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05자)

정해진 때에 쓰러진다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문자는 오후 한 시 이십 분에 왔다⁠. 태랑은 제작사 사무실의 짐을 상자에 넣고 있었다⁠. 여섯 해 동안 쌓인 짐이 라면 상자 두 개에 다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상자 위에서 떨었다⁠.

「⁠선배 오늘 밤 열한 시에 협회가 들어가요⁠. 본부 지시래요⁠. 지도 저 때문이에요⁠. 국장님 서명 받았는데 소용없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태랑은 상자를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차장에서 상자를 뒷좌석에 던져 넣고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일곱 번 가고 끊겼다⁠. 다시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자를 보냈다⁠. 「⁠국장님 서명하신 거 기억하시죠⁠. 오늘 밤 열한 시래요⁠.⁠」 답이 오지 않았다⁠.

자유로는 막히지 않았다⁠. 막히지 않아서 더 길었다⁠. 라디오에서 저녁 뉴스가 흘렀다⁠. 「⁠헌터 협회 본부⁠, 몬스터 미화 영상 대응 지침 발표 … 국회 예산 소위⁠, 토벌 예산 삭감안 이번 주 표결⁠」 태랑은 라디오를 껐다⁠. 끄고 나니 와이퍼 소리만 남았다⁠. 비는 오지 않았는데 와이퍼가 돌고 있었다⁠. 언제 켰는지 몰랐다⁠.

*

여섯 시⁠, 태랑은 흙 굴로 기어 들어가 지하 1층에 떨어졌다⁠. 무릎이 돌바닥을 찧었다⁠. 우두머리가 빛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가 할머니 휴대전화로 이미 소식을 전해 놓았다⁠. 조연출이 막내 계정에도 같은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지도에 다 나와 있어요⁠. 이 방⁠, 풀더미⁠, 흙 굴⁠. 굴로 나가면 밭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래는⁠, 지도에 없다⁠.⁠”

우두머리가 아래층 계단 앞의 바위를 밀어냈다⁠. 계단을 내려가 어린것들의 방을 지나⁠, 콜시트가 있던 넓은 방의 맞은편 벽으로 갔다⁠. 벽 밑에 둥근 쇠 뚜껑이 있었다⁠. 녹이 슬어 붉었다⁠. 우두머리가 뚜껑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넣고 들어 올렸다⁠. 아래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비린 바람이 올라왔다⁠.

“⁠예전 인간들이⁠, 물을 빼려고 뚫었다⁠. 산 아래 개울까지 이어진다⁠. 드론은⁠, 아래를 날지 않았다⁠.⁠”

태랑은 쇠 뚜껑 아래를 비췄다⁠. 콘크리트 관이 어둠 속으로 비스듬히 내려가 있었다⁠. 어른 고블린은 허리를 숙여야 지나갈 높이였다⁠.

“⁠다 같이 나가요⁠. 지금⁠.⁠”

“⁠다 같이 나가면⁠, 헌터들은 빈 방을 본다⁠. 빈 방을 보면⁠, 찾는다⁠. 찾으면⁠, 개울에서 만난다⁠.⁠” 우두머리가 쇠 뚜껑을 옆에 내려놓았다⁠. “⁠헌터들은 지도에 있는 방으로 온다⁠. 방에 고블린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찾지 않는다⁠.⁠”

“⁠누가 남는데요⁠?⁠”

우두머리는 대답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 고블린들을 불러 모았다⁠. 한 마리씩 이마를 짚어 보며 나누었다⁠. 어린것 아홉⁠, 그리고 다 큰 것 열둘이 배수로로 갔다⁠. 막내가 앞장을 섰다⁠. 쇠 투구 고블린은 남는 무리에 섞였다가 우두머리에게 투구를 붙잡혀 배수로 줄로 끌려갔다⁠. 남는 것은 우두머리를 빼고 여덟이었다⁠. 여덟 다 털이 희끗한 늙은 고블린이었다⁠.

