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31자)

제 몫은요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5월 9일 새벽부터 비가 왔다⁠. 조연출은 물소리에 깼다⁠. 천장 바로 밑 창문의 틀에서 빗물이 한 방울씩 새어 벽을 타고 내려왔다⁠. 빗물이 지나간 자리마다 벽지가 어두워졌다⁠. 조연출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틀 아래에 수건을 대고⁠, 수건 위에 플라스틱 바가지를 받쳤다⁠. 바가지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일정했다⁠. 똑⁠, 똑⁠, 똑⁠. 메트로놈 같았다⁠.

휴대전화에 집주인의 문자가 와 있었다⁠. 「⁠이번 달 월세 25일까지 부탁해요⁠. 지난달 것도요⁠.⁠」

조연출은 노트북을 켜서 메일함을 열었다⁠. 방송사 인사팀의 메일이 맨 위에 있었다⁠. 「⁠제출 기한 5월 12일⁠」 메일 아래에 첨부된 근로 조건표를 한 번 더 열었다⁠. 사대 보험⁠, 퇴직금⁠, 연봉 사천이백⁠, 사원증⁠, 사내 식당⁠. 사내 식당 메뉴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오늘 점심은 제육볶음이었다⁠.

바가지에 물이 반쯤 찼다⁠. 조연출은 바가지를 비우러 화장실로 가다가 거울 앞에서 멈췄다⁠. 입에 빨대를 물고 있었다⁠. 언제 물었는지 몰랐다⁠. 끝이 이미 납작했다⁠.

엄마의 전화가 온 것은 바가지를 두 번째로 비울 때였다⁠. 엄마는 군산의 횟집 주방에서 일했고⁠, 새벽 장을 보고 들어와 전화하는 시간이 늘 이 무렵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칼 도마 소리가 났다⁠.

“⁠딸⁠, 그 고블린 영상 네가 만든 거라며⁠. 이모가 보여 줬어⁠. 그 큰 고블린⁠, 말을 참 점잖게 하더라⁠.⁠”

“⁠내가 자막 쓴 거야⁠. 궁서체로⁠.⁠”

“⁠그래서 점잖았구나⁠.⁠” 엄마가 웃다가 물었다⁠. “⁠그 회사는 이제 돈 좀 주니⁠?⁠”

조연출은 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을 보았다⁠.

“⁠엄마⁠. 나 방송사 들어갈 수도 있어⁠. 정규직⁠.⁠”

수화기 너머에서 칼 소리가 멈췄다⁠. 한참 아무 소리도 나지 않다가⁠, 엄마가 아주 작게 말했다⁠. 됐다⁠, 하고⁠. 한마디만 하고 엄마는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도마 소리가 아까보다 빨랐다⁠.

*

5월 10일 오후⁠, 편집실에는 둘뿐이었다⁠. 대표는 아침부터 방송사에 가 있었다⁠. 조연출은 외장 하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파주 원본⁠」 흰 테이프가 형광등 아래에서 번들거렸다⁠. 태랑은 편집 의자에 앉은 채 하드를 보았다⁠. 하드를 보고 나서 조연출을 보았다⁠.

“⁠저 방송사 가요⁠. 정규직이요⁠.⁠”

“⁠언제부터 알았어⁠?⁠”

“⁠4월 초요⁠. 국장님이 선배한테 말하지 말래서 안 했어요⁠. 말 안 한 건 미안해요⁠. 가는 건 안 미안해요⁠.⁠”

태랑은 하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입사 조건이 이거야⁠?⁠”

“⁠파주 원본 전부요⁠. 드론 촬영분 포함⁠.⁠” 조연출이 하드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아래층 복도는 뺐어요⁠. 그건 우두머리 거니까⁠. 노트북 뚜껑에 국물 찍은 거 저도 봤어요⁠. 그건 안 줘요⁠. 드론 지도는 줘야 돼요⁠. 그거 빼면 입사 취소래요⁠.⁠”

