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47자)

스물두 시 사십 분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5월 31일 오후 다섯 시⁠, 깨밭의 흙 굴 입구에 모래주머니 마흔 개가 쌓여 있었다⁠. 협회가 쌓은 것이었다⁠. 모래주머니 더미 앞 접이식 의자에 신입 헌터가 방패를 무릎에 놓고 앉아 있었다⁠. 밭 출구 경계가 신입 헌터의 마지막 낮 근무였다⁠. 밤 열 시부터는 입구의 방패 줄에 서야 했다⁠.

밭 가장자리 깻대 사이에서 초록 귀들이 하나씩 올라왔다⁠. 막내가 맨 앞이었다⁠. 뒤로 고블린 열둘이 줄지어 기어 왔다⁠. 쇠 투구 고블린은 투구에 깻잎을 꽂아 위장을 했는데⁠, 깻잎이 투구 꼭대기에서 안테나처럼 흔들렸다⁠.

신입 헌터가 일어섰다⁠. 방패가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오지 마⁠.⁠”

“⁠형⁠. 비켜 줄 거지⁠?⁠”

“⁠못 비켜⁠. 나 여기 지키라고 일당 받았어⁠.⁠”

막내가 모래주머니 더미 앞까지 와서 멈췄다⁠. 둘 사이에 방패 한 장 길이가 남았다⁠.

“⁠형 일당 얼마⁠?⁠”

“⁠오늘은 오십⁠.⁠”

“⁠우두머리는 오늘 일당 없음⁠. 쓰러지면 끝⁠.⁠”

신입 헌터는 방패를 주워 들었다⁠. 들었다가⁠, 몸을 돌려 모래주머니 더미에 등을 지고 앉았다⁠. 방패를 제 무릎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시선은 밭 아래 펜스 쪽⁠, 아무것도 없는 데를 보았다⁠.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진짜⁠?⁠”

“⁠근데 안 도와줘⁠. 모래주머니 하나도 안 옮겨⁠.⁠” 신입 헌터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켰다⁠. 아무것도 띄우지 않은 화면이었다⁠. “⁠그리고 열 시 사십 분엔 나 입구 줄에 있어⁠. 맨 앞줄⁠. 방패 들고⁠.⁠”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들이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들어 깻대 사이로 날랐다⁠. 신입 헌터는 화면만 보았다⁠. 모래주머니가 옮겨질 때마다 등 뒤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마흔 번째 주머니가 빠지자 흙 굴의 검은 입이 드러났다⁠. 막내가 굴에 머리를 넣었다가 빼고⁠, 신입 헌터의 등에 대고 말했다⁠.

“⁠형⁠. 맞팔은 안 끊음⁠.⁠”

신입 헌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을 쥔 엄지가 하얬다⁠.

*

밤 아홉 시 오십 분⁠, 펜스 앞은 축제처럼 시끄러웠다⁠. 산길을 따라 구경꾼 수천 명이 올라왔고⁠, 경찰이 노란 줄로 공터를 갈랐다⁠. 노란 줄 너머에서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손가락 브이를 그렸다⁠. 각도가 다 달랐다⁠. 「⁠우두머리 돌려줘⁠」 손팻말이 수십 개 흔들렸다⁠. 맨 앞줄에는 챙 넓은 모자를 쓴 할머니가 플라스틱 의자를 펴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손팻말은 달력 뒷장에 매직으로 쓴 것이었다⁠. 「⁠모종 밟지 마⁠」 옆에 선 대학생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할머니는 대답 대신 팻말을 더 높이 들었다⁠. 노란 줄 이쪽에는 방송사 중계차 두 대와 크레인 카메라⁠, 조명탑 여섯이 서 있었다⁠. 산길 끝에는 레미콘 트럭 일곱 대가 줄지어 시동을 걸어 둔 채 기다렸다⁠. 트럭의 드럼이 천천히 돌았다⁠.

