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32자)
업무 중 만든 영상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제작사 사무실 탁자 위에 근로계약서가 펼쳐져 있었다. 종이 두 장짜리였고, 여섯 해 전 태랑이 이 회사에 들어오던 날 읽지도 않고 서명한 것이었다. 대표가 일곱 번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톱 끝에 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재직 중 업무로 만든 영상물의 저작권과 그에 딸린 모든 권리는 회사에 귀속된다.」
“읽었지?”
“읽었어요.”
“한 번 더 읽어.”
태랑은 한 번 더 읽지 않았다. 창밖으로 상암동 방송사 건물의 유리벽이 보였다. 오후 햇빛이 유리벽에 부딪혀 사무실 천장에 하얀 사각형을 만들었다. 대표는 의자를 끌어다 태랑 맞은편에 앉았다. 배가 탁자 모서리에 닿았다.
“태랑아. 이 사무실 보증금이 오천이었어. 지금 천이야. 사천은 너희 월급으로 나갔어. 은행 빚이 일억 육천, 카드가 사천. 이억이야.” 대표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접을 손가락이 모자랐다. “엄 국장이 삼억 준대. 이억 갚고 일억 남아. 그 일억으로 너희 밀린 거 다 주고, 다음 기획 하나 더 할 수 있어.”
“고블린들은요?”
“고블린은 우리 직원 아니잖아.”
“출연자예요. 계약했어요.”
“국물로 찍은 거?” 대표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었다. “그거 법적으로 아무것도 아니야. 영상은 회사 거고, 회사는 나야. 내가 팔면 끝나.”
조연출이 편집실 문간에 기대 둘을 보고 있었다. 빨대를 물고 있었는데 씹지 않았다. 대표는 조연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조연출의 밀린 월급 이야기가 나올 것을 아는 사람의 목이었다.
조연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지난주에 한 달 치 주셨잖아요. 남은 두 달 치는 삼억 들어오면 주시는 거죠?”
“그렇지.”
“그럼 저는 파는 편이 좋겠네요.” 조연출이 빨대를 한 번 씹고 태랑을 보았다. “농담이에요. 반만.”
태랑은 조연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반만 농담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태랑은 근로계약서를 접어 대표 앞으로 밀었다.
“한 달 주세요.”
“한 달 뭐?”
“4월 말까지 삼억보다 많이 벌어 올게요. 광고하고, 라이브하고. 지금 구독자가 구십만이에요. 국장님이 삼억 부르는 영상이면 우리가 직접 팔아도 삼억 넘어요.”
“못 벌면?”
“그때 파세요.”
대표는 한참 태랑을 보았다. 볼 안쪽을 혀로 밀었다. 화가 나거나 계산을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들어 달력을 열었다.
“4월 30일 밤 열두 시. 일 분 넘으면 판다.”
“일 분이요?”
“너 늘 일 분씩 늦잖아. 그래서 일 분은 봐준 거야.”
대표가 일어나며 근로계약서를 다시 펼쳐 탁자에 반듯이 놓았다. 일곱 번째 줄이 위로 오게.
*
4월 첫 주말, 깨밭에 고블린 스물하나가 올라왔다. 우두머리가 정한 수였다. 위에서 일하는 고블린은 다 큰 것들만, 어린것 아홉은 아래에 남았다. 우두머리는 밭 경계 돌 위에 서서 올라오는 고블린을 하나씩 셌다. 스물한 번째가 굴에서 머리를 내밀자 우두머리가 손바닥을 펴서 굴 입구를 막았다. 뒤따라 올라오려던 작은 머리 하나가 손바닥에 콩 부딪히고 도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밭 아래에 퇴비 포대 마흔 개를 쌓아 두었다. 포대 하나가 이십 킬로였다. 할머니가 호미로 포대 더미를 가리켰다.
“저거 위로 다 올려. 고랑마다 하나씩.”
고블린들은 포대를 둘씩 짝지어 들었다. 막내만 혼자 들려다가 포대 밑에 깔렸다. 포대 아래에서 팔 두 개가 허우적거렸다. 조연출이 짐벌을 들고 달려가 막내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
“살려 주세요오.”
“지금 좋아. 그 얼굴 한 번만 더.”