“⁠지도 주면 협회가 들어와⁠. 어디서 자는지⁠, 굴이 어디로 뚫렸는지 다 나와 있어⁠.⁠”

“⁠국장님이 봉인 날까지 아무도 안 들어간다고 약속했어요⁠. 서면으로 받을 거예요⁠. 서명 받고⁠, 사진 찍고⁠.⁠”

“⁠국장님 약속을 믿어⁠?⁠”

“⁠선배 약속도 믿었어요⁠. 석 달 치 준다는 거⁠.⁠” 조연출이 빨대를 뺐다⁠.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낮아졌다⁠. “⁠선배는 출연자 몫 지킨다고 했죠⁠. 고블린 몫⁠. 라면 광고 깨지고⁠, 칠 초짜리 지우고⁠, 폭로 영상 덮고⁠. 다 멋있었어요⁠. 진짜로요⁠. 근데 제 몫은요⁠?⁠”

태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상암동 방송사 건물의 유리벽이 비를 맞고 있었다⁠. 유리벽 위로 빗물이 줄을 그으며 흘렀다⁠.

“⁠저도 출연자예요⁠, 선배⁠. 선배 영상에 안 나왔을 뿐이지⁠. 썸네일 노란 글씨 다 제가 썼어요⁠. 고블린 브이 각도 처음 잡은 것도 저고요⁠.⁠” 조연출이 하드를 가방에 넣었다⁠. “⁠저 반지하에서 나가고 싶어요⁠. 창문이 사람 발목 높이 아닌 방에서 살고 싶어요⁠. 그게 그렇게 큰 거예요⁠?⁠”

“⁠아니⁠.⁠”

“⁠그럼 왜 그런 얼굴이에요⁠?⁠”

“⁠안경 때문이야⁠.⁠” 태랑이 안경을 벗어 조끼 자락으로 닦았다⁠. 닦을 것이 없는 안경이었다⁠. “⁠놀라도 안 놀란 얼굴이 된다며⁠.⁠”

조연출은 웃지 않았다⁠. 가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문으로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아보았다⁠.

“⁠하나 더 받아 올 거예요⁠. 국장님한테⁠.⁠”

“⁠뭐⁠?⁠”

“⁠출연료요⁠. 땅⁠.⁠” 조연출이 문을 열었다⁠. “⁠선배가 못 받아 오니까 제가 받아 올게요⁠. 안에 들어가서⁠.⁠”

문이 닫혔다⁠. 태랑은 빈 편집실에서 모니터 두 대를 보았다⁠. 왼쪽 모니터에 조연출이 마지막으로 만든 썸네일 시안이 떠 있었다⁠. 노란 글씨였다⁠. 「⁠고블린 땅 사 주기 · 잔금 D-21⁠」

*

5월 11일 낮⁠, 태랑은 던전 지하 1층에서 우두머리에게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이 채널에는 공개된 영상이 없습니다⁠」 우두머리는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국물 손도장을 찍고 올린 첫 영상부터 라이브까지⁠,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는 인간은⁠, 이제 몇인가⁠?⁠”

“⁠영이요⁠.⁠”

“⁠삼천보다 적다⁠.⁠”

“⁠네⁠. 훨씬요⁠.⁠”

우두머리가 팔짱을 꼈다⁠. 귀걸이가 흔들렸다⁠. 막내가 할머니 휴대전화를 들고 끼어들었다⁠. 화면을 우두머리 코앞에 들이밀었다⁠.

“⁠내 계정 있음⁠. 백오십만⁠.⁠”

“⁠막내의 계정으로⁠, 땅을 사나⁠?⁠”

“⁠땅은 모르겠고 커피는 받음⁠. 헌터 형한테⁠.⁠”

태랑은 웃음이 터졌다가 금세 멈췄다⁠.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았다⁠. 우두머리는 막내의 화면에 뜬 숫자를 보다가 태랑을 보았다⁠.