덩굴 덮인 하얀 돌 입구 앞에 헌터 서른이 세 줄로 늘어서 있었다⁠. 연기 효과를 낼 기계가 줄 양옆에 놓였다⁠. 「⁠헌터 직진⁠」 포스터와 똑같은 그림을 만들 준비였다⁠. 지부장이 줄 앞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었고⁠, 신입 헌터가 맨 앞줄 끝에 방패를 들고 있었다⁠.

입구에서 열 걸음 안쪽⁠, 지하 1층의 어둠 속에 태랑이 있었다⁠. 고블린 열셋이 태랑 둘레에 웅크리고 있었다⁠. 흙 굴로 내려온 지 세 시간이었다⁠. 조명탑의 빛이 입구에서 끝나고⁠, 열 걸음 안쪽은 캄캄했다⁠. 막내가 할머니 휴대전화를 무릎 사이에 숨긴 채 라이브를 켜 두었다⁠. 소리는 껐다⁠. 화면에는 어둠과 입구 너머의 하얀 빛만 보였다⁠. 동시 접속자가 이백만을 넘었다⁠. 채팅창이 멈추지 않았다⁠. 「⁠막내 어디야⁠」 「⁠지금 안에 있는 거임⁠?⁠」 「⁠열 시 사십 분 알람 맞춤⁠」

세 시간은 길었다⁠. 고블린들은 배가 고팠다⁠. 막내가 태랑의 검은 배낭에서 빨간 소 그림 컵라면을 꺼내 하나씩 나눠 주었다⁠. 불을 피울 수 없어 물을 부을 수 없었고⁠, 고블린들은 마른 면을 그대로 깨물었다⁠. 바삭⁠, 바삭⁠. 열세 입이 동시에 면을 깨무는 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두 배로 돌아왔다⁠. 태랑이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고블린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천천히 깨물었다⁠. 천천히 깨무니 소리가 더 길어졌다⁠.

쇠 투구 고블린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투구 안에서 울려 소리가 종처럼 커졌다⁠. 막내가 휴대전화를 들어 채팅창을 보여 주었다⁠. 「⁠바삭 소리 ASMR 뭐임⁠」 「⁠투구 배꼽시계 ㅋㅋㅋ⁠」 「⁠긴장되는데 웃기면 반칙이지⁠」

“⁠형⁠. 무서움⁠?⁠”

“⁠응⁠.⁠”

“⁠나도⁠.⁠” 막내가 마른 면을 깨물다 말고 짐벌을 만지작거렸다⁠. 태랑이 오늘 낮에 막내 손에 쥐여 준 짐벌이었다⁠. “⁠근데 찍을 때는 안 무서움⁠. 화면 보면 안 무서움⁠.⁠”

“⁠나도 그래서 이 일 해⁠.⁠”

“⁠형은 찍을 때도 무서운 얼굴임⁠. 안경 때문에 티가 안 날 뿐⁠.⁠”

열 시 정각⁠, 입구 밖에서 음악이 터졌다⁠. 「⁠헌터 직진⁠」의 오프닝이었다⁠. 북소리와 금관 소리가 돌벽을 타고 동굴 안까지 밀려왔다⁠. 음악이 잦아들자 엄호석의 목소리가 확성기로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헌터 직진⁠」 연출⁠, 예능국장 엄호석입니다⁠.⁠”

태랑은 입구의 빛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열다섯 해 전 처음 문이 열렸을 때⁠, 우리는 헌터들 뒤에서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경기도의 폐던전 열한 곳이 오늘 밤 닫힙니다⁠. 여기 선 헌터 서른 명 가운데 스물두 명은 내일부터 일이 없습니다⁠.⁠” 호석이 잠깐 말을 멈췄다⁠. 숨소리가 확성기에 실렸다⁠. “⁠이분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끝까지 봐 주십시오⁠.⁠”

박수가 나왔다⁠. 노란 줄 너머에서 야유도 섞였다⁠. 박수와 야유가 반반이었다⁠.

