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5,073자)

열세 번째

벽에 만든 도서관 · 정이한

건의서 양식은 신청서와 다르다.

내가 만든 것이니까 내가 제일 잘 안다.

신청서는 A4 한 장이고 항목이 여섯이다. 건의서는 반 장이고 항목이 셋이다.

1. 건의 내용 2. 건의 사유 3. 건의자

여덟 해 동안 나는 이 셋을 열한 번 채웠다. 앞의 둘은 눈 감고도 쓴다.

세 번째 칸이 문제였다.

윤 교도관이 말했다. 출소자 명의 안건은 종결 처리됩니다.

나는 사 년 뒤에 나간다.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 내면 사 년 뒤에 종결된다.

다른 사람 이름이 필요하다.

조건이 셋이다.

하나. 사 년 뒤에도 여기 있어야 한다. 둘.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셋. 이 일을 맡고 싶어 해야 한다.

세 번째가 제일 어렵다.

나는 이미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형기가 십사 년이니까 첫 번째 조건에 맞는다. 글은 삼 년 전에 배웠고 지금은 나보다 편지를 자주 쓴다. 두 번째 조건에도 맞는다.

세 번째를 나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어보면 그 사람은 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못 물었다.

여기서 누가 나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거절할 자리가 없다. 밖에서는 다음에 보자고 하고 가면 되는데, 여기서는 내일도 같은 복도에서 마주친다.

그러니까 삼 년 동안 글을 가르친 사람에게 부탁을 하면,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청구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찾기로 했다.

여기서 십일 년을 하면 사람이 보인다.

삼백여든 명 중에 세 번째 조건에 맞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서 무언가를 오래 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오래 있을 사람일수록 그렇다. 오래 있을 것을 아는 사람은 시작을 안 한다.

나는 두 달 동안 열한 명을 봤다.

첫 번째는 작업장에서 만난 서른두 살이었다. 형기가 팔 년 남았다. 글씨가 좋았다.

“도서관 만드는 거 도와줄래요?”

“도서관이요?”

“창고에요.”

그가 웃었다.

“여기 책 있잖아요.”

있다. 서른두 권이다. 그중 스무 권은 법전이고 여섯 권은 종교 서적이다.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뭐가 있는데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물러났다. 이 사람은 책을 안 읽는다.

세 번째는 스물여덟이었다. 형기가 십일 년 남았다. 조건 셋 중 둘에 맞았다.

“저 글씨 잘 씁니다.”

“예.”

“근데 그거 하면 뭐 나와요?”

“나오는 건 없습니다.”

“…그럼 왜 해요?”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거 지금도 읽을 수 있잖아요.”

“여섯 권을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섯 권도 안 읽었는데요.”

다섯 번째는 마흔 살이었다. 형기가 십이 년 남았다. 책을 읽는다.

“신청서 열두 번 반려됐다면서요.”

“예.”

“열세 번째도 반려될 텐데요.”

“그럴 겁니다.”

“그럼 왜 하세요?”

나는 그 질문에 답을 준비해 뒀다. 십일 년 동안 준비했다.

“열두 번 하면서 반려 사유가 다섯 개에서 하나로 줄었습니다.”

“…네?”

“화재 위험, 위생, 공간 용도, 예산, 관리 인력. 다섯 개였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폈다.

“화재는 소화기 위치도로 없앴고, 위생은 청소 당번표로 없앴고, 용도는 십 년 비어 있는 창고라는 걸로 없앴고, 예산은 기증받는 걸로 없앴습니다.”

“그럼 하나 남았네요.”

“관리 인력입니다.”

그가 나를 봤다.

“…그게 저예요?”

“그렇게 됐으면 합니다.”

그 사람은 사흘 뒤에 거절했다.

이유는 말 안 했다. 나는 안 물었다.

거절한 뒤에 그 사람이 한 번 더 왔다.

“임 선생님.”

“예.”

“제가 왜 거절했는지 아세요?”

“…모릅니다.”

“저 나가면 여기 안 올 거예요.”

“…”

“그런데 그거 맡으면 나가서도 생각날 거 아닙니까?”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 했다.

그 사람이 가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밖에 나가서도 여기가 생각나는 사람을 나는 하나 안다.

일 년에 한 번씩 편지를 부친다. 여덟 해째다.

그 사람은 그것을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 생각을 하고 그날 밤에 잠을 잘 못 잤다.

누구한테 무언가를 맡기는 일은 그 사람 밖까지 따라간다.

열한 명을 만나면서 나는 그것을 몰랐다.

열두 번째로 온 사람이 안세중이다.

그 사람은 내가 안 물은 사람이고, 안 물은 까닭도 그것이었다.

여덟 번째는 예순셋이었다. 형기가 무기다. 그러니까 첫 번째 조건에는 제일 잘 맞는다.

“저는 안 나갑니다.”

“…예.”

“그러니까 제일 좋은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십 년 뒤에도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여기서 죽을 겁니다. 그건 사 년 뒤일 수도 있고 십 년 뒤일 수도 있어요.”

“…”

“임 선생, 오래 있는 거랑 오래 사는 건 달라요.”

나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열한 명을 다 만나고 나서 나는 아무도 못 골랐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퍼졌는지는 모른다.

여기서 소문은 배식차보다 빠르다.

3월 어느 날 작업장 쉬는 시간에 안세중이 내 옆에 앉았다.

“임 선생님.”

“예.”

“열한 명 만나셨다면서요.”

나는 사포판을 놓았다.

“…예.”

“왜 저한테는 안 물어보셨어요?”

