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78자)

고블린 들어오세요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엄호석에게 연락한 것은 막내였다⁠. 4월 마지막 주 월요일 아침⁠, 「⁠막내 고블린⁠」 계정에서 호석의 계정으로 메시지가 갔다⁠. 할머니 휴대전화로 보낸 것이었다⁠. 「⁠국장님 우두머리가 들어오래요⁠. 혼자⁠. 카메라는 길태랑 PD꺼 하나만⁠. 이거 진짜임 ㅇㅇ⁠」 팔로워 사십만의 계정이 보낸 메시지에 호석은 한 시간 만에 답했다⁠. 「⁠목요일 오후 두 시⁠.⁠」

목요일 점심⁠, 던전 안은 손님 맞을 준비로 시끄러웠다⁠. 막내는 할머니에게 얻은 달력 뒷장에 매직으로 환영 문구를 썼다⁠. 「⁠국장님 환영 혼자 오세요 카메라 ㄴㄴ⁠」 글씨가 오른쪽으로 갈수록 작아져서 마지막 두 글자는 개미만 했다⁠. 쇠 투구 고블린은 동굴 벽 앞에서 허리 숙여 인사하는 연습을 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투구가 앞으로 쏟아져 돌바닥에 떨어졌고⁠, 떨어진 투구가 데굴데굴 굴러가 다른 고블린의 발등을 찧었다⁠.

조연출은 입구 기둥에 기대 빨대를 씹었다⁠.

“⁠국장님 진짜 혼자 올까요⁠?⁠”

“⁠혼자 온다고 했잖아⁠.⁠”

“⁠어른들 혼자 온다는 말은 매니저 둘 데려온다는 뜻이에요⁠.⁠” 조연출이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대표의 문자였다⁠. 「⁠4월 30일 밤 12시⁠. 사흘 남았다⁠. 엄 국장 만나면 값 올려 놔⁠.⁠」 “⁠대표님은 우리가 국장님 만나는 걸 협상인 줄 알아요⁠.⁠”

“⁠협상 맞아⁠.⁠”

“⁠누가 누구랑요⁠?⁠”

태랑은 대답하지 않고 동굴 안을 돌아보았다⁠. 우두머리는 오전 내내 말이 없었다⁠. 천장의 틈으로 빛이 떨어지는 자리를 몇 번이고 밟아 보고⁠, 빛 속에 서서 입구까지의 걸음을 셌다⁠. 열여덟 걸음이었다⁠. 막내가 환영 문구를 들고 와서 보여 주자 우두머리는 「⁠혼자⁠」 두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목요일 두 시⁠, 호석은 정말 혼자 왔다⁠. 승용차를 산길 아래에 세우고 흙길을 걸어 올라왔다⁠. 왼다리를 끌어 오르막이 길었고⁠, 펜스 앞에 닿았을 때 셔츠 등판이 젖어 있었다⁠. 초소 앞에서 지부장이 껌을 씹으며 호석을 막았다⁠.

“⁠너 미쳤어⁠? 혼자 들어가게⁠?⁠”

“⁠초대받았어⁠.⁠”

“⁠고블린한테⁠?⁠”

“⁠고블린 계정한테⁠.⁠” 호석이 숨을 고르며 웃었다⁠. “⁠팔로워가 사십만이래⁠. 우리 예능국 공식 계정보다 많아⁠.⁠”

지부장은 껌을 멈추고 호석을 한참 보다가 펜스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열면서 한마디 보탰다⁠.

“⁠삼십 분⁠. 넘으면 들어간다⁠.⁠”

태랑은 덩굴 덮인 하얀 돌 입구에서 짐벌을 들고 기다렸다⁠. 조연출이 소형 카메라를 하나 더 들고 뒤에 서 있었다⁠. 호석은 입구의 돌기둥에 손바닥을 짚고 숨을 골랐다⁠. 덩굴 잎을 손가락으로 들춰 기둥 표면을 보았다⁠. 덩굴 아래 흰 돌에 나사 구멍 네 개가 박혀 있었다⁠. 무언가를 고정했다가 떼어 낸 자리였다⁠. 호석은 나사 구멍을 오래 보고 손을 뗐다⁠.

