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27자)

삼백십이 걸음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헤드셋에서 엄호석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왔다⁠.

“⁠조연출님⁠. 광고⁠.⁠”

조연출은 단추 위에 올린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단추의 오목한 자리에 꼭 맞았다⁠. 누르면 화면이 라면 광고로 넘어가고⁠, 광고가 도는 삼십 초 동안 연기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도 보지 못한다⁠.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는 조연출이 제일 잘 알았다⁠.

조연출은 빨간 덮개를 도로 닫았다⁠.

옆자리의 음향 감독이 고개를 돌렸다⁠. 마흔 넘은 남자였고⁠, 십 년째 「⁠헌터 직진⁠」의 소리를 맡은 사람이었다⁠. 조연출은 헤드셋을 한쪽 귀에서 내리고 음향 감독에게 말했다⁠.

“⁠붐 마이크⁠, 우두머리한테 내려 주세요⁠.⁠”

“⁠국장님이 광고 넣으라잖아⁠.⁠”

“⁠제가 책임질게요⁠.⁠”

“⁠신입이 무슨 책임을 져⁠?⁠”

“⁠정규직이에요⁠. 하루는 버텨요⁠.⁠” 조연출이 화면 전환 판의 2번을 눌렀다⁠. 크레인 카메라가 우두머리의 얼굴을 가득 잡았다⁠. 모니터 6번의 밝기를 다시 올렸다⁠. “⁠그리고 감독님⁠, 이 그림 아까워서 못 끊어요⁠. 감독님도 알잖아요⁠.⁠”

음향 감독은 한참 조연출을 보다가 무전기를 들었다⁠. “⁠붐⁠, 앞으로⁠. 큰 고블린⁠.⁠” 헤드셋 저편에서 호석이 다시 무언가를 말했다⁠. 조연출은 헤드셋을 마저 벗어 무릎에 내려놓았다⁠.

*

긴 장대 끝에 달린 마이크가 연기 위로 내려와 우두머리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털 뭉치 같은 마이크 덮개가 우두머리의 묶은 머리끝에 닿을 듯 흔들렸다⁠. 우두머리가 올려다보았다⁠. 막내가 짐벌을 들고 속삭였다⁠.

“⁠우두머리⁠. 마이크 왔음⁠.⁠”

우두머리가 숨을 들이켰다⁠. 내레이션의 목소리였다⁠. 산 아래까지 확성기를 타고 퍼졌다⁠.

“⁠이 입구에서⁠, 고블린은 가을마다 쓰러졌다⁠. 정해진 때에⁠. 인간들은 라면을 주었고⁠, 고블린은 받았다⁠. 쓰러지는 것을 잘하면 더 받았다⁠. 트럭에 실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리는 예순이었고⁠, 지금은 서른하나다⁠.⁠”

헌터 줄 둘째 줄의 나이 든 헌터 하나가 전기 막대를 땅에 내려놓았다⁠. 옆의 헌터가 따라 내려놓았다⁠. 막대가 흙에 닿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우두머리는⁠, 오늘도 쓰러질 수 있다⁠. 쓰러지는 것을 잘한다⁠.⁠” 우두머리가 헌터 줄을 보았다⁠. 신입 헌터의 떨리는 팔을 보았다⁠. “⁠헌터들은⁠, 내일 일이 없다고 들었다⁠. 그러면⁠, 다시 찍자⁠.⁠”

노란 줄 너머가 술렁였다⁠. 우두머리가 손바닥을 펴서 헌터 줄을 가리켰다⁠.

“⁠싸우는 척은⁠, 고블린이 더 잘한다⁠. 헌터는 들어오고⁠, 고블린은 쓰러지는 척을 하고⁠, 다시 일어난다⁠. 보는 인간들은⁠, 척인 것을 안다⁠. 알고 본다⁠. 아무도 트럭에 실리지 않는다⁠.⁠” 우두머리가 숨을 골랐다⁠. “⁠헌터의 일당은⁠, 인간들이 준다⁠. 고블린의 출연료는⁠, 땅이다⁠.⁠”

연기 기계가 마지막 연기를 뱉고 멈췄다⁠. 연기가 걷히자 헌터 서른의 얼굴이 조명 아래 드러났다⁠. 몇은 고개를 숙였고⁠, 몇은 우두머리를 똑바로 보았다⁠.

