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09자)

배정 문자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성재담

“⁠체류 기간 연장 심사가 이십이 일 뒤예요⁠.⁠”

셔틀버스가 정류장에 서서 문을 열었지만 탄은 타지 않았다⁠. 나도 타지 않았다⁠. 기사가 문을 열어 둔 채 기다리다가 경적을 한 번 짧게 울렸다⁠.

“⁠구직 비자예요⁠. 연장하려면 제가 일하고 있다는 확인이 있어야 해요⁠. 그거 파견 회사가 떼 줘요⁠. 소장님이 그랬어요⁠. 센터장님 말 잘 들으면 서류는 금방 나온다고⁠.⁠”

탄은 반창고 감긴 손가락으로 패딩 지퍼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일월에 화성에 있는 설계 회사 면접 있어요⁠. 금형 설계하는 데요⁠. 거기 붙으면 엄마 모셔 올 수 있어요⁠. 엄마가 하노이에서 쌀국수 가게 하는데⁠, 제가 한국 쌀국수는 국물이 달다고 하니까 와서 직접 끓여 보겠다고 했어요⁠.⁠”

“⁠그럼 말하지 마⁠.⁠”

내 입에서 이 말이 먼저 나왔다⁠. 탄이 고개를 들었다⁠.

“⁠말하지 마⁠, 탄⁠. 감독관한테는 내가 다른 사람 찾아서 갈게⁠. 너는 면접 봐⁠.⁠”

“⁠누나는요⁠?⁠”

“⁠나는 비자 없어도 돼⁠.⁠”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 사람은 웃지 않았다⁠. 버스 기사가 경적을 다시 울렸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탄은 맨 뒷자리에 앉아 창에 이마를 대고 금방 잠들었다⁠. 잠든 탄의 입술이 아주 작게 달싹였다⁠. 숫자를 세는 모양이었다⁠.

*

이날 오후 세 시에 나는 센터 정문 경비실 유리창을 두드렸다⁠. 야간 근무 교대 전이라 경비 반장님이 혼자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였고 모자 밑으로 흰머리가 귀를 덮었다⁠. 난로 위에서 보리차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시 넘어서 센터장님 전화 받으셨죠⁠? 사설 구급차 부르라고⁠, 119는 뒷문으로 보내라고⁠.⁠”

경비 반장님은 보리차를 종이컵에 따라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자기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가씨⁠, 나 일월이 재계약이야⁠. 일 년짜리 촉탁⁠. 이 나이에 경비 자리 다시 못 구해⁠. 우리 집사람 투석 받아⁠.⁠”

“⁠그 전화가 몇 시였는지만 말씀해 주시면 돼요⁠.⁠”

“⁠모른다고 해야지⁠. 기억 안 난다고 해야지⁠, 그런 건⁠.⁠”

경비 반장님은 창밖의 차단기를 보았다⁠. 빨간 줄과 흰 줄이 번갈아 칠해진 막대가 바람에 조금 떨었다⁠. 나는 보리차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반장님이 등 뒤에서 물었다⁠.

“⁠그 양반⁠, 살았어⁠?⁠”

“⁠중환자실이요⁠. 아직 눈을 안 떴어요⁠.⁠”

경비 반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 마신 종이컵을 손안에서 천천히 구겼다⁠. 반장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차단기 옆을 지나갈 때 경비실 창문이 다시 열렸다⁠. 반장이 고개만 내밀고⁠, 다음에 오면 보리차 말고 커피를 타 주겠다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나는 이때 몰랐다⁠.

*

금요일 오후 네 시는 이날 밤과 다음 주 배정 문자가 오는 시간이다⁠. 고시원 방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배 위에 올려놓고 기다렸다⁠. 네 시 이 분에 같은 층 옆방 남자의 휴대폰이 벽 너머에서 울렸다⁠. 네 시 오 분에 대학생 안경이 단체방에 사진을 올렸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배정 문자 화면을 들고 있었다⁠. 「⁠금요일 야간부터 다음 주 금요일까지⁠, 이천 동부 허브⁠」

내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네 시 이십 분에 파견 회사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장은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

“⁠아⁠, 육지숙 씨⁠. 센터에서 오늘 밤부터 빼 달라고 연락 왔어요⁠. 안전 수칙 위반이래요⁠. 비상 정지 단추 무단 사용⁠, 경위서 거부⁠, 상자 파손⁠. 세 개나 되네요⁠.⁠”

“⁠사람 손이 끼어서 누른 겁니다⁠.⁠”

“⁠그건 센터랑 얘기하시고요⁠. 저희는 센터가 빼 달라면 빼요⁠. 고객사잖아요⁠.⁠”

*

파견 회사 사무실은 이천 시내 중앙로 상가 삼층이었다⁠. 계단 벽에 「⁠일당 당일 지급⁠」 「⁠성수기 야간 대모집⁠」 같은 종이가 겹겹이 붙어 있었고⁠, 사무실 안에서는 믹스커피와 복사기 토너 냄새가 났다⁠. 소장은 마흔 중반의 남자였다⁠. 내가 들어서자 의자를 반쯤 돌리고 웃었다⁠.