“⁠들어가죠⁠.⁠”

*

우두머리는 지하 1층 한가운데⁠, 천장의 틈으로 빛이 떨어지는 자리에 서 있었다⁠. 라이브 날처럼 바위 뒤로 숨지 않았다⁠. 털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팔짱을 낀 채 빛 한가운데에서 호석을 기다렸다⁠. 고블린 스물하나가 둘레의 어둠 속에 흩어져 앉아 있었다⁠. 막내는 우두머리 발치에서 할머니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호석은 빛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둘 사이에 다섯 걸음쯤이 남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엄호석입니다⁠.⁠”

우두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걸이가 빛 속에서 한 번 반짝였다⁠.

“⁠제안을 드리러 왔어요⁠.⁠” 호석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번 봉투는 두꺼웠다⁠. “⁠강원도 산속에 땅이 있어요⁠. 천 평⁠. 사람이 안 사는 골짜기예요⁠. 방송사가 사서 여러분 앞으로 해 드릴게요⁠. 이사도 우리가 시켜 드리고요⁠. 트럭으로⁠, 밤에⁠, 조용히⁠.⁠”

“⁠위의 밭이 아니다⁠.⁠”

“⁠위의 밭은 사백 평이잖아요⁠. 이건 천 평이에요⁠. 두 배 반⁠.⁠”

“⁠우두머리는⁠, 강원도를 모른다⁠.⁠”

“⁠가 보시면 알아요⁠. 물도 좋고⁠.⁠”

“⁠조건은⁠, 무엇인가⁠?⁠”

“⁠영상은 여기서 끝⁠. 길 PD 채널의 영상도 다 내리고⁠, 저 막내 계정도 닫고요⁠.⁠” 호석이 막내를 보았다⁠. 막내가 휴대전화를 등 뒤로 감췄다⁠. “⁠고블린 무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한테도 안전해요⁠.⁠”

우두머리가 팔짱을 풀었다⁠. 빛 밖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림자가 호석의 발끝까지 길게 뻗었다⁠. 태랑은 짐벌을 꽉 쥐었다⁠. 우두머리는 호석을 내려다보며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늘 내던 내레이션 목소리가 아니었다⁠. 높낮이가 다른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조금 지친⁠, 끝을 살짝 올리는 존댓말이었다⁠.

“⁠자⁠, 고블린 들어오세요⁠.⁠”

동굴 둘레의 어둠이 움직였다⁠. 고블린 스물하나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고블린들은 둘씩 짝을 지어 빛 가장자리로 걸어 나와 일렬로 늘어섰다⁠. 맨 앞줄의 쇠 투구 고블린이 투구를 바로 썼다⁠. 늘어선 고블린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몸 앞에 모으고⁠, 누군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막내만 영문을 모른 채 줄 밖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조연출이 카메라를 든 채 숨을 들이켰다⁠. 태랑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 호석을 보았다⁠.

호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서류 봉투를 든 손이 내려갔다⁠. 봉투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돌바닥에 떨어졌다⁠. 호석은 봉투를 줍지 않았다⁠. 늘어선 고블린들의 숙인 정수리를 하나씩 보았다⁠.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손바닥을 들었다⁠.

“⁠컷⁠.⁠”

고블린들이 줄을 풀고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우두머리는 다시 내레이션 목소리로 돌아왔다⁠.

“⁠이 인간은⁠, 이 말을 여러 번 했다⁠. 가을마다⁠.⁠”

*

우두머리는 아래층 돌계단을 막은 바위 두 개를 혼자 밀어냈다⁠. 바위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동굴에 길게 울렸다⁠. 계단 아래에서 찬 바람이 올라왔다⁠. 우두머리가 태랑과 조연출을 돌아보았다⁠.