지부장이 줄 앞으로 나왔다⁠. 껌을 씹지 않았다⁠.

“⁠본부가 그런 거 허락 안 해⁠. 몬스터랑 계약이라니⁠.⁠”

“⁠너는⁠, 그때도 본부가 허락했다고 말했다⁠.⁠”

지부장의 입이 닫혔다⁠.

*

엄호석이 헤드셋을 벗었다⁠. 귀에서 빼낸 헤드셋을 손에 든 채 붐 마이크 아래로 걸어왔다⁠. 왼다리를 끌었고⁠, 걸음마다 연기 기계의 물기에 젖은 흙이 구두에 묻었다⁠. 우두머리 앞에서 멈췄다⁠. 둘 사이에 이번에는 한 걸음이 남았다⁠. 막내의 짐벌과 크레인 카메라가 둘을 한 화면에 담았다⁠.

호석은 우두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크레인 카메라를 보았다⁠.

“⁠「⁠헌터 직진⁠」 시즌 7부터 시즌 10까지⁠, 이 던전에서 찍은 토벌 장면은 연출이었습니다⁠. 고블린들은 정해진 시각에 나왔고⁠, 정해진 시각에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고블린 가운데 일부를 회수 트럭에 실었습니다⁠. 연출은 제가 했습니다⁠.⁠” 호석이 숨을 들이켰다⁠. 확성기가 숨소리까지 실어 날랐다⁠. “⁠헌터들은 시킨 대로 했습니다⁠. 시킨 사람은 저입니다⁠.⁠”

노란 줄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몇 초 뒤에 누군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 「⁠헌터 직진⁠」은 여기서 끝냅니다⁠.⁠” 호석이 신입 헌터를 보았다⁠. “⁠다음 주에 새 프로그램 첫 녹화를 합니다⁠. 헌터 서른⁠, 고블린 열셋⁠. 척인 거 다 알고 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일당은 방송사가 냅니다⁠. 오늘 받기로 한 오십 그대로⁠.⁠”

신입 헌터가 방패를 내렸다⁠. 맨 먼저였다⁠. 방패 끝이 흙에 닿았다⁠. 신입 헌터는 방패를 내려놓고⁠, 막내를 보고⁠, 아주 작게 브이를 그렸다⁠. 각도가 틀렸다⁠. 막내가 짐벌을 든 채 고개를 저었다⁠. 신입 헌터가 손가락을 조금 고쳤다⁠. 맞았다⁠.

막내의 휴대전화 화면에서 멈춰 있던 채팅창이 한꺼번에 터졌다⁠. 「⁠척인 거 알고 보는 거 찬성⁠」 「⁠헌터 형 브이 각도 교정 완료⁠」 「⁠from Japan⁠: 二人とも生きて⁠」 「⁠일당 오십 그대로래 다행이다⁠」 노란 줄 너머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내리고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야유가 섞이지 않았다⁠.

태랑이 호석 앞으로 나왔다⁠.

“⁠국장님⁠. 출연료는요⁠.⁠”

“⁠방송사 돈은 내일 아침이면 못 써요⁠. 내가 사표를 내니까⁠.⁠” 호석이 셔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잔금 얼마예요⁠?⁠”

“⁠이천팔백이요⁠. 열두 시까지⁠.⁠”

호석은 은행 앱을 열었다⁠. 화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눌렀다⁠. 태랑은 숫자를 보지 않았다⁠. 호석이 화면을 태랑에게 돌려 보였다⁠. 「⁠이체 완료 · 28⁠,000⁠,000원 · 받는 분 길태랑⁠」 보내는 사람 이름이 엄호석이었다⁠.

