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07자) · 버전 칠

서명

오늘은 여덟 정거장을 걸었다 · 도경

퇴사 스무닷새째 오전, 흐림. 성하구청 일 층 로비. 한석이 먼저 와 있었다. 회색 점퍼 대신 흰 셔츠. 넥타이는 없었다. 삼 년 전 가방과 넥타이를 내려놓은 사람이 셔츠만 다시 꺼내 입은 모양새였다. 손에 서류 봉투.

그 앞에 양복 둘이 서 있었다. 대성개발 법무팀. 둘 다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고, 둘 다 구두 굽이 반짝였다. 구청 로비 대리석 바닥에서 그 굽 소리가 유난히 컸다. 한 사람이 한석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한석 씨. 이천이십삼 년 성하보행교 보행량 조사표, 본인 서명 맞으시죠. 환산 계수 칸 공란. 이 조사표 때문에 저희 회사가 잘못된 편익을 계산했습니다. 저희는 피해자입니다. 오늘 구청에 뭘 제출하시든, 저희는 본인을 허위 조사로 고발할 겁니다. 용역 협회에도 통보하고요. 조사원 자격 영구 박탈입니다.”

한석은 서류를 받지 않았다. 양복 사이로 나를 봤다.

“재우 씨, 들었어요? 제가 피해를 줬대요. 대성한테.”

“들었습니다.”

한석이 웃었다. 그리고 양복에게 말했다.

“그 칸, 비우라고 한 사람 이름도 제가 적어 왔어요. 우리 팀장. 그 팀장한테 전화한 발주처 담당 이름도요. 팀장이 삼 년 전에 저한테 보여 줬거든요. 문자. 계수 칸 비워 주세요, 대성 개발사업팀. 저 그거 찍어 뒀어요. 서랍에 있었어요.”

양복 둘이 서로를 봤다. 한 사람이 휴대폰을 꺼내 로비 구석으로 갔다.

한석은 도시정비과 민원 창구로 걸어갔다. 남기선 주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석은 봉투를 열어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원본 조사표 사진. 환산 계수 칸에 볼펜으로 적힌 육 점 이. 그 위에 두 줄 그어 지운 흔적. 팀장이 받은 문자 사진. 그리고 한 장, 오늘 아침 한석이 직접 쓴 진술서.

“제가 셌어요. 비 오는 두 시간에 사십일 명. 그건 진짜예요. 그걸 하루로 바꾸는 계수를 제가 적었고, 지우라고 해서 지웠어요. 서명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벌받을게요. 대신 그 사십일, 이제 쓰지 마세요.”

남 주무관은 종이 세 장을 오래 봤다. 책상 위 서류 더미 꼭대기의 크레파스 그림이 창밖 바람에 한 번 들썩였다. 다리 그림이었다. 난간에 매달린 아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자기 서랍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구청 재조사 결과. 어제 나왔다고 했다. 평일 하루 평균 이백육십삼 명. 주말 백팔십팔 명. 비 온 날 백이십구 명.

“어르신 숫자하고 거의 같네요. 이백오십.”

남 주무관은 넥타이를 한 번 만졌다.

“보행교 철거는 재정비촉진계획 변경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존치로. 편익 재산정 요청도 대성에 공문으로 보낼 거고요. 한석 씨 진술서는 감사실로 넘어갑니다. 저는 막을 수 없어요.”

“알아요.”

한석은 로비로 돌아 나왔다. 법무팀 양복은 없었다. 한석은 로비 벤치에 앉아 한참 자기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옆 자판기에서 캔 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그 손에 쥐여 주었다. 따뜻한 걸로. 캔이 손 안에서 조금 떨리다가 멎었다.

“삼 년 동안 저 칸 하나 들고 있었어요. 내려놓으니까 손이 떨리네요.”

“가벼워서 그럴 겁니다.”

“재우 씨는 뭘 내려놓을 거예요.”

나는 가방에서 외장 하드를 꺼냈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 개인 노트북에서 옮겨 둔 것. 회사 파일이 아니었다. 내 작업 기록이었다. 성하1구역 사업성 분석 초안, 버전 일부터 십사까지. 버전 칠에는 영업손실 가정이 사십이었다. 셀 메모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업계 평균 적용. 상인 실태 현장 확인 필요. 작성자 재우. 버전 팔에서 칠십으로 바뀌었다. 메모도 바뀌었다. 업계 평균 수준, 재검토 불요. 그 사이 하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기억한다. 윤 상무가 칠십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물은 날 아침, 내가 사십을 칠십으로 바꿨다. 묻기 전에. 물을 줄 알고.

나는 그 파일들을 한석에게 먼저 보여 주었다. 로비 벤치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버전 칠의 사십, 버전 팔의 칠십. 한석은 두 셀을 번갈아 봤다.

“재우 씨도 칸을 비웠네요. 사십을 지우고.”