“⁠내려와라⁠. 어린것들 방은⁠, 찍지 않는다⁠.⁠”

“⁠네⁠.⁠”

호석은 따라 내려오지 않았다⁠. 계단 꼭대기에서 무릎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계단은 스무 칸이었다⁠. 아래층 복도는 위층보다 좁고 천장이 높았다⁠. 오른편에 작은 방 하나가 있었고⁠, 방 안에서 고르고 작은 숨소리들이 났다⁠. 태랑은 방문 앞을 지날 때 짐벌을 바닥으로 내려 돌바닥만 비췄다⁠. 조연출도 카메라를 가슴에 붙였다⁠. 방 안에서 누군가 잠결에 재채기를 했다⁠.

복도 끝은 넓은 방이었다⁠. 짐벌의 조명이 방 안을 쓸고 지나가자 금속이 번쩍였다⁠. 녹슨 조명 스탠드 다섯 개가 벽에 기대 있었다⁠. 스탠드 다리마다 방송사 로고 스티커가 반쯤 벗겨진 채 붙어 있었다⁠. 바닥에 굵은 전선이 뱀처럼 엉켜 있었고⁠, 플라스틱 장비 상자 셋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상자 옆구리에 하얀 글씨가 인쇄돼 있었다⁠. 「⁠헌터 직진 · 미술팀⁠」

방 구석에는 컵라면 상자가 쌓여 있었다⁠. 빈 상자였다⁠. 상자마다 빨간 소 그림이 있었다⁠. 광고 촬영 날 우두머리가 국물이 진하다고 말한 라면이었다⁠.

조연출이 방 한가운데에 쪼그려 앉았다⁠. 장비 상자 안에서 비닐 파일 하나를 꺼냈다⁠. 파일 안에 누렇게 바랜 종이가 묶여 있었다⁠. 촬영 일정표⁠, 업계에서 콜시트라고 부르는 종이였다⁠. 조연출이 첫 장을 짐벌 조명 아래로 들어 올렸다⁠.

「⁠헌터 직진 시즌 7 · 촬영지 파주 7 · 출연 헌터 5 · 고블린 12⁠」

「⁠22⁠:00 고블린 입장 · 22⁠:10 헌터 진입 · 22⁠:25 제압 · 22⁠:40 철수⁠」

「⁠연출 엄호석⁠」

조연출의 손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아래로 넘겨도 같은 꼴의 종이가 계속 나왔다⁠. 시즌 7⁠, 시즌 8⁠, 시즌 9⁠, 시즌 10⁠. 해마다 가을이었다⁠. 「⁠고블린 12⁠」 「⁠고블린 10⁠」 「⁠고블린 14⁠」 맨 아래 종이에는 매직으로 쓴 메모가 남아 있었다⁠. 「⁠제압분 회수 트럭 23⁠:00⁠」

태랑은 벽을 비췄다⁠. 벽 아래쪽 바위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자국들이었다⁠. 우두머리가 그을린 자국 하나에 손을 얹었다⁠.

“⁠전기 막대다⁠. 인간들은⁠, 이것을 들고 들어왔다⁠. 고블린들은 정해진 때에 뛰어나갔다⁠. 정해진 때에 쓰러졌다⁠. 쓰러지는 것을 잘하면⁠, 라면을 더 주었다⁠.⁠” 우두머리가 손을 뗐다⁠. 손바닥에 검은 그을음이 묻어 나왔다⁠. “⁠쓰러진 것들 가운데 몇은⁠, 트럭에 실렸다⁠. 돌아오지 않았다⁠.⁠”

“⁠몇이요⁠?⁠”

“⁠예전에⁠, 무리는 예순이었다⁠.⁠”

조연출이 카메라를 내렸다⁠. 태랑은 짐벌을 내리지 못했다⁠. 손이 저 혼자 화면을 지키고 있었다⁠.

