 개 밀려요⁠.⁠”

형님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반장의 초시계를 보던 눈과 같은 눈이었다⁠. 반장은 아무 말 없이 생수를 들었다⁠. 나는 돌아서서 다음 도크로 갔다⁠. 등 뒤에서 반장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소리를 안다⁠. 놓아야 할 때를 지나서 버티는 사람의 숨소리였다⁠.

자정 쉬는 시간에 공삼분 언니가 휴게실에서 내 조끼 등판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 색깔이 무슨 색인지 아나⁠. 미국 감옥 옷 색깔이다⁠. 드라마에서 봤다⁠.⁠”

“⁠안전 조끼 색이에요⁠, 언니⁠.⁠”

“⁠그래⁠, 안전하게 갇히는 색이다⁠.⁠”

이 사람은 컵라면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딴청을 부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황 조끼 입은 언니야⁠, 니 어깨가 와 이리 좁아졌노⁠.⁠” 대학생들이 웃었고⁠, 나도 웃는 시늉을 했다⁠. 언니는 끝까지 나를 보지 않고 불렀다⁠.

새벽 다섯 시에 밀린 물량이 사천에서 천팔백으로 줄었다⁠. 엄평구가 무전으로 수고했다고 했다⁠. 채널 2로⁠, 모두가 듣게⁠.

*

월요일 저녁⁠, 회의실 문 앞에 「⁠노무법인 면담⁠, 한 사람씩⁠」이라는 종이가 붙었다⁠. 이 아래에 「⁠순서는 조장이 정해 보냄⁠」이라고 덧붙어 있었다⁠. 사람을 들여보내는 일이 조장 몫이 되어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삼십 대 중반의 노무사가 앉아 있었다⁠. 회사가 쓰는 노무법인이라고 했다⁠. 남색 정장에 운동화를 신은 남자였는데⁠, 운동화 밑창에 센터 바닥의 회색 먼지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이 사람은 한 사람에게 십 분씩 썼다⁠.

다섯 번째가 탄이었다⁠. 나는 13번 도크에 있어야 했지만 회의실 문 옆 소화기 앞에 서 있었다⁠. 문틈으로 노무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파견 회사에서 서명하신 내용⁠, 맞으시죠⁠? 두 시 십오 분⁠.⁠”

탄이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노무사의 목소리만 다시 들렸다⁠.

“⁠감독관이 부르면 똑같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체류 연장은 잘 되고 있죠⁠?⁠”

“⁠네⁠.⁠”

이 대답만은 들렸다⁠. 문이 열리고 탄이 나왔다⁠. 탄은 나를 지나쳐 냉동 도크로 갔다⁠. 걷는 발소리가 일정하지 않았다⁠. 세지 않고 걷는 발소리였다⁠.

열여섯 번째가 나였다⁠. 노무사는 내 순서에서 서류철을 덮고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

“⁠조장님은 두 시 칠 분이라고 하셨죠⁠. 그 시각에 사람을 안고 컨테이너를 나오시면서 전광판을 보셨다고요⁠?⁠”

“⁠봤습니다⁠. 저는 바벨 들 때도 전광판부터 봅니다⁠.⁠”

“⁠그 상황에서 숫자를 정확히 보셨다는 거고요⁠.⁠”

이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꺼냈다⁠.

“⁠조장님 허리 수술 이력 있으시죠⁠. 요추⁠. 그리고 지금도 진통제 드시고요⁠. 파견 회사 건강 문진에 적으셨더라고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계속했다⁠.

“⁠그날 조장님이 허리가 안 좋은 상태에서 쓰러진 분을 무리하게 혼자 옮기시다가⁠, 컨테이너 입구에서 한 번 넘어지셨다는 진술이 있어요⁠. 그래서 처치가 늦어졌다고요⁠. 대차를 가져온 건 센터장님이었고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진술이 엇갈리면 감독관이 판단하겠죠⁠.⁠”

나는 일어섰다⁠. 허리가 한 번에 펴지지 않아서 책상 모서리를 잡았다⁠. 노무사의 눈이 내 손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이것을 적지는 않았다⁠. 적을 필요도 없는 얼굴이었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면담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다음 분 보내 주시겠어요⁠, 조장님⁠?⁠”

*

냉동 도크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기가 달랐다⁠. 두꺼운 비닐 발을 헤치고 들어서자 콧속의 물기가 한 번에 얼어붙었다⁠. 영하 20도로 맞춰진 창고 앞 분류대에 아이스크림 상자와 냉동 만두 상자가 흰 김을 뿜으며 내려왔다⁠. 탄은 장갑을 두 겹 끼고 이 위에 비닐장갑을 하나 더 끼고 있었다⁠. 송장을 읽을 때마다 눈썹에 붙은 서리가 깜빡였다⁠.

“⁠노무사가 나 넘어졌다고 한 사람이 있다더라⁠.⁠”

탄은 상자를 가르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지역 번호를 읽고⁠, 왼쪽⁠, 오른쪽⁠, 왼쪽⁠.

