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96자)

손을 놓는 밤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성재담

엠알아이 사진 속 내 허리뼈 사이에서 하얀 것이 뒤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의사는 볼펜 끝으로 이것을 가리켰다⁠.

“⁠다시 터졌어요⁠. 사 년 전 수술한 바로 아래 마디예요⁠. 수술 날짜 잡으세요⁠. 그때까지 아무것도 들지 마세요⁠. 쌀 한 봉지도요⁠.⁠”

“⁠오늘 밤 하나만 하고요⁠.⁠”

“⁠뭘 하는데요⁠?⁠”

“⁠안 드는 거요⁠.⁠”

의사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보았다⁠. 해미가 옆에서 대신 진료 의뢰서를 받아 접었다⁠.

*

금요일 낮 열두 시⁠, 공삼분 언니의 연립 거실에 일곱 명이 모였다⁠. 탄⁠, 안경⁠, 쉰 넘은 형님 둘⁠, 해미⁠, 언니⁠, 그리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나⁠. 노래방 기계 위의 장려상 일곱 장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언니는 믹스커피를 일곱 잔 탔다가 탄이 커피를 안 마신다는 걸 알고 탄 몫까지 자기가 두 잔을 마셨다⁠.

휴대폰마다 야간조 사람들의 번호가 떠 있었다⁠. 다들 한 사람씩 전화를 걸었다⁠. 거는 말은 같았다⁠. 오늘 밤 레일이 위험하게 돌면 같이 멈추자⁠. 받는 대답은 달랐다⁠.

“⁠재계약 심사가 일월이잖아⁠.⁠”

“⁠나는 애가 셋이야⁠.⁠”

“⁠지숙 씨 허리 터진 건 안됐는데⁠, 나는 허리 멀쩡해⁠.⁠”

안경이 받은 전화 하나는 욕으로 끝났다⁠. 형님 하나가 받은 전화는 긴 침묵 뒤에 알겠다고 끝났다⁠. 탄은 사람 이름은 쓰지 않고 손등에 볼펜으로 숫자만 셌다⁠. 탄이 전화를 끊을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 열하나에서 열넷으로⁠, 다시 열여덟이 되었다⁠.

“⁠열여덟이에요⁠, 누나⁠.⁠”

“⁠마흔다섯 중에 열여덟⁠.⁠”

언니가 숫자를 따라 하다가 작은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들이 헤드셋을 벗고 문간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이 헤드셋을 벗은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엄마⁠, 나 화요일 그 면접 안 가⁠.⁠”

“⁠니가 뭘 안다고⁠.⁠”

“⁠거실 다 들려⁠. 벽이 얇잖아⁠.⁠”

아들이 머리를 긁었다⁠.

“⁠엄마 지게차 다시 타는 값으로 내가 서울 가는 거잖아⁠. 그거 싫어⁠. 자소서 백한 장째 쓸게⁠.⁠”

언니는 대답이 없었다⁠. 일어나서 아들 앞으로 걸어가더니 이 등짝을 손바닥으로 세게 한 대 쳤다⁠. 아들이 아이고 소리를 냈다⁠. 언니는 부엌으로 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언니의 어깨가 떨렸다⁠. 거실에 있던 일곱이 다 같이 커피잔만 보았다⁠.

*

저녁 여섯 시 반⁠, 정문 차단기 앞에서 경비 반장님이 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허리 그래 가지고 들어가게⁠?⁠”

“⁠안 들려고 들어가요⁠.⁠”

이 사람은 차단기를 올렸다⁠. 그리고 경비실 창문을 열어 둔 채 무전기 볼륨을 높였다⁠. 채널 2였다⁠.