막내는 쇠 뚜껑 앞에서 돌아보았다⁠. 붉은 두건이 땀에 젖어 있었다⁠.

“⁠우두머리도 와⁠.⁠”

“⁠막내⁠. 개울에서 오른쪽⁠, 할머니의 비닐하우스⁠.⁠”

“⁠같이 가자고⁠.⁠”

“⁠우두머리는⁠, 정해진 때에 쓰러지는 것을 잘한다⁠.⁠” 우두머리가 막내의 두건을 손가락으로 고쳐 묶었다⁠. 묶는 손이 느렸다⁠. “⁠라면을 많이 받았다⁠. 잘해서⁠.⁠”

막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휴대전화를 두건 안에 쑤셔 넣고 배수로로 내려갔다⁠. 어린것들이 차례로 따라 내려갔다⁠. 작은 손들이 쇠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가 하나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맨 마지막 어린것이 내려가다 말고 태랑을 올려다보았다⁠. 귀가 몸통보다 컸다⁠. 깨밭에서 재채기하던 아이였다⁠. 태랑은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어린것도 손을 흔들었다⁠. 브이였다⁠. 각도가 맞았다⁠.

우두머리가 쇠 뚜껑을 덮었다⁠. 덮고 나서 뚜껑 위에 흙을 발로 끌어 덮었다⁠. 흙 위에 바위 조각을 굴려 올렸다⁠.

태랑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할머니가 받았다⁠.

“⁠할머니⁠, 지금 고블린들이 개울로 나가요⁠. 비닐하우스 좀 열어 주세요⁠. 스물둘이에요⁠.⁠”

“⁠스물둘⁠? 비닐하우스에 고추 모종 깔아 놨는데⁠.⁠”

“⁠죄송해요⁠. 하룻밤만요⁠.⁠”

“⁠모종 밟으면 죽는다고 해⁠. 다 큰 놈이고 어린놈이고⁠.⁠” 할머니가 잠깐 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문 열어 놓을게⁠. 이불은 없다⁠. 퇴비 포대 깔고 자라고 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돈이 아니여⁠. 잔금이나 가져와⁠.⁠”

전화가 끊겼다⁠. 우두머리가 태랑을 보고 있었다⁠.

“⁠모종은⁠, 밟지 않는다⁠.⁠”

“⁠들었어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크다⁠.⁠”

“⁠인간도⁠, 나가라⁠.⁠”

“⁠안 나가요⁠. 찍을 거예요⁠.⁠”

“⁠찍지 마라⁠.⁠”

“⁠이번엔 찍어요⁠. 올리든 안 올리든⁠,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남아야 돼요⁠.⁠” 태랑이 휴대전화의 녹화 단추를 눌렀다⁠. 빨간 불이 켜졌다⁠. “⁠빨간 거 누르면 녹화⁠. 국룰이래요⁠.⁠”

우두머리가 엄니 사이로 숨을 내쉬었다⁠. 웃음에 가까운 숨이었다⁠.

*

밤 열한 시⁠, 펜스 앞이 낮처럼 밝아졌다⁠. 협회 트럭 네 대가 조명탑을 세웠고⁠, 하얀 빛이 덩굴 덮인 돌 입구를 통째로 지웠다⁠. 헌터 서른이 방패와 전기 막대를 들고 두 줄로 들어왔다⁠. 흙 굴이 밭으로 난 출구에도 헌터 여섯이 기다리고 있다고 지부장의 무전기가 알렸다⁠. 드론 지도 그대로였다⁠.