“⁠퇴직금 당겨 쓴 거예요⁠. 이십육 년 치⁠.⁠” 호석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계약서 줘요⁠.⁠”

태랑은 조끼 안주머니에서 콜시트를 꺼냈다⁠. 「⁠시즌 7 · 연출 엄호석⁠」이 인쇄된 면을 아래로⁠, 뒷면을 위로 해서 내밀었다⁠. 볼펜으로 한 줄을 썼다⁠. 「⁠출연 계약서⁠. 고블린 무리는 출연한다⁠. 출연료는 땅이다⁠.⁠」 우두머리가 허리를 굽혀 엄지를 흙바닥에 눌렀다가 종이에 찍었다⁠. 흙빛 엄지 지문이 번졌다⁠. 호석도 엄지에 흙을 묻혔다⁠. 손등의 흉터가 조명 아래 하얬다⁠. 두 엄지 지문이 종이 위에 나란히 남았다⁠. 뒷면의 인쇄 글씨가 지문 아래로 거꾸로 비쳤다⁠.

지부장이 호석 옆으로 왔다⁠. 껌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서 접었다 폈다 했다⁠.

“⁠너 혼자 사표 쓰면 끝이야⁠? 감사는 내가 받아⁠.⁠”

“⁠받아⁠. 나도 같이 불려 갈게⁠. 국장 아닌 사람으로⁠.⁠”

“⁠우리 애들 일당은⁠.⁠”

“⁠다음 주 첫 녹화⁠. 너도 나와⁠. 헌터 대장 역⁠.⁠” 호석이 지부장을 보았다⁠. “⁠포스터 찍을 때처럼 무릎 꿇고 앉아⁠. 옛날 사진처럼⁠.⁠”

지부장은 대답하지 않고 껌을 입에 넣었다⁠. 한참 씹다가 무전기를 들었다⁠. “⁠전원⁠, 막대 내려⁠. 철수 준비⁠.⁠” 무전기를 내리고 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릎은 안 꿇는다는 말이었다⁠.

*

열 시 오십오 분⁠, 레미콘 트럭이 펜스 앞으로 들어왔다⁠. 드럼이 돌며 회색 콘크리트가 하얀 돌 입구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덩굴 잎이 콘크리트에 덮여 하나씩 사라졌다⁠. 우두머리는 입구 앞에서 콘크리트가 차오르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다 차오르자 몸을 돌렸다⁠.

고블린 열셋이 우두머리를 따라 비탈을 올랐다⁠. 늙은 고블린 여덟이 트럭 짐칸에서 풀려나 뒤에 붙었다⁠. 노란 줄 너머 사람들이 휴대전화 불빛을 켜 들었다⁠. 불빛이 산길을 따라 깨밭까지 이어졌다⁠. 비닐하우스 문이 열리고 어린것 아홉이 굴러 나왔다⁠. 귀 큰 어린것 하나가 우두머리의 털 망토에 매달렸다⁠.

할머니는 깨밭 경계 돌 위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열한 시 오십팔 분⁠, 할머니의 화면에 이체 알림이 떴다⁠. 할머니가 자릿수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다 짚고 나서 돋보기를 벗었다⁠.

“⁠이 분 남았네⁠. 늘 늦는다더니⁠.⁠”

“⁠딱 맞췄잖아요⁠.⁠”

“⁠딱 맞춘 건 늦은 거여⁠.⁠” 할머니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이제 네 밭이다⁠. 모종 밟지 마⁠.⁠”

*

6월 마지막 주⁠, 깨밭에 깨 모종이 줄지어 자랐다⁠. 등기부에는 땅 주인이 길태랑으로 올라갔다⁠. 고블린은 땅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법무사가 말했고⁠, 태랑은 사백 평 깨밭 가장자리에 컨테이너 하나를 놓고 들어와 살았다⁠. 서울 원룸은 뺐다⁠. 휴대전화 속 「⁠길바닥 예능⁠」 채널에는 방송사 로고가 붙어 있었다⁠. 맨 위 영상은 새 프로그램의 예고편이었다⁠. 「⁠헌터 대 고블린 · 척인 거 다 알고 보는 예능⁠」 조회수가 이틀 만에 천만이었다⁠. 태랑의 이름은 예고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표에게서는 사진 한 장이 왔다⁠. 김밥 두 줄이었다⁠. 아래에 한 줄이 붙어 있었다⁠. 「⁠새 기획 있으면 와라⁠. 계약서는 이번엔 같이 읽자⁠.⁠」 막내의 계정은 팔로워 삼백만을 넘겼고⁠, 맞팔 목록 맨 위에 신입 헌터가 있었다⁠.