*

중계차 안은 모니터 여섯 개의 빛으로 파랬다⁠. 조연출은 화면 전환 판 앞에 앉아 있었다⁠. 단추가 여섯 줄로 늘어선 판이었다⁠. 맨 오른쪽 끝에 빨간 덮개를 씌운 단추 하나가 따로 있었다⁠. 「⁠광고⁠」

엄호석이 오프닝을 마치고 중계차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무선 헤드셋을 썼다⁠. 셔츠 등판이 젖어 있었다⁠. 호석은 모니터 여섯 개를 차례로 보다가 조연출의 어깨 너머로 큐시트를 짚었다⁠.

“⁠이십이 시 사십 분⁠, 방사⁠. 우리 화면은 2번⁠. 우두머리 걸어 나오면 크레인 4번으로 넓게⁠. 헌터 진입은 1번⁠.⁠”

“⁠네⁠.⁠”

“⁠뭐가 이상하게 가면⁠, 광고⁠.⁠” 호석이 빨간 덮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조연출님이 제일 잘 알잖아요⁠.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조연출은 대답하지 않고 모니터 6번을 보았다⁠. 6번은 방송 화면이 아니었다⁠. 막내 계정의 라이브를 띄워 둔 노트북 화면이었다⁠. 캄캄한 어둠과 입구의 하얀 빛⁠. 아무도 6번을 보지 않았다⁠. 조연출은 빨대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6번 화면 속 어둠에서 바삭 소리가 났다⁠. 노트북 스피커를 줄여 두었는데도 들렸다⁠. 조연출은 웃음이 터질 뻔해서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호석이 고개를 돌렸다⁠.

“⁠6번은 뭐예요⁠?⁠”

“⁠예비 화면이요⁠.⁠”

“⁠예비는 꺼 둬요⁠. 헷갈려⁠.⁠”

조연출은 6번의 밝기만 낮췄다⁠. 끄지는 않았다⁠. 어둠 속의 바삭 소리가 낮아진 화면 밑에서 계속 이어졌다⁠.

*

열 시 사십 분⁠, 트럭 짐칸의 쇠 우리 문이 열렸다⁠.

우두머리가 우리에서 내려왔다⁠. 털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채⁠, 팔짱을 끼고 걸었다⁠. 쇠사슬은 풀려 있었다⁠. 헌터 줄 사이로 열린 길을 따라 입구로 걸었다⁠. 크레인 카메라가 머리 위에서 따라왔다⁠. 우두머리는 돌 입구의 하얀 기둥 사이에서 멈췄다⁠. 큐시트대로라면 여기서 돌아서서 헌터들을 보아야 했다⁠.

우두머리는 돌아서지 않았다⁠. 동굴 안 어둠을 보았다⁠.

어둠이 움직였다⁠. 태랑이 먼저 빛 안으로 걸어 나왔다⁠. 짐벌 대신 빈손이었다⁠. 짐벌은 막내가 들고 있었다⁠. 막내가 태랑 뒤에서 나왔고⁠, 쇠 투구 고블린이 나왔고⁠, 고블린 열하나가 차례로 나왔다⁠. 고블린 열셋이 우두머리 뒤에 섰다⁠. 아무도 브이를 그리지 않았다⁠.

노란 줄 너머에서 함성이 터졌다⁠. 함성이 산을 타고 내려갔다⁠. 막내가 할머니 휴대전화를 높이 들었다⁠. 방송사 크레인 카메라와 막내의 휴대전화가 하얀 기둥 사이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부장의 무전기가 울렸다⁠. 지부장은 헌터 줄을 한 번 돌아보았다⁠. 내일부터 일이 없는 스물둘의 얼굴이 연기 기계 옆에 늘어서 있었다⁠. 지부장은 무전기를 입에 대고 망설이지 않았다⁠.

“⁠제압⁠. 전원⁠.⁠”

방패 줄이 앞으로 나왔다⁠. 전기 막대 끝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연기 기계가 하얀 연기를 뿜었다⁠. 연기 속에서 헌터 서른이 걸어 나오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포스터와 똑같았다⁠. 다른 것은 하나였다⁠. 발치에 쓰러진 고블린이 없었다⁠.