레일은 일곱 시에 세 칸으로 돌기 시작했다⁠. 엄평구가 무전으로 오늘이 한 해 중 가장 긴 밤이라고 했다⁠. 권역에서 실시간으로 본다고 했다⁠. 반장 자리로 돌아온 기봉이 13번 앞에 서서 초시계를 눌렀다⁠.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상자를 들지 않았다⁠. 레일 끝 굽은 자리에 서서 상자의 스티커를 읽고 무거운 것을 골라 사람들에게 둘이 들라고 소리쳤다⁠. 탄은 13번 안쪽에⁠, 언니는 내 옆에⁠, 안경은 레일 기둥 옆에 섰다⁠.

밤이 깊어 갈수록 레일 위의 상자가 레일보다 빨랐다⁠. 사람이 상자를 쫓았다⁠. 쉰 넘은 형님 하나가 열두 시 반에 쌀 포대를 들다 레일 위에 엎어졌다가 일어났다⁠. 대학생 하나는 코피를 흘렸다⁠. 휴게 삼십 분은 이십 분이 되었다⁠. 기봉이 초시계를 보며 이것을 알렸다⁠. 기봉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내가 조장 조끼를 받던 밤 엄평구가 쉽게 내준 이 삼십 분이었다⁠.

이 이십 분 동안 엄평구가 휴게실 컨테이너에 치킨 열 마리를 들여왔다⁠. 기름 냄새가 히터 먼지 냄새를 단번에 덮었다⁠.

“⁠한 해 중 제일 긴 밤이에요⁠. 다들 고생하시라고⁠. 그리고 일월 재계약은 오늘 밤 숫자 보고 반장이 정해요⁠. 오늘 끝까지 가는 사람이 우선이에요⁠.⁠”

엄평구는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치킨 상자를 여는 손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공삼분 언니가 맨 앞 상자를 열고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치킨은 죄가 없다⁠. 먹어라⁠. 먹고 정하자⁠.⁠”

웃음이 터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상자를 열었다⁠. 대학생 안경이 날개를 뜯으며 이거 먹으면 협조한 거냐고 물었다⁠. 언니가 닭다리로 안경의 이마를 톡 치며 먹는 건 협조가 아니고 소화라고 했다⁠. 탄은 치킨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내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나는 이것을 먹지 못했다⁠. 허리를 숙일 수가 없어서 손에 들고만 있었다⁠. 기름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새벽 한 시 칠 분⁠, 13번 컨테이너 안에서 소리가 났다⁠. 천장까지 쌓인 상자 벽의 아래쪽이 레일 속도를 못 따라 빠져나가면서⁠, 위쪽의 아령과 생수와 고양이 모래가 한꺼번에 기울었다⁠. 이 밑에서 탄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상자 벽이 무너졌다⁠. 탄이 옆으로 몸을 던졌다⁠. 생수 묶음 하나가 탄의 어깨를 스치고 바닥에 터졌다⁠. 물이 쏟아져 고양이 모래와 섞이며 회색 진흙이 되었다⁠. 한 뼘만 늦었으면 아령 상자가 이 사람의 머리에 떨어졌을 것이다⁠.

나는 레일 기둥 앞으로 걸어갔다⁠. 다섯 걸음에 한 번 왼다리가 끌렸다⁠. 빨간 단추 앞에서 돌아섰다⁠. 서른두 개 도크를 향해⁠, 채널 2보다 크게⁠.

“⁠급박한 위험이 있어서 일을 멈추고 대피하겠습니다⁠.⁠”

그리고 단추를 눌렀다⁠.

레일이 섰다⁠.

*

탄이 컨테이너에서 나와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을 뒤로 뺐다⁠. 그리고 소리 내어 셌다⁠.

“⁠하나⁠.⁠”

공삼분 언니가 손에 든 강아지 사료를 내려놓았다⁠.