“⁠저 아니에요⁠.⁠”

“⁠알아⁠.⁠”

“⁠노무사님이 저한테도 물어봤어요⁠. 누나가 컨테이너 입구에서 넘어졌죠⁠, 하고요⁠. 맞다고 하면 된다고요⁠. 저는 아니라고 했어요⁠. 누나는 한 번도 안 넘어졌어요⁠. 저는 누나 발 봤어요⁠. 아저씨 머리가 바닥에 안 닿게 누나가 무릎으로 받쳤어요⁠.⁠”

이 사람이 냉동 만두 상자를 오른쪽으로 밀었다⁠.

“⁠두 시 십오 분은 서명했어요⁠. 그건 제가 했으니까 제가 다시 말 못 해요⁠. 근데 누나 넘어진 건 서명 안 했어요⁠. 안 할 거예요⁠.⁠”

“⁠그러다 서류 또 안 나오면 어떡하려고⁠?⁠”

“⁠그건 그때 셀게요⁠.⁠”

응우옌이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눈썹의 서리가 녹아 물방울이 되어 뺨으로 흘렀다⁠. 응우옌은 물방울을 닦지 않고 다음 상자의 송장을 읽었다⁠. 나는 주황 조끼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냉동 도크에서는 이 조끼도 아무것도 막아 주지 못했다⁠.

*

이날 밤 열 시⁠, 해미가 센터 정문으로 들어왔다⁠. 엄평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아버지 문진표를 보여 달라고⁠. 경비 반장님이 해미를 사무실까지 데려다주다가 13번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도크 앞에서 대학생 둘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 분 쉬는 시간을 삼 분으로 줄인다고⁠, 밀린 물량 천팔백이 오늘 밤 안에 없어져야 한다고⁠. 주황 조끼를 입고⁠, 손목을 들어 시계를 가리키면서⁠. 반장이 하던 몸짓 그대로였다⁠.

해미가 멈춰 섰다⁠. 내 조끼 등판의 흰 글씨를 오래 보았다⁠.

“⁠조장 됐네요⁠.⁠”

“⁠해미 씨⁠.⁠”

“⁠축하해요⁠. 아빠 자리에서 조장 됐네요⁠.⁠”

해미는 내 얼굴이 아니라 조끼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경비 반장님을 따라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대학생 둘이 나와 해미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이들에게 손을 휘저어 도크로 들어가라고 했다⁠. 이 손짓도 반장의 것이었다⁠.

열한 시쯤 엄평구가 갈색 서류 봉투를 들고 해미와 함께 정문을 나갔다⁠. 문진표는 병원에 가서 아버님 앞에서 보여 드리겠다고 했다는 말이 경비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13번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쌀 포대 앞에 서서 장갑을 벗었다⁠. 상자 등을 쓸고 손바닥을 비볐다⁠. 손뼉을 치려다 그만두었다⁠. 손바닥에 묻은 회색 먼지가 주황 조끼 앞섶에 손자국으로 남았다⁠.

*

새벽 세 시 사십 분⁠, 쉬는 시간도 아닌데 반장이 13번 앞으로 와서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물함 앞에서 계속 울려서 꺼내 왔다고 했다⁠. 조장 휴대폰은 급한 연락이 올 수 있으니 갖고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장이 되니 규칙이 하나 더 풀렸다⁠.

“⁠조장님⁠.⁠”

반장은 이 말을 하고 입맛을 다셨다⁠.

“⁠입에 안 붙네⁠. 들어온 지 열흘도 안 된 사람한테 조장님이라니⁠. 나는 반장 다는 데 사 년 걸렸어⁠.⁠”

“⁠저도 안 붙어요⁠.⁠”

“⁠그럼 벗든가⁠.⁠”

이 사람이 초시계를 눌렀다⁠. 딸깍 소리가 내 귀에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해미의 문자였다⁠. 세 통이었다⁠.

「⁠아빠가 눈 떴어요⁠.⁠」

「⁠말을 해요⁠. 느리게⁠.⁠」

「⁠언니를 찾아요⁠. 그 국대 어디 갔냐고⁠.⁠」

나는 반장에게 조끼를 맡기지 않고 그대로 정문으로 뛰었다⁠. 탄이 세던 열세 걸음마다 왼다리가 끌렸고⁠, 나는 이것을 세지 않았다⁠. 경비 반장님이 차단기를 올려 주며 택시를 불러 주었다⁠.

수원 대학병원 중환자실 옆 일반 병동으로 광석 씨가 옮겨져 있었다⁠. 간호사실에서 호수를 듣고 복도 끝까지 걸었다⁠. 병실 문 앞에서 숨을 한 번 깊이 가두었다⁠. 문을 밀었다⁠.

침대 머리맡에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이 옆 의자에 남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광석 씨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해미는 창가에 등을 대고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엄평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놀란 기색이 없었다⁠.

“⁠지숙 씨⁠, 왔어요⁠? 마침 잘 왔네⁠. 지금 노광석 씨한테 그날 밤 이야기 여쭙던 참이에요⁠.⁠”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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