맨 앞줄 끝의 신입 헌터가 방패를 들고 다가왔다⁠. 팔이 떨렸다⁠. 막내가 짐벌을 든 채 신입 헌터를 보았다⁠.

“⁠형⁠.⁠”

신입 헌터는 멈추지 않았다⁠. 걸음이 느려지기만 했다⁠.

중계차 문이 열렸다⁠. 엄호석이 헤드셋을 쓴 채 내렸다⁠. 연기 속으로 왼다리를 끌며 걸어왔다⁠. 헌터 줄 사이를 지나 맨 앞까지 와서⁠, 태랑 앞에서 멈췄다⁠. 둘 사이에 다섯 걸음이 남았다⁠. 연기가 둘의 발목을 감았다⁠.

“⁠길 PD⁠. 비켜요⁠. 지금 비키면 다치는 사람 없어요⁠.⁠”

“⁠지금 비키면 우두머리가 쓰러져요⁠. 정해진 때에⁠.⁠”

“⁠쓰러지고 살아요⁠. 내가 약속했잖아요⁠.⁠”

“⁠서명은요⁠?⁠”

호석의 입이 닫혔다⁠. 태랑은 조끼 안주머니에서 콜시트를 꺼내 펼쳤다⁠. 크레인 카메라가 종이로 내려왔다⁠. 막내의 짐벌도 종이로 다가왔다⁠. 「⁠시즌 7 · 촬영지 파주 7 · 22⁠:00 고블린 입장 · 22⁠:25 제압 · 연출 엄호석⁠」 연기 사이로 하얀 종이가 떨렸다⁠.

호석이 종이를 보았다⁠. 헌터 줄의 몇이 종이를 보았다⁠. 지부장이 무전기를 다시 들었다⁠.

“⁠진입해⁠. 지금⁠.⁠”

방패들이 한 걸음 더 왔다⁠. 신입 헌터의 방패 끝이 태랑의 어깨에 닿았다⁠. 우두머리가 팔짱을 풀었다⁠. 하얀 기둥 사이에서 한 걸음 나와 손바닥을 들었다⁠. 크고 초록빛인 손바닥이 조명을 가렸다⁠. 손바닥의 그림자가 헌터 서른 위로 떨어졌다⁠.

“⁠컷⁠.⁠”

헌터 줄이 멈췄다⁠.

맨 앞줄 가운데 헌터가 먼저 멈췄다⁠. 옆의 헌터도 멈췄다⁠. 둘째 줄의 나이 든 헌터 셋이 전기 막대를 내렸다⁠. 내리고 나서야 저희가 왜 내렸는지 모르는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시즌 7부터 시즌 10까지⁠, 가을마다 이 입구 앞에서 「⁠컷⁠」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었다⁠. 「⁠컷⁠」이 나오면 막대를 내리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연기 기계만 혼자 하얀 연기를 뿜었다⁠. 신입 헌터의 방패가 태랑의 어깨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노란 줄 너머 수천 명이 숨을 죽였다⁠. 레미콘 드럼이 도는 소리만 산길에서 올라왔다⁠.

노란 줄 맨 앞에서 할머니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손팻말이 무릎 위로 내려왔다⁠. 막내의 휴대전화 화면 귀퉁이에서 동시 접속자 숫자가 오백만을 넘었다⁠. 숫자는 계속 올라가는데⁠, 채팅창은 처음으로 멈춰 있었다⁠.

엄호석의 헤드셋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호석이 헤드셋 마이크를 입가로 당겼다⁠. 목소리가 낮았다⁠. 낮아서 오히려 똑똑히 들렸다⁠.

“⁠광고 넣어⁠.⁠”

중계차 안에서 조연출의 손가락이 빨간 덮개를 열었다⁠. 덮개 밑에 「⁠광고⁠」 단추가 있었다⁠. 손가락이 단추 위에 놓였다⁠. 모니터 2번에 우두머리의 손바닥이 가득 차 있었고⁠, 모니터 6번에서는 막내의 휴대전화 화면이 우두머리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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