“⁠둘⁠.⁠”

안경이 레일 기둥에서 손을 뗐다⁠. 쉰 넘은 형님 둘이 생수를 내려놓았다⁠. 탄의 입에서 셋⁠, 넷⁠, 다섯이 나왔다⁠. 옆 도크의 대학생이 상자를 내려놓자 여섯이 되었고⁠, 이 옆 도크의 아주머니가 테이프 커터를 내려놓자 일곱이 되었다⁠. 열여덟까지는 금방이었다⁠. 낮에 전화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멈췄다⁠. 나머지 스물일곱은 상자를 든 채 서 있었다⁠. 레일은 섰는데 손을 놓지 않았다⁠. 몇 사람은 레일이 섰는데도 상자를 바닥에 내려 쌓기 시작했다⁠. 재계약⁠, 애가 셋⁠, 허리 멀쩡⁠. 낮에 들은 대답들이 상자를 든 팔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옆 도크에서 마흔 줄의 남자 하나가 상자를 든 채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낮에 애가 셋이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얼굴이 벌겠다⁠.

“⁠지숙 씨⁠, 이거 지숙 씨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 레일 세워 놓고 우리까지 끌고 들어가면⁠, 일월에 나 없으면 지숙 씨가 우리 애들 학원비 낼 거야⁠?⁠”

“⁠못 내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안 끌어요⁠. 놓을 사람만 놓으면 돼요⁠. 형님은 들고 계셔도 돼요⁠. 대신 그 상자가 형님 머리 위로 무너지면 저는 또 이 단추 누를 거예요⁠.⁠”

남자는 상자를 든 채 서 있었다⁠. 팔이 떨렸다⁠.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이십이 킬로그램짜리 쌀 포대였다⁠. 나는 이 무게를 남자의 팔이 떨리는 폭으로 알았다⁠.

공삼분 언니가 목청을 뽑았다⁠. 이번에는 가사가 없었다⁠. 가락만 길게 끌었다⁠. 지게차 위에서 열한 해 동안 부르던 이 꺾는 소리였다⁠. 소리가 천장 철골에 부딪쳐 서른두 개 도크로 퍼졌다⁠. 이 소리 밑에서 한 사람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열아홉⁠.⁠”

탄이 셌다⁠. 낮에 욕으로 전화를 끊은 사람이었다⁠. 탄의 입에서 스물과 스물하나가 이어졌고⁠, 소리가 끝날 때까지 숫자는 서른여덟까지 갔다⁠. 다음은 서른아홉⁠, 마흔⁠, 마흔하나⁠, 마흔둘로 띄엄띄엄 왔다⁠. 마흔셋은 애가 셋이라던 이 남자였다⁠. 탄은 쌀 포대를 내려놓고 떨리는 팔을 두 손으로 주물렀다⁠. 냉동 도크 쪽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상자를 내려놓아 마흔넷이 되었다⁠.

13번 앞에 기봉이 반장 조끼를 입고 손목에 초시계를 감은 채 서 있었다⁠. 우리를 보지 않고 초시계를 보고 있었다⁠.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줄을 풀었다⁠. 헐거운 줄이 손목뼈 위로 미끄러졌다⁠. 이것을 멈춘 레일 위에 올려놓았다⁠.

“⁠마흔다섯⁠.⁠”

탄이 말했다⁠. 탄의 목소리가 거기서 조금 흔들렸다⁠.

*

엄평구는 삼 분 만에 내려왔다⁠. 레일 위의 초시계를 보았고⁠, 바닥에 내려놓인 상자들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레일 돌려요⁠.⁠”

“⁠급박한 위험입니다⁠. 상자 벽이 무너졌습니다⁠. 사람이 다칠 뻔했습니다⁠. 레일 속도 내리고 13번에 사람 붙이면 돌리겠습니다⁠.⁠”

“⁠지금 서면 오늘 권역 빨간불이에요⁠. 세 번째예요⁠. 세 번째면 본사가 야간조를 새로 꾸려요⁠. 새로 꾸린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당신들 마흔다섯 명이 일월에 여기 없다는 말이에요⁠. 내가 그거 막으려고 숫자 맞춘 거예요⁠. 노광석 씨 일도⁠, 다 그거 막으려고⁠.⁠”

엄평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엄평구는 숨을 고르고 휴대폰을 꺼냈다⁠.