계단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막내였다⁠. 할머니 휴대전화를 든 채 복도 끝에 서 있었다⁠. 막내는 조명 스탠드와 컵라면 상자와 벽의 그을음을 차례로 보았다⁠. 휴대전화 화면이 막내의 얼굴을 아래에서 비췄다⁠.

“⁠라면 주던 인간들이잖아⁠. 착한 인간들⁠.⁠”

우두머리가 막내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막내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졌다⁠. 화면이 돌바닥에 부딪혀 꺼졌다⁠. 막내는 휴대전화를 줍지 않고⁠, 컵라면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빨간 소 그림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서 먼지가 걷혔다⁠.

우두머리가 털 망토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태랑과 국물 손도장을 찍은 종이와 같은 「⁠출연 동의서⁠」였다⁠. 이번 종이는 모서리가 찢기지 않았다⁠. 오른쪽 위에 방송사 로고가 선명했다⁠. 맨 아래에 인주로 찍은 초록 엄지 지문이 있었다⁠.

“⁠우두머리는⁠, 계약을 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

계단을 올라오자 호석이 계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펴지 못하고 비스듬히 앉은 채⁠,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태랑은 콜시트 묶음을 호석 앞에 내밀었다⁠. 맨 위 종이의 「⁠연출 엄호석⁠」이 짐벌 조명을 받아 하얗게 떴다⁠.

호석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으로 종이를 가볍게 밀어냈다⁠. 부정하는 손이 아니었다⁠.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볼 필요가 없다는 손이었다⁠.

“⁠시즌 7부터 새 문이 줄었어요⁠. 진짜 토벌은 일 년에 두세 번⁠. 그것도 B급 위로만 들어가요⁠. 시청률은 떨어지고⁠, 국회에서는 예산 깎자고 하고⁠.⁠” 호석이 무릎을 문질렀다⁠. “⁠진짜 토벌은 헌터가 다쳐요⁠. 나처럼⁠. 이건 아무도 안 다쳤어요⁠.⁠”

“⁠고블린은요⁠?⁠”

호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태랑은 콜시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거 올리면 끝나요⁠, 국장님⁠.⁠”

“⁠알아요⁠. 올리면 「⁠헌터 직진⁠」은 끝나요⁠. 협회는 감사받고⁠, 토벌 예산은 다음 해에 반으로 깎여요⁠. 헌터 이천 명이 길바닥에 나앉아요⁠. 그 헌터들 중에 반은 저 아래에서 전기 막대 들었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도 그 돈으로 애들 학원 보냈어요⁠. 저기 초소에 있는 신입도요⁠.⁠” 호석이 계단 아래 어둠을 보았다⁠. “⁠그 친구도 마지막 시즌에 단역으로 왔었어요⁠. 스무 살 때⁠.⁠”

조연출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빨간 녹화 불이 켜져 있었다⁠. 호석이 카메라를 보았다⁠. 피하지 않았다⁠.

“⁠찍어요⁠. 계속 찍어요⁠. 대신 하나만 알아 둬요⁠, 길 PD⁠.⁠” 호석이 계단 난간을 잡고 일어섰다⁠. 왼다리가 한 번 꺾였다가 버텼다⁠. “⁠우리 둘 다 같은 일 해요⁠. 고블린 찍어서 먹고사는 일⁠. PD님은 브이를 찍고⁠, 나는 쓰러지는 걸 찍었어요⁠. 사람들은 둘 다 봤고요⁠.⁠”

호석은 서류 봉투를 계단 위에 내려놓고 입구로 걸어 나갔다⁠. 덩굴 덮인 하얀 기둥 사이로 오후 햇빛이 쏟아졌다⁠. 펜스 밖에서 지부장이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삼십 분에서 이 분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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