“PD 누나 악마임.”
태랑은 고랑 끝에서 고블린들이 포대를 내려놓는 소리를 들었다. 퇴비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밭을 덮었다. 묵은 볏짚과 소똥이 삭은 냄새였다. 고블린들은 냄새를 싫어하지 않았다. 몇은 포대를 내려놓고 퇴비를 한 줌 집어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아래 버섯이 자라는 흙 냄새와 비슷하다고 막내가 통역했다.
할머니는 고블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호미 자루로 등을 툭툭 쳤다. 고랑을 비뚤게 걷는 놈, 포대를 질질 끄는 놈, 퇴비를 한 줌 먹어 보려는 놈이 차례로 맞았다. 맞은 고블린들은 할머니를 돌아보고, 할머니가 호미를 들어 보이면 얌전히 고랑으로 돌아갔다. 우두머리가 경계 돌 위에서 할머니를 보며 낮게 말했다.
“저 인간은, 우두머리보다 무섭다.”
“그거 자막으로 넣어도 돼요?”
“궁서체로.”
*
점심 무렵 라면 회사 마케팅 팀장이 산길을 올라왔다. 정장 바지에 등산화를 신었고, 아이스박스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이스박스 안에 새로 나온 매운 라면이 서른 봉지 들어 있었다. 「한 편에 이천만 원. 고블린이 우리 라면을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팀장이 대표에게 보낸 제안서의 첫 줄이었다.
태랑은 깨밭 한가운데에 버너를 놓고 라면을 끓였다. 조연출이 짐벌을 들었고, 팀장은 화면 밖에서 두 손을 모았다. 막내가 먼저 맛을 보았다. 젓가락 대신 손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려 후루룩 넣었다.
“맵다. 근데 맛있음. 이거 국룰 맛.”
팀장이 주먹을 쥐었다. 그다음이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는 코펠을 두 손으로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서 국물을 굴렸다. 밭에 있던 고블린 스물하나가 일손을 멈추고 우두머리를 보았다. 할머니도 허리를 펴고 보았다.
우두머리가 코펠을 내려놓았다.
“이 라면은, 국물이 얇다.”
팀장의 주먹이 풀렸다. 조연출이 짐벌을 든 채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입술이었다.
“그, 얇다는 건 어떤 의미로요?”
“인간들이 예전에 주던 라면은, 국물이 진했다. 상자에 빨간 소가 그려져 있었다.” 우두머리가 팔짱을 꼈다. “우두머리는, 거짓말을 찍지 않는다.”
팀장은 아이스박스를 다시 메고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가다 돌아보고 한 번 더 외쳤다. 국물 진한 걸로 다시 만들어 오겠다는 말이었다. 막내가 팀장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태랑은 버너 불을 끄며 우두머리를 보았다.
“예전에 누가 라면을 줬어요? 상자째로?”
우두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계 돌 위로 돌아가 다시 걸음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밭은 지난번과 같은 삼백십이 걸음이었다. 우두머리는 다 세고 나서도 처음 돌 위에서 한참 내려오지 않았다.
이천만 원이 산길을 따라 내려간 뒤, 태랑은 휴대전화로 은행 앱을 열었다. 광고 선금과 조회수 수익을 다 합쳐 사천삼백만 원이었다. 4월 30일까지 남은 날은 스무엿새였다. 삼억까지는 이억 오천칠백이 모자랐다. 할머니 밭 일억 이천은 그다음 일이었다.
은행 앱을 닫는데 조연출이 짐벌을 들고 뛰어왔다. 숨이 차서 말보다 화면을 먼저 내밀었다.
“선배, 이거. 이거 봐요.”
화면 속에서 굴 입구의 흙이 들썩였다. 손바닥만 한 초록 머리가 흙을 뚫고 나왔다. 귀가 몸통보다 컸다. 어린 고블린은 퇴비 냄새를 맡더니 코를 찡그리고,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 한 번에 몸이 뒤로 데굴데굴 굴러 도로 굴 안으로 빠졌다. 칠 초짜리 장면이었다.
조연출이 화면을 한 번 더 돌렸다. 두 번째에도 태랑은 소리 내어 웃었다. 세 번째에는 웃지 않았다.