“⁠대체 인력 버스 불렀어요⁠. 오십 명⁠. 한 시간이면 와요⁠. 당신들 다 집에 가요⁠. 오늘부로 배정 없어요⁠.⁠”

엄평구는 레일 기둥의 열쇠 상자 쪽으로 걸어왔다⁠. 레일을 다시 돌리는 열쇠가 거기 있었다⁠. 나는 열쇠 상자 앞에 섰다⁠. 다리가 떨렸다⁠. 엄평구가 내 팔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차가운 손이었다⁠.

“⁠비켜요⁠, 지숙 씨⁠.⁠”

“⁠못 비킵니다⁠.⁠”

엄평구가 당겼다⁠. 보름 전 대차 손잡이 위에서 나는 엄평구에게 지지 않았다⁠. 오늘은 버틸 허리가 없었다⁠. 무릎이 꺾였다⁠. 나는 진흙이 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엄평구는 내 팔을 놓지 않고 열쇠 상자로 손을 뻗었다⁠.

이 손 앞에 탄이 섰다⁠. 다음에 공삼분 언니가 섰다⁠. 안경이⁠, 형님 둘이⁠, 옆 도크 아주머니가 섰다⁠. 마지막으로 반장 조끼를 입은 기봉이 엄평구의 손목을 잡았다⁠.

“⁠센터장님⁠, 그만해요⁠.⁠”

엄평구가 기봉을 보았다⁠. 입이 열리지 않았고⁠, 내 팔을 쥔 손이 풀렸다⁠.

*

이때 정문 쪽에서 철컥철컥 금속 소리가 났다⁠. 지팡이 끝이 바닥을 짚는 소리였다⁠. 한 번⁠, 그리고 오래 쉬고 또 한 번⁠.

광석 씨가 오른쪽 다리를 끌고 왼손으로 알루미늄 지팡이를 짚으며 정문 통로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해미가 이 사람의 오른팔을 받치고 있었다⁠. 경비 반장님이 뒤에서 차단기 열쇠를 든 채 따라왔다⁠. 마흔다섯 명이 돌아섰다⁠.

안경이 휴게실에서 접이식 의자를 들고 뛰어왔다⁠. 광석 씨는 앉으믄 못 일어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광석 씨는 13번 앞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다⁠. 사 분은 넘었을 것이다⁠. 탄은 세지 않았다⁠. 아무도 세지 않았다⁠. 반장은 엄평구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센터장⁠. 나⁠…⁠… 그날 집에 가려고 했어⁠.⁠”

이 사람은 숨을 쉬었다⁠.

“⁠열한 시에⁠. 못 갔제⁠. 그래서 오늘⁠…⁠… 여기 왔어⁠. 내 발로⁠.⁠”

엄평구의 얼굴이 이때 처음 움직였다⁠. 무엇이 움직였는지 나는 말할 수 없다⁠. 엄평구는 펴지지 않고 갈고리처럼 굽은 광석 씨의 오른손을 보았다⁠.

정문 밖에서 경적이 울렸다⁠. 길고 굵은 경적이었다⁠. 대형 버스 한 대가 차단기 앞에 멈췄다⁠. 앞 유리에 「⁠대체 인력⁠」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그리고 버스 뒤에 멈춰 있던 흰 승용차의 문이 열렸다⁠.

해미가 광석 씨의 팔을 받친 채 휴대폰을 쥔 손을 내렸다⁠. 감독관을 부른 사람은 해미였다⁠.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린 마흔 중반의 여자가 내렸다⁠. 근로감독관이었다⁠. 감독관은 신분증 목걸이를 패딩 위로 꺼내 걸고⁠, 대체 인력 버스를 지나 정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손을 놓는 밤 ·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