“⁠직접 오실 줄 알았어요⁠. 국가대표는 끈기가 다르네⁠.⁠”

“⁠13번이 제 자리입니다⁠. 다음 주에도 13번에 서겠습니다⁠.⁠”

“⁠평택 쪽 센터 하나 소개해 줄게요⁠. 거기도 성수기라 사람 없어서 난리예요⁠. 일당도 비슷하고⁠. 이천만 아니면 돼요⁠.⁠”

“⁠이천이어야 합니다⁠.⁠”

“⁠왜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장이 한숨을 쉬고 책상 위의 볼펜을 굴렸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탄이 들어왔다⁠. 나를 보고 문간에서 멈췄다⁠. 손에 투명한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체류 연장 서류였다⁠.

“⁠아⁠, 응우옌 씨⁠. 마침 잘 왔어요⁠. 재직 확인서 떼 놨어요⁠.⁠”

소장은 서랍에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재직 확인서였고⁠, 다른 한 장은 한 페이지짜리 글이었다⁠. 두 번째 종이를 탄 앞에 펴 놓고 볼펜을 이 위에 얹었다⁠.

“⁠이건 센터에서 그날 일 정리한다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한테 다 받는 거예요⁠. 읽어 보고 맞으면 서명하면 돼요⁠. 그럼 확인서 바로 드릴게요⁠.⁠”

탄이 종이를 읽었다⁠. 나는 탄의 어깨 너머로 첫 줄을 보았다⁠. 「⁠두 시 십오 분경 동료가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하였다⁠.⁠」

탄의 볼펜이 종이 위 한 뼘 높이에서 멈춰 있었다⁠. 탄은 나를 보았다⁠. 일흔여섯 번을 센 사람이 두 시 십오 분이라는 숫자 앞에 서 있었다⁠.

소장이 나를 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 종이를 찢으면⁠, 탄의 확인서도 함께 찢어진다⁠. 소장은 이것을 알고 나를 앞에 둔 채 종이를 꺼냈다⁠.

“⁠써⁠.⁠”

내가 말했다⁠.

탄의 눈이 커졌다⁠.

“⁠써⁠, 탄⁠. 면접 봐야지⁠.⁠”

탄은 오래 서 있었다⁠. 복사기가 혼자 예열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이 사람이 허리를 굽혀 종이 맨 아래에 한글로 또박또박 「⁠응우옌 반 탄⁠」이라고 썼다⁠. 마지막 획을 긋는 손이 떨려서 탄 자의 받침이 옆으로 비어져 나갔다⁠.

소장이 확인서를 건넸다⁠. 탄은 이것을 서류철에 넣고 고개를 숙인 다음 사무실을 나갔다⁠. 나를 보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장의 발소리가 일정했다⁠. 세면서 내려가는 발소리 같았다⁠.

“⁠잘하셨어요⁠.⁠”

소장이 말했다⁠. 나는 소장의 책상을 손바닥으로 짚고 일어났다⁠. 허리가 펴지지 않아서 책상을 짚은 채 삼 초쯤 서 있어야 했다⁠.

상가 앞 길가에 해미의 경차가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의원이 쉬는 날이라 나를 태워다 주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조수석 문을 열자 해미가 운전석에서 몸을 돌렸다⁠. 해미의 눈이 상가 입구 쪽을 향해 있었다⁠. 방금 탄이 서류철을 안고 이 입구를 나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저 사람이죠⁠. 아빠 가슴 누른 사람⁠.⁠”

“⁠응⁠.⁠”

“⁠위에서 뭐 했어요⁠? 저 사람 얼굴이 왜 저래요⁠?⁠”

나는 문을 연 채로 서서 말했다⁠. 소장이 내민 종이⁠, 두 시 십오 분⁠, 볼펜⁠, 그리고 내가 한 말⁠. 해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니가 쓰라고 했다고요⁠?⁠”

“⁠체류 연장이 이십이 일 남았어요⁠. 그 서류 없으면 탄은⁠…⁠…⁠.⁠”

“⁠우리 아빠는요⁠?⁠”

해미가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경적이 짧게 울렸고 지나가던 사람이 돌아보았다⁠.

“⁠우리 아빠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데⁠, 아빠 가슴을 누른 사람이 두 시 십오 분이라고 썼다고요⁠. 언니가 옆에서 쓰라고 해서⁠. 언니는 누구 편이에요⁠?⁠”

“⁠둘 다 지키려고⁠…⁠…⁠.⁠”

“⁠그런 건 없어요⁠. 언니가 그랬잖아요⁠. 들다가 안 되면 놓으라고⁠. 언니는 우리 아빠를 놓은 거예요⁠.⁠”

이 사람은 조수석 쪽으로 손을 뻗어 문을 당겨 닫았다⁠. 나는 문틀에서 손을 빼느라 한 발 물러섰다⁠. 경차가 비상등을 끄고 차선으로 들어갔다⁠. 나는 중앙로 인도에 서서 이 차의 뒷유리를 보았다⁠. 해미가 백미러에 걸어 둔 목장갑 한 짝이 신호등 앞에서 차가 설 때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이천역까지는 걸어서 이십오 분이었다⁠. 나는 걸었다⁠. 열세 걸음에 한 번씩 왼다리가 끌렸다⁠.