엄호석의 사표 기사는 예고편 아래 추천 영상에 있었다⁠. 「⁠「⁠헌터 직진⁠」 연출 시인 엄호석 국장 사표 수리 … 협회 경기 북부 지부 감사 착수⁠」 썸네일 속 호석은 회의실 벽의 포스터 열 장 앞에 서 있었다⁠. 노란 글씨는 없었다⁠.

오후에 방송사 승합차가 산길을 올라왔다⁠. 새 프로그램의 조연출이 내렸다⁠. 목에 사원증을 걸었고⁠, 입에 빨대를 물었다⁠. 「⁠고블린 출근길⁠」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신입 헌터가 방패 대신 호미를 들고 따라 내렸다⁠. 조연출이 태랑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빨대가 꽂혀 있었다⁠.

“⁠선배⁠, 땅 주인님⁠. 촬영 허가 좀⁠.⁠”

“⁠출연료는⁠?⁠”

“⁠새 프로그램은 돈으로 줘요⁠. 땅은 선배가 다 가져갔잖아요⁠.⁠” 조연출이 빨대를 씹었다⁠. “⁠창문 있는 방 구했어요⁠. 사 층이에요⁠. 발목 말고 하늘 보여요⁠.⁠”

태랑은 커피를 받아 들었다⁠. 할 말을 찾다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조연출이 웃었다⁠. 놀라도 안 놀란 얼굴이라고⁠,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경운기를 밀다 말고 태랑에게 왔다⁠. 털 망토에 흙이 들러붙어 있었다⁠.

“⁠새 프로그램은⁠, 보는 인간이 몇인가⁠?⁠”

“⁠저는 이제 몰라요⁠. 제 채널이 아니라서⁠.⁠”

“⁠그러면⁠, 출연료는 누가 정하나⁠?⁠”

“⁠우두머리님이요⁠. 땅 주인은 저지만⁠, 출연료는 처음부터 우두머리님이 정했잖아요⁠.⁠”

우두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경운기로 돌아갔다⁠.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잡이를 잡았다⁠.

밭 한가운데에서 고블린들이 고랑을 따라 깨 모종을 손보았다⁠. 쇠 투구 고블린은 투구에 깻잎을 꽂고 다녔다⁠. 어린것들은 할머니 뒤를 따라 돌을 주웠다⁠. 할머니는 경운기 손잡이를 잡았고⁠, 우두머리가 뒤에서 밀었다⁠.

태랑은 모종 사이에 쪼그려 앉아 흙을 북돋았다⁠. 흰 반소매 티가 흙투성이였고⁠,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에 깨 모종 잎이 붙어 있었다⁠. 검은 배낭은 컨테이너 문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짐벌 카메라는 태랑의 손에 없었다⁠.

막내가 고랑 끝에서 짐벌을 들고 있었다⁠. 붉은 두건을 고쳐 묶고⁠, 렌즈를 태랑에게 겨누었다⁠. 화면 귀퉁이에 빨간 녹화 불이 깜박였다⁠. 태랑은 흙 묻은 손을 들어 렌즈를 가리려다 말았다⁠. 손을 내리고⁠, 카메라 앞에서 서툴게 브이를 그렸다⁠.

“⁠형⁠. 각도 틀림⁠.⁠”

막내가 짐벌을 든 채 다가와 태랑의 손가락을 고쳐 주었다⁠. 밭 아래 비탈에서는 콘크리트로 덮인 입구 둘레를 따라 덩굴이 다시 뻗어 오르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경운기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경계 돌 위로 올라가 걸음을 셌다⁠. 하나⁠, 둘⁠, 셋⁠. 낮은 목소리가 깻대 사이로 굴러갔다⁠. 삼백십이에서 우두머리는 처음 밟은 돌 위에 멈추고⁠, 이번에는 바로 내려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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