“⁠빨대는⁠, 어디 있나⁠?⁠”

조연출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블린들은 조연출을 빨대라고 불렀다⁠. 태랑은 대답을 고르다가 그대로 말했다⁠.

“⁠방송사에 가요⁠. 다음 주부터⁠.⁠”

“⁠엄호석의 방송사⁠.⁠”

“⁠네⁠.⁠”

우두머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동굴 천장의 틈으로 떨어지는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

“⁠빨대도⁠, 땅이 필요하다⁠.⁠”

우두머리가 일어나 아래층 계단 앞 바위에 등을 기댔다⁠. 늘 앉던 자리였다⁠. 막내가 따라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 둘의 그림자가 바위 위에 하나로 겹쳤다⁠.

*

저녁 일곱 시⁠, 대표가 돌아왔다⁠. 김밥 대신 서류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는 두꺼웠고 하나는 얇았다⁠. 대표는 두꺼운 봉투를 제 책상 서랍에 넣고 잠갔다⁠. 얇은 봉투를 들고 태랑 앞으로 왔다⁠.

“⁠팔았다⁠.⁠”

태랑은 휴대전화로 「⁠길바닥 예능⁠」 관리 화면에 들어갔다⁠. 「⁠비밀번호가 변경되었습니다⁠. 계정 소유자에게 문의하세요⁠.⁠」 공개 화면으로 들어가니 채널 이름은 그대로였는데⁠, 영상이 하나도 없었다⁠. 「⁠이 채널에는 공개된 영상이 없습니다⁠」 구독자 숫자만 남아 있었다⁠. 백십이만⁠.

“⁠채널째로요⁠?⁠”

“⁠채널째로⁠. 판권하고 원본하고 채널하고 다 해서 오억⁠. 엄 국장이 채널은 그대로 살려 둔대⁠. 나중에 방송사가 쓴대⁠.⁠” 대표가 얇은 봉투를 탁자에 놓았다⁠. “⁠이건 네 거야⁠. 밀린 월급 넉 달 치하고 퇴직금⁠. 천팔백⁠.⁠”

태랑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고블린들 영상을 방송사가 쓴다고요⁠?⁠”

“⁠태랑아⁠. 나 직원이 너만 있는 거 아니야⁠. 편집 알바 둘⁠, 조연출⁠, 너⁠. 은행 이억⁠. 이 사무실 보증금 천⁠.⁠” 대표가 볼 안쪽을 혀로 밀었다⁠. 오래 밀었다⁠. “⁠너 여섯 해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했어⁠. 망한 거 다 찍었고⁠. 나는 그거 다 갚았어⁠. 이번엔 내가 하고 싶은 거 한 거야⁠. 빚 없는 거⁠.⁠”

태랑은 봉투를 손에 쥐었다⁠. 천팔백만 원이 든 봉투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할머니 잔금 사천육백에서 천팔백을 빼면 이천팔백이 남았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먼저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숫자는 돌아갔다⁠.

“⁠받을게요⁠.⁠”

대표가 눈을 껌벅였다⁠. 던질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

“⁠받아⁠?⁠”

“⁠고블린 땅값이에요⁠.⁠”

“⁠얼마 남았는데⁠?⁠”

“⁠이천팔백이요⁠. 이거 넣고⁠.⁠”

대표는 숫자를 듣고 볼 안쪽을 밀다가 멈췄다⁠. 서랍 쪽으로 손이 반쯤 갔다가 돌아왔다⁠. 두꺼운 봉투는 은행 것이었다⁠.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책상으로 돌아가 서랍을 열었다⁠. 두꺼운 봉투 옆에서 김밥 한 줄을 꺼내 태랑 앞에 놓았다⁠. 오늘 아침에 산 김밥이었다⁠. 밥알이 굳어 있었다⁠.