*

저녁 여섯 시 십 분⁠, 이천역 셔틀 정류장에 나는 조끼를 입고 서 있었다⁠. 가죽 벨트도 찼다⁠. 배정이 없는 사람은 버스에 탈 수 없다⁠. 이걸 알고 나왔다⁠.

정류장 표지판 밑에 엄평구가 서 있었다⁠. 센터장이 셔틀 정류장에 나오는 일은 없다고 다들 그랬다⁠. 이 옆에 파견 회사 소장이 서 있었다⁠.

“⁠지숙 씨⁠, 오늘은 들어오시면 무단 침입이에요⁠.⁠”

엄평구가 말했다⁠. 버스 창마다 얼굴이 붙어 있었다⁠. 마흔 명 넘는 사람들이 김 서린 유리에 손바닥으로 동그란 자리를 닦고 밖을 보았다⁠. 탄은 보이지 않았다⁠.

“⁠13번은 누가 듭니까⁠?⁠”

“⁠버스로 새 사람 둘 왔어요⁠.⁠”

“⁠둘이요⁠?⁠”

“⁠지숙 씨가 두 사람 몫 했으니까요⁠.⁠”

이 사람이 웃었다⁠. 이때 정류장 옆 길가에 작은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공삼분 언니가 내렸다⁠. 지게차 기사들은 직고용이라 셔틀을 안 타고 자기 차로 다닌다⁠. 언니는 일부러 정류장을 돌아서 왔다⁠. 엄평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버스 앞문 계단에 서 있던 기봉 반장을 보더니 목청을 뽑았다⁠.

“⁠해고 문자 안 왔다고⁠, 쇳덩이는 서 있고⁠. 반장님은 계단에서 초시계만 누르고⁠.⁠”

“⁠공 기사님⁠, 여기 정류장이에요⁠.⁠”

“⁠정류장이 노래방보다 울림이 좋다⁠.⁠”

버스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반장이 얼굴을 붉히더니 지지 않으려는지 군대에서 배운 듯한 노래를 우렁차게 시작했다⁠. 박자가 처음부터 틀렸다⁠. 공삼분 언니가 이 틀린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쳐 주자 반장이 더 틀렸다⁠. 버스 창에 붙은 얼굴들이 하나둘 웃다가 끝내 다 같이 웃었다⁠. 대학생 안경이 붕대 감은 손을 흔들었다⁠. 엄평구만 웃지 않았다⁠.

“⁠반장⁠, 타⁠.⁠”

엄평구가 말했다⁠. 노래가 끊겼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떠났다⁠. 공삼분 언니가 나에게 다가와 귤 두 개를 조끼 주머니에 넣어 주고 차로 돌아갔다⁠. 나는 정류장에 혼자 남았다⁠. 벨트를 찬 허리가 차가운 바람 속에서 무거웠다⁠.

*

밤 열두 시 이십 분⁠, 고시원 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공삼분 언니였다⁠. 쉬는 시간이라 사물함에서 꺼낸 모양이었다⁠. 뒤에서 컵라면 뚜껑 뜯는 소리가 났다⁠.

“⁠쇳덩이야⁠, 니 자나⁠.⁠”

“⁠안 자요⁠.⁠”

“⁠물량이 사천 상자 밀렸다⁠. 13번에 새로 온 둘 중 하나가 생수 들다 허리를 삐끗해서 의무실 갔다⁠. 나머지 하나는 화장실 간다 카고 안 돌아왔다⁠. 권역에서 전화가 세 번 왔단다⁠.⁠”

이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센터장이 니 다시 부른단다⁠. 조건 들어준다 카더라⁠. 그라고 조장 자리 준단다⁠. 직고용 조장⁠.⁠”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허리가 바로 펴지지 않아서 벽을 짚었다⁠. 고시원 벽은 얇아서 옆방 남자의 코 고는 소리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언니⁠, 탄은요⁠?⁠”

“⁠냉동 도크⁠. 말을 한마디도 안 한다⁠. 아까 니 얘기 나오니까 귤을 까다 말더라⁠.⁠”

전화기 너머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공삼분 언니가 누군가에게 휴대폰을 건네는 소리가 났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지숙 씨⁠, 엄평구입니다⁠.⁠”

언니는 숨을 고르지도 않았다⁠.

“⁠조건 말해 봐요⁠. 들어 줄 수 있는 건 다 들어 줄게요⁠. 대신 지금 와요⁠. 택시비는 내가 내요⁠.⁠”

나는 벽을 짚은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사천칠백⁠. 월 사백⁠. 냉동 도크의 하얀 손가락⁠. 이천역 정류장에 혼자 남았던 내 허리⁠. 나는 숨을 아랫배까지 내려 가두었다⁠. 바벨 앞에서 하던 대로⁠.

“⁠세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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