지하 1층에 조명이 쏟아졌다⁠. 헌터들이 빛 아래 서 있는 고블린 아홉을 둘러쌌다⁠. 우두머리가 한가운데 있었고⁠, 늙은 고블린 여덟이 우두머리 뒤에 일렬로 서 있었다⁠.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태랑은 동굴 벽 틈에 몸을 붙인 채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부장이 방패 줄 사이로 걸어 나왔다⁠. 껌을 씹지 않았다⁠. 우두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산 놈⁠. 시즌 7 때도 있었지⁠?⁠”

“⁠너는⁠, 그때 단역들을 데려왔다⁠.⁠”

지부장의 턱이 한 번 굳었다⁠. 방패를 든 헌터 몇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몇은 우두머리의 얼굴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다른 놈들 어디 갔어⁠? 지도에 서른이 넘는데⁠.⁠”

“⁠여기 있는 것이⁠, 전부다⁠.⁠”

“⁠거짓말하네⁠.⁠”

“⁠우두머리는⁠, 거짓말을 찍지 않는다⁠.⁠”

지부장이 무전기를 들었다⁠. “⁠제압⁠.⁠”

방패 줄이 좁혀 왔다⁠. 전기 막대 끝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우두머리는 막대 끝이 닿기 전에 무릎을 꿇었다⁠. 털 망토가 돌바닥에 펼쳐졌다⁠. 늙은 고블린 여덟도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정해진 때에⁠, 정해진 대로였다⁠. 헌터 둘이 우두머리의 팔을 뒤로 꺾어 쇠사슬을 감았다⁠.

신입 헌터는 줄 맨 끝에 있었다⁠. 방패를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동굴 안쪽 아래층 계단 쪽으로 눈이 갔다⁠. 계단 첫 칸에 붉은 실 한 가닥이 붙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막내 두건의 실이었다⁠. 신입 헌터가 실을 보았다⁠. 다른 헌터가 신입 헌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신입 헌터가 방패를 놓쳤다⁠. 방패가 돌바닥에 쾅 떨어지며 동굴이 울렸다⁠. 모두의 눈이 방패로 갔다⁠.

“⁠죄송합니다⁠. 팔이⁠, 팔이 떨려서⁠.⁠”

지부장이 혀를 찼다⁠. 신입 헌터가 방패를 주워 들었다⁠. 줍는 동안 발끝으로 계단 첫 칸을 쓸었다⁠. 붉은 실이 신발 밑으로 사라졌다⁠.

*

열한 시 사십 분⁠, 엄호석이 펜스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뛰었다⁠. 뛰는 걸음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걸음이었다⁠. 조명탑 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우두머리가 트럭 짐칸으로 오르고 있었다⁠. 늙은 고블린 여덟이 뒤따랐다⁠. 호석은 걸음을 멈추고 트럭을 보았다⁠. 우두머리가 짐칸 위에서 돌아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우두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석은 지부장의 팔을 잡았다⁠.

“⁠봉인 날이라고 했잖아⁠.⁠”

“⁠본부가 오늘 하래⁠. 네 영상 때문에 협회가 먼저 죽게 생겼어⁠.⁠” 지부장이 팔을 빼냈다⁠. “⁠그리고 아래층 영상⁠, 길 PD한테 있지⁠? 그거 터지면 너도 끝이고 나도 끝이야⁠. 그러니까 아래는 오늘 묻는다⁠.⁠”

산길 아래에서 굉음이 올라왔다⁠. 굴착기 한 대가 조명탑 사이로 들어왔다⁠. 굴착기는 펜스를 넘어 입구 안으로 팔을 들이밀었다⁠. 태랑이 동굴에서 뛰어나왔다⁠. 휴대전화를 든 채 굴착기 앞을 막아섰다⁠. 헌터 둘이 태랑의 양팔을 붙잡았다⁠.

“⁠아래층 무너뜨리면 안 돼요⁠! 거기 증거 있어요⁠!⁠”

“⁠그래서 무너뜨리는 거예요⁠.⁠” 지부장이 무전기를 들었다⁠. “⁠계단부터⁠.⁠”

굴착기의 팔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쇠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땅 밑에서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입구의 하얀 돌기둥에서 흙먼지가 쏟아졌다⁠. 덩굴 잎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회색이 되었다⁠. 아래층 계단이 무너지는 소리는 길지 않았다⁠. 녹슨 조명 스탠드와 컵라면 상자와 그을린 벽이 흙 아래로 들어갔다⁠.