“…형기가 기니까요.”

“그건 조건에 맞는 거잖아요.”

“…”

“임 선생님.”

“예.”

“그거 저 못 하게 하시려는 거예요, 아니면 저한테 미안하신 거예요?”

작업장이 시끄러웠다. 톱 소리와 사포 소리가 계속 났다.

“…미안합니다.”

“왜요?”

“이건 끝이 안 보이는 일입니다.”

“얼마나요?”

“십일 년 했는데 책이 여섯 권입니다.”

안세중이 웃었다.

“저 십사 년 남았는데요.”

“…”

“임 선생님 십일 년 하신 거보다 깁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 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두 번 접힌 종이였다. 사 년 전에 봤던 그 목록이다.

“이거 아직 갖고 있어요.”

“…”

“그때는 스물세 줄이었는데요.”

그가 폈다.

줄이 늘어 있었다. 종이 뒷면까지 넘어가 있었다.

“지금 몇 줄입니까?”

“예순한 줄이요.”

나는 그 종이를 봤다.

앞의 스물세 줄은 삐뚤었다. 뒤로 갈수록 글씨가 반듯해졌다. 마지막 줄은 나보다 잘 썼다.

그리고 제목이 적힌 것이 늘어 있었다. 처음에는 넷이었다.

“제목 아는 게 몇 개입니까?”

“…열아홉 개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편지로 물어봤어요. 어머니한테요.”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 아무 말도 못 했다.

“제 이름을 빌려 드릴까요?”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건의서요. 이름 필요하시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가 목록을 접었다.

두 번 접었다.

“여기 소문 빨라요.”

쓰기 전에 나는 한 가지를 더 했다.

“안세중 씨.”

“예.”

“이름을 빌려주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 이름 적으시는 거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종이에 세 줄을 썼다.

1. 회신은 건의자에게 옵니다. 반려도 건의자에게 옵니다. 2. 문제가 생기면 건의자가 불려 갑니다. 3. 제가 나가면 건의자가 혼자 합니다.

그가 그것을 읽었다.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아직 읽는 것이 느리다.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느린 사람이다.

“세 번째요.”

“예.”

“혼자 하는 게 언제부터예요?”

“사 년 뒤입니다.”

“그때 저 몇 살이에요?”

나는 세었다.

“…서른입니다.”

“임 선생님은 그거 몇 살에 시작하셨어요?”

“마흔입니다.”

안세중이 웃었다.

“그럼 제가 열 살 빠르네요.”

“…”

“열 살 빠르면 열 살 오래 하겠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종이를 접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예.”

“하기 싫어지면 그만두십시오.”

“…”

“그만두는 것도 인계입니다. 다음 사람한테 넘기고 그만두면 됩니다.”

안세중이 나를 봤다.

“임 선생님은 그만두고 싶으신 적 없으셨어요?”

“있었습니다.”

“언제요?”

“여덟 해 전에 여덟 달 동안 아무것도 안 썼습니다.”

“왜 다시 쓰셨어요?”

그 사람이 손바닥을 폈다.

“…누가 방법을 알려 줬습니다.”

“누구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에 열세 번째를 썼다.

건의자 칸에 다른 사람 이름을 적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세 글자를 쓰는 데 나는 십 분이 걸렸다.

넉 달 걸려서 자기 이름 쓰는 법을 배운 사람의 이름이다.

쓰고 나서 나는 그것을 지웠다.

지우고 다시 썼다.

세 번 그랬다.

세 번째에야 손이 안 떨렸다.

건의 내용과 사유는 열두 번째와 거의 같게 썼다. 한 줄만 바꿨다.

※ 본 건의는 건의자가 계속 관리할 수 있는 기간(잔여 형기 14년)을 전제로 합니다.

이 줄을 넣은 이유는 하나다.

십일 년 동안 나에게 온 사유 중에 제일 아픈 것은 관리 인력 부재였다.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여기 사람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말을 내가 먼저 했다.

십사 년이라고.

다음 날 아침에 나는 그 종이를 안세중에게 줬다.

“읽어 보십시오.”

그가 읽었다. 다 읽는 데 십 분이 걸렸다.

“임 선생님.”

“예.”

“여기 제 이름 밑에 뭐 적혀 있어요?”

“잔여 형기입니다.”

“…제 형기가 여기 왜 적혀요?”

“이 일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적은 겁니다.”

안세중이 그 줄을 한참 봤다.

“…이상하네요.”

“무엇이요?”

“제 형기가 여기서는 좋은 거네요.”

십사 년은 그 사람이 잃은 시간이다. 그것이 서류에서는 자격이 된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 종이를 낸 날 그 사람이 처음으로 창고 문 앞에 서 봤다.

열람 시간이 아니어서 못 들어갔다. 문 앞에 서서 잠긴 문을 봤다.

“여기예요?”

“여깁니다.”

“안에 뭐 있어요?”

“서가 다섯 칸하고 책 여섯 권입니다.”

“…여섯 권이요?”

“예.”

그가 웃었다.

“제 목록이 예순한 줄인데요.”

“압니다.”

“그럼 쉰다섯 권 모자라네요.”

나는 그 계산을 그때 처음 들었다.

십일 년 동안 나는 백열다섯 권을 세었다. 서가가 다섯 칸이고 칸마다 스물세 권이니까 백열다섯이다.

그것은 서가의 숫자다.

그날 처음으로 사람의 숫자가 나왔다.

쉰다섯 권.

한 사람이 읽고 싶은 것에서 지금 있는 것을 뺀 수다.

1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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