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80자)

건의

벽에 만든 도서관 · 정이한

건의서 양식을 구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없었다.

나는 그것을 처음에 못 믿었다. 여기는 양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곳이다. 물건을 사려면 구매 신청서, 접견을 하려면 접견 신청서, 아프면 진료 신청서. 종이가 없으면 말도 안 통한다.

그런데 건의는 양식이 없었다.

“건의서 양식 주십시오.”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냅니까?”

“그냥 쓰시면 됩니다.”

나는 창구 앞에서 잠깐 서 있었다.

“…그냥이요?”

“예. 자유 서식입니다.”

여기서 자유라는 말을 듣는 일은 드물다. 그 말을 서식 앞에 붙여서 듣는 것은 더 드물다.

방에 돌아와서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양식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다.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거나, 아무도 안 쓴다는 뜻이거나.

여기서는 대개 두 번째다.

양식이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일이다. 자주 하니까 종이를 만들어 둔 것이다. 양식이 없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내가 만들면 된다.

나는 그 생각을 하고 나서 손이 좀 떨렸다. 좋아서 떨린 것이 아니라, 이십 년 동안 하던 일이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이 이상해서 떨렸다.

인쇄소에서 내가 제일 많이 한 일이 그것이다.

거래처가 오면 대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이런 거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요. 그러면 나는 종이를 꺼내서 칸을 그린다. 뭘 적으실 겁니까, 그건 누가 봅니까, 이 칸은 나중에 누가 채웁니까?

칸을 정하는 일이 인쇄가 아니다. 인쇄는 그다음이다.

그런데 스무 해 동안 나는 그것을 인쇄의 앞 단계라고만 생각했다.

2월에 나는 건의서를 짰다.

첫 판은 칸이 여덟이었다. 신청서가 여섯이니까 더 자세히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여덟 칸을 다 채우고 나서 하루 자고 다시 봤다.

여덟 칸 중에 셋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지웠다.

두 번째 판은 다섯이었다. 사흘 뒤에 보니 다섯 중 둘이 「누가 하느냐」를 두 번 묻고 있었다.

지웠다.

세 번째 판이 셋이었다.

1. 건의 내용 2. 건의 사유 3. 건의자

칸 셋을 만드는 데 삼 주가 걸렸다.

정상우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형님, 이게 다예요?”

“예.”

“삼 주 동안 이거 세 줄 만드셨어요?”

“예.”

“전에 여섯 칸짜리는 열흘 만에 채우셨잖아요.”

“채우는 거랑 만드는 거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요?”

나는 종이를 들어 보였다.

“채우는 건 남이 정한 데 넣는 거고요, 만드는 건 어디를 안 물어볼지 정하는 겁니다.”

정상우가 종이를 받아서 봤다. 한참 봤다.

“형님.”

“예.”

“이거 좀 세게 생겼는데요.”

“…세다니요.”

“모르겠는데 그냥 세 보여요. 뭔가 안 물어보는 게 많아 보여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 사람은 서류를 모르는데 서류를 정확히 봤다.

정상우가 종이를 돌려주면서 물었다.

“형님.”

“예.”

“세 번째 칸이요.”

“건의자요?”

“예. 거기 나중에 제 이름 넣어 주세요.”

나는 그를 봤다.

세 해 전에도 같은 말을 했다. 그때는 신청인 칸이었고 칸이 하나라서 못 넣었다.

“칸이 하나입니다.”

“지금도요?”

“지금도요.”

“그럼 제가 나가고 나서 넣어 주세요.”

“…나가시면 더 안 됩니다.”

“왜요?”

“여기 없는 사람 이름은 못 씁니다.”

정상우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그럼 누구 이름이 들어가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 생기면요.”

“예.”

“저한테 알려 주세요. 누군지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 약속을 지키는 데 십삼 년이 걸린다.

내기 전에 나는 그것을 한 번 보여 줬다.

야간 점호가 끝나고 세면장에 가는 십 분에, 나는 복도에서 윤재호를 기다렸다. 기다렸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그 사람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

“예.”

“한 번만 봐 주시겠습니까?”

그가 종이를 받았다. 복도 등 밑에서 봤다. 오래 안 봤다. 삼십 초쯤이었다.

“건의 사유 두 번째 줄이요.”

“예.”

“「예산 소요가 없습니다」라고 쓰셨는데.”

“예.”

“「없습니다」는 단정입니다.”

나는 그를 봤다.

“…맞는 말인데요.”

“맞는 말이라도 단정하면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하려면 담당이 붙어야 하고, 담당이 붙으면 그 담당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뭐라고 씁니까?”

“「예산 소요가 발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하고자 합니다」”

나는 그 문장을 속으로 두 번 읽었다.

길이가 두 배다. 그런데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는다. 하고자 한다는 것은 아직 안 했다는 뜻이고, 안 한 것은 틀릴 수가 없다.

“…이게 통합니까?”

“통합니다.”

“왜요?”

“읽는 사람이 책임질 게 없으니까요.”

윤재호가 종이를 돌려줬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줄을 고쳤다.

고치고 나서 물었다.

“선생님.”

“예.”

“이렇게 쓰면 누가 책임집니까?”

윤재호가 나를 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읽는 사람이 책임질 게 없으면, 그 서류는 아무도 책임을 안 지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나중에 잘못되면요.”

“잘못되면 쓴 사람이 집니다.”

“…”

“그래서 건의자 칸이 있는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종이 세 번째 칸을 봤다.

3. 건의자

세 칸 중에 셋째를 만드는 데 삼 주가 걸렸다. 나는 그것을 이름 적는 칸이라고 생각했다.

이름 적는 칸이 아니었다.