태랑은 붙잡힌 팔을 비틀어 호석 앞으로 갔다⁠. 호석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호석은 피하지 않았다⁠.

“⁠서명하셨잖아요⁠. 조연출한테⁠.⁠”

“⁠했어요⁠.⁠”

“⁠몰랐어요⁠?⁠”

호석이 무너지는 소리가 그친 입구를 보았다⁠. 흙먼지가 조명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몰랐어요⁠. 그게 더 나쁘죠⁠.⁠”

경찰차 두 대가 산길을 올라왔다⁠. 지부장이 부른 차였다⁠. 경찰관 둘이 태랑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고 손목을 등 뒤로 돌렸다⁠. 출입 금지 구역 무단 침입⁠, 공무집행 방해⁠. 수갑이 손목에 차갑게 감겼다⁠. 경찰차 뒷좌석에 밀려 들어가기 전에 태랑은 고개를 돌려 트럭을 보았다⁠. 트럭 짐칸의 방수포 아래에서 털 망토 자락이 삐져나와 바람에 흔들렸다⁠.

*

새벽 다섯 시⁠, 파주경찰서 유치장의 쇠창살 너머 복도 끝에 텔레비전이 매달려 있었다⁠. 소리는 꺼져 있었고 자막만 흘렀다⁠. 태랑은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조끼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휴대전화는 빼앗겼지만 조끼는 남았다⁠. 접힌 종이 세 장이 손끝에 닿았다⁠. 국물 손도장 계약서⁠, 할머니의 밭 계약서⁠, 「⁠시즌 7 · 연출 엄호석⁠」이 인쇄된 콜시트 한 장⁠. 종이들이 땀에 젖어 서로 붙어 있었다⁠.

옆 칸에서 술 냄새 나는 남자가 쇠창살에 이마를 대고 태랑을 보았다⁠. 한참 보다가 손가락으로 태랑을 가리켰다⁠.

“⁠어⁠? 고블린 PD 아니여⁠? 라면 뺏긴 사람⁠.⁠”

“⁠네⁠.⁠”

“⁠우리 딸이 그 영상 보고 고블린 인형 사 달래⁠. 인형이 어디서 나와⁠. 그런 거 팔지도 않는데⁠.⁠” 남자가 딸꾹질을 했다⁠. “⁠팔면 내가 살게⁠. 근데 여긴 왜 들어왔어⁠?⁠”

“⁠고블린 집에 들어갔다가요⁠.⁠”

“⁠남의 집에 왜 들어가⁠.⁠” 남자가 혀를 찼다⁠. 딸꾹질 사이로 혀 차는 소리가 박자를 맞췄다⁠. “⁠남의 집에 들어가면 안 돼⁠. 나도 남의 집 대문에 들어가서 여기 왔어⁠. 우리 집인 줄 알았지⁠.⁠”

태랑은 웃으려다 말았다⁠. 웃음이 목에서 기침으로 바뀌었다⁠.

텔레비전 화면이 바뀌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에 쇠 우리가 있었고⁠, 우리 안에 털 망토를 두른 큰 고블린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자막이 아래로 흘렀다⁠.

「⁠헌터 협회⁠, 파주 제7 폐던전 잔류 몬스터 아홉 포획 … 나머지 행방 수색 중⁠」

「⁠방송사⁠, 5월 31일 봉인 당일 밤 「⁠헌터 직진⁠」 마지막 토벌 생중계 예고 … 포획한 고블린 우두머리 등장⁠」

화면 속 우두머리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보았다⁠. 카메라 렌즈가 우두머리의 얼굴로 다가갔다⁠. 우두머리는 렌즈를 피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들지도 않았다⁠. 컷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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