“숏폼으로 자르면 이거 하나로 삼천만 회예요. 광고 붙이면 국장님 삼억이 한 달 안에 보여요.”
“우두머리가 아래는 안 찍는다고 했어.”
“얘가 위로 올라왔잖아요. 아래 아니에요.”
태랑이 대답하기 전에 그림자가 둘을 덮었다. 우두머리가 등 뒤에 서 있었다. 털 망토 끝이 깻대에 스쳐 버석거렸다. 우두머리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속에서 어린 고블린이 또 재채기를 하고 또 굴렀다.
“지워라.”
“이거 하나면 밭을 살 수 있어요.” 태랑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진짜로요. 이거 하나면 할머니 밭, 5월 전에 사요.”
“지워라.”
“밭 사려고 찍는 거잖아요. 우두머리님이 땅 달라고 했잖아요.”
“땅을 달라고 했다. 어린것을 팔라고 하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엄니 사이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린것의 얼굴이 천만 명에게 가면, 천만 명 중에 하나는 이 굴을 찾아 내려온다. 우두머리는, 그 하나를 안다.”
조연출이 짐벌을 꽉 쥐었다. 태랑은 조연출의 손에서 짐벌을 받아 들고 메모리 카드 목록을 열었다. 칠 초짜리 파일 하나를 골라 삭제를 눌렀다. 「삭제하시겠습니까?」 한 번 더 눌렀다. 우두머리는 화면에서 파일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경계 돌 위로 돌아갔다.
조연출이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선배. 방금 삼천만 회 지웠어요.”
“알아.”
“선배는 아는 게 너무 많아요. 아는 걸로 월급이 나오면 좋겠네.”
밭 아래 펜스 앞 초소에서 라디오 소리가 올라왔다. 「국회 예산 소위, 내년 던전 토벌 예산 삼십 퍼센트 삭감 논의 … 헌터 협회 강력 반발」 신입 헌터가 초소 앞 의자에 앉아 방패를 무릎에 올려놓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막내가 깨밭 가장자리에서 신입 헌터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신입 헌터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대신 라디오 볼륨을 한 칸 올렸다.
*
조연출의 반지하 원룸은 창문이 천장 바로 밑에 있었다. 창문 너머로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목이 보였다. 밤 열한 시, 조연출은 바닥에 노트북을 펴 놓고 깨밭 촬영분을 넘겼다. 막내가 퇴비 포대에 깔린 장면에서 세 번 돌려 보며 세 번 웃었다. 벽지 모서리가 습기에 들떠 있었다. 들뜬 자리 아래로 검은 점들이 번져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조연출님이시죠? 엄호석입니다.”
조연출은 노트북을 덮었다. 덮고 나서 왜 덮었는지 몰랐다.
“국장님이 제 번호를 어떻게.”
“업계 좁아요. 편집 잘하시던데요. 퇴비 포대 장면, 클로즈업 들어가는 타이밍 좋았어요. 그런 거 가르쳐서 되는 거 아니에요.” 호석의 목소리 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헌터 직진」 재방송의 내레이션이었다. “우리 예능국에 조연출 정규직 자리가 하나 났어요. 계약직 말고 정규직. 사대 보험, 퇴직금, 연봉 사천이백.”
조연출은 들뜬 벽지를 손톱으로 눌렀다. 벽지가 쑥 들어갔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왜 저한테요?”
“일 잘하는 사람한테 자리 주는 게 이상해요?” 호석이 잠깐 말을 멈췄다. “길 PD는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월급이 안 나와요. 내가 그 옆에 십 년 있어 봐서 알아요.”
“생각해 볼게요.”
“천천히 해요. 5월 말까지.” 전화를 끊기 전에 호석이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길 PD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고요. 그 사람 표정에 다 나와요. 카메라 앞에서도 그래서 안 웃기는 거예요.”
전화가 끊겼다. 조연출은 휴대전화를 바닥에 엎어 놓고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화면 속에서 막내가 퇴비 포대 밑에서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조연출은 정지 단추를 누르지 못하고 장면이 끝까지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창문 밖으로 누군가의 운동화가 지나갔다. 운동화 한 켤레가 지나가는 동안 사천이백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을 세 바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