*

5월 12일 오전 열 시⁠, 방송사 12층 예능국장실의 창은 상암동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연출은 유리창 너머로 오피스텔 7층을 찾았다⁠. 비슷한 창이 너무 많아서 찾지 못했다⁠. 엄호석이 책상 맞은편에서 외장 하드를 받아 노트북에 꽂았다⁠. 폴더 목록이 화면에 떴다⁠. 호석은 드론 촬영분을 열고⁠, 지도를 한참 돌려 보았다⁠.

“⁠아래층이 없네요⁠.⁠”

“⁠거기는 안 찍었어요⁠.⁠”

“⁠찍은 거 알아요⁠. 길 PD 앞에서 내가 다 봤는데⁠.⁠” 호석이 노트북을 닫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건 길 PD가 갖고 있으라고 해요⁠. 안 올릴 거잖아요⁠. 고블린이 싫다는데⁠.⁠”

조연출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직접 써 온 문장이었다⁠. 「⁠파주 제7 폐던전의 토벌과 출입은 5월 31일 봉인 당일 전에 하지 않는다⁠.⁠」 아래에 서명 자리를 비워 두었다⁠.

“⁠서명해 주세요⁠.⁠”

호석은 종이를 읽고⁠, 망설이지 않고 만년필로 서명했다⁠. 날짜까지 썼다⁠. 조연출은 휴대전화로 서명을 찍었다⁠. 두 장 찍었다⁠.

“⁠하나 더 있어요⁠. 출연료요⁠. 우두머리가 땅을 원해요⁠. 위의 깨밭⁠. 잔금이 이천팔백 남았어요⁠. 방송사가 고블린 영상을 쓰면⁠, 출연료는 내야죠⁠.⁠”

호석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를 뒤로 젖혀 창밖을 보았다⁠. 책상 위 액자 속에서 젊은 헌터 다섯이 웃고 있었다⁠. 맨 왼쪽의 남자가 젊은 호석이었고⁠, 무릎을 꿇고 앉은 짧은 머리 여자가 지금의 지부장이었다⁠. 다섯 다 웃는 얼굴로 무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액자 유리에 금이 한 줄 가 있었다⁠.

“⁠그건 봉인 날 지나고 얘기해요⁠.⁠” 호석이 의자를 바로 했다⁠. “⁠조연출님⁠, 협상할 때는 상대가 제일 바쁜 날을 피해요⁠. 봉인 날 전까지 나는 협회 사람들 일당부터 맞춰야 돼요⁠. 고블린 출연료는 그다음이에요⁠. 잊어버린다는 얘기 아니에요⁠. 순서 얘기지⁠.⁠” 호석이 외장 하드를 뽑아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입사 축하해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와요⁠. 사원증 사진은 빨대 빼고 찍고요⁠.⁠”

조연출은 고개를 숙이고 국장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복도 끝 창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협회 점퍼를 입은 짧은 머리 여자가 창틀에 기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부장이었다⁠. 껌 씹는 소리가 말 사이에 끼었다⁠.

“⁠어⁠, 지도 들어왔대⁠. 엄 국장 노트북에⁠.⁠”

조연출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들킬까 봐 걸음을 늦추기만 했다⁠.

“⁠본부가 그냥 오늘 밤 하래⁠. 봉인 날까지 기다리다 저 영상 또 터지면 협회가 먼저 죽는다고⁠. 국장한테는 내가 나중에 말할게⁠. 열한 시⁠. 장비 챙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연출은 안으로 들어가 닫힘 단추를 눌렀다⁠. 문이 닫히는 동안 휴대전화 속 서명 사진을 열었다⁠. 만년필 잉크가 아직 번들거리는 사진이었다⁠. 「⁠5월 31일 봉인 당일 전에 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숫자가 12에서 11로 바뀌었다⁠. 엘리베이터 벽의 거울 속에서⁠, 다음 주 사원증 사진을 찍을 얼굴이 빨대를 물고 있었다⁠. 언제 다시 물었는지 몰랐다⁠. 조연출은 태랑과의 대화방을 열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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