책임지는 사람을 적는 칸이었다.

내가 만든 양식인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것을 알았다.

“선생님.”

“예.”

“이 양식 제가 만들었습니다.”

“압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윤재호가 복도 저쪽을 봤다.

“건의서는 자유 서식입니다. 자유 서식으로 들어오는 게 오 년에 한 장쯤 됩니다.”

“…”

“그 한 장도 대개 줄글입니다.”

“…”

“칸을 그려서 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덟 번째 건의서는 3월 12일에 냈다.

내는 날 아침에 정상우가 물었다.

“형님, 오늘 내세요?”

“예.”

“이번엔 좀 다르죠.”

“…무엇이 다릅니까?”

“종이가 반 장이잖아요.”

나는 손에 든 것을 봤다.

여덟 해 동안 낸 것은 다 A4 한 장이었다. 이것은 반 장이다.

“작아졌네요.” 정상우가 말했다.

“…예.”

“작아지는 게 좋은 거예요?”

“모르겠습니다.”

“…”

“다만 여태 큰 것으로는 안 됐습니다.”

“임경식 씨.”

“예.”

“서류는 옳은 걸 쓰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뭘 씁니까?”

“읽는 사람이 결재할 수 있는 걸 씁니다.”

나는 그날 밤 그 문장을 관물대 안쪽에 손톱으로 새겼다. 새겨 놓고 나서 지웠다. 점검에서 걸리면 곤란해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다.

여덟 번째는 2018년 3월 5일에 냈다.

1. 건의 내용 복도 끝 유휴 공간(구 교화 자료실)을 도서 열람 용도로 1일 2시간 개방할 것을 건의합니다.

2. 건의 사유 해당 공간은 2005년 이후 미사용 상태입니다. 도서는 기증으로 확보하며 예산 소요가 없습니다. 관리는 근무 직원 입회 하에 신청인이 보조합니다(지침 제9조 제3항).

3. 건의자 2438 임경식

세 칸에 여섯 줄이다.

일곱 번 냈던 신청서는 한 장을 다 채웠다. 이것은 반 장이 남았다.

남는 자리를 나는 그냥 뒀다. 채우고 싶었는데 참았다.

회신은 3월 26일에 왔다.

삼 주다.

그때까지 제일 빨랐던 것이 일곱 주고, 제일 느렸던 것이 열다섯 주다. 삼 주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 종이를 배식차 옆에서 받았다. 근무자가 사동 앞에서 나눠 준다. 봉투가 아니라 반으로 접은 종이 그대로 준다.

나는 그것을 펴기 전에 두께를 봤다.

전에 오던 것들은 얇았다. 반려는 세 줄이면 끝나니까 얇다.

이것도 얇았다.

폈다.

건 명: 유휴 공간 도서 열람 개방 건의 결 과: 검토

두 줄이었다.

나는 그 두 줄을 읽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반려가 없었다.

사유 칸이 없었다. 지금까지 온 일곱 장에는 전부 「사 유:」라는 칸이 있었고 그 옆에 무엇이 안 되는지가 적혀 있었다. 이 종이에는 그 칸이 아예 없었다.

없다는 것은 적을 것이 없었다.

적을 것이 없다는 것은 안 된다고 안 했다.

“2438.”

근무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종이를 접지 않고 들고 있었다.

“왜 안 가십니까?”

“…예. 갑니다.”

나는 걸었다. 걸으면서 그 두 줄을 다시 읽었다. 걸으면서 종이를 읽으면 넘어질 수 있는데 그날은 안 넘어졌다.

방에 들어가서 나는 그것을 벽에 대고 폈다.

“왔어요?” 정상우가 물었다. “이번엔 뭐예요?”

“…검토랍니다.”

“검토가 뭐예요?”

“모르겠습니다.”

“반려가 아니에요?”

“반려가 아닙니다.”

“그럼 되는 거예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조태호가 일어나 앉았다.

“잠깐만. 그럼 내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방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그해 내기에는 넷이 걸었다. 안전, 인원, 예산, 그리고 화재 위험이 다시 나올 거라는 데 하나. 검토에 건 사람은 없었다.

“무효 아니야?”

“무효면 커피 돌려줘야 되는데.”

“누가 갖고 있었는데?”

“…내가.”

“너 이미 먹었잖아!”

그날 방에서는 그 문제로 삼십 분쯤 다퉜다. 아무도 도서관 이야기를 안 했다. 커피 넉 잔 이야기만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종이를 봤다.

박두식이 창가에서 나를 봤다.

“임씨.”

“예.”

“그거 안 접어?”

나는 손을 봤다. 종이를 편 채로 들고 있었다.

일곱 장은 세 번씩 접어서 관물대 틈에 넣었다. 접는 이유가 있다. 반려된 것은 숨겨야 하고, 숨기려면 작아야 한다.

이건 반려가 아니다.

“안 접겠습니다.”

“그럼 어디다 둬.”

나는 관물대를 열었다. 안쪽 문짝에는 틈이 있고, 그 틈에는 일곱 장이 들어 있다. 그 위쪽은 비어 있다. 평평한 철판이다.

나는 그 철판에 종이를 붙였다.

붙일 것이 없어서 밥풀을 썼다. 저녁 관식에서 밥알 네 개를 남겨 뒀다가 손끝으로 으깼다.

네 귀퉁이에 하나씩 붙였다.

관물대 문을 닫으면 아무도 못 본다. 열면 제일 먼저 보인다.

그날 밤에 나는 그 문을 두 번 열었다.

한 번은 자기 전에. 한 번은 새벽에.

새벽에 연 것은 그 두 줄이 아직 거기 있는지 보려고였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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