“네. 누가 시키기 전에.”

“그게 더 나빠요.”

“압니다.”

한석은 노트북을 덮어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래도 내려놓으세요. 떨리는 거 같이 떨어요.”

나는 그 하드를 남 주무관에게 넘겼다. 버전 칠과 버전 팔, 그리고 버전 십사. 세 파일. 공문과 함께.

“영업비밀 누설로 고소당하실 수도 있어요.”

“내용증명 받았습니다.”

그날 오후 대성개발 성하1구역 현장사무소 앞에서 윤 상무를 만났다. 사무소 유리문의 현수막이 반쯤 떼어져 있었다. 안에서 직원들이 상자를 싸고 있었다. 현장사무소를 구청 근처로 옮긴다고 했다. 윤 상무는 넥타이를 다시 매고 있었다. 매듭이 조금 삐뚤었다. 십일 년 동안 한 번도 삐뚤어진 적 없던 매듭이었다. 명찰의 직함이 달랐다. 상무가 아니라 이사대우. 강등이었다.

“재우야. 네 하드 파일, 대표님한테 벌써 올라갔다. 버전 칠. 사십. 네가 사십을 칠십으로 바꾼 날짜가 찍혀 있더라. 나한테 묻기 하루 전 날짜로.”

“네.”

“그 파일 때문에 나는 칠십 결재한 사람이 됐고, 너는 칠십 만든 사람이 됐어. 둘 다 됐어.”

윤 상무는 사무소 유리문에 등을 기댔다. 병원 복도에서처럼.

“대표님은 너 고소 계속 간다. 퇴직금 가압류 신청 들어갔고. 나는 이제 막을 힘이 없다. 이사대우라서.”

“알겠습니다.”

“재우야. 너는 걷기라도 하지. 나는 삼백 명 태우고 달려야 돼. 브레이크 없는 차야, 이 회사는.”

나는 그를 봤다. 십일 년 동안 내 결재란 위에 있던 이름. 쉬고 와라, 네 자리 비워 둘게, 하던 사람.

“상무님. 다리 건너 보셨습니까. 아침 여덟 시 반에.”

윤 상무가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길었다.

“어제 건넜다. 여덟 시 반. 애들이 난간에 매달려서 물 보더라. 영감님 없는 자리에 방석 하나 놓여 있고. 한 애가 나한테 물었어. 아저씨 여기 처음 와요? 그래서 처음이라고 했지. 그 애가 그러더라. 여기 할아버지가 떨어진다, 이놈들아, 해 줘야 하는데 오늘은 없어요.”

그는 유리문에서 등을 뗐다.

“그래서 내가 해 줬다. 떨어진다, 이놈들아. 애들이 까르르 웃고 도망가더라. 이백육십삼 명 중에 서른 명쯤 됐을 거다.”

그는 상자를 하나 들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한마디를 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이백육십삼, 편익 재산정에 내가 넣을게. 곱하기는 내가 한다.”

해 질 무렵 다리에 갔다. 문 영감이 퇴원해 있었다. 깁스 한 손을 무릎에 올리고, 옛 방석 위에 앉아서. 조사원들의 파란 조끼는 없었다. 재조사가 끝났으니까. 대신 다리 난간에 종이 한 장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구청 도시정비과. 보행량 재조사 결과 안내. 평일 이백육십삼. 누가 그 아래에 볼펜으로 적어 놓았다. 할아버지 이백오십 맞음. 아이 글씨였다.

“어르신, 존치 안건으로 올린대요.”

“존치가 뭐요.”

“남긴다는 거요.”

문 영감은 강을 봤다. 한참.

“다리는 남고, 극장은 헐리고.”

“극장은 회사 땅이라서요.”

“알아. 극장이 헐리면 여기서 지붕이 안 보이겠지. 지붕이 없으니까.”

그는 깁스 한 손으로 방석 끝을 두드렸다.

“그래도 여기는 남는구먼. 보이는 데 있으려고 오는 자리가.”

학교 끝난 아이들이 우르르 건너왔다. 몇이 난간에 매달렸다. 문 영감이 깁스 손을 들어 올렸다. 「떨어진다, 이놈들아!」 아이 하나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팔 왜 그래요!」 「넘어졌다!」 「할아버지도 떨어졌어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도망갔다. 문 영감도 웃었다.

한석에게서 문자가 왔다. 용역 협회에서 자격 정지 통보가 왔다고. 영구는 아니고 삼 년. 「삼 년이면 딱 맞네요. 육교에 서 있던 햇수만큼.」 그리고 한 줄 더. 「대리는 계속해요. 밤에 차 안에서 손님들이 웃으면 세요. 오늘 둘.」

탁 반장에 대해서는 남 주무관이 전화로 알려 주었다. 특수손괴, 폭행치상으로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고. 비서실 지시 여부는 경찰이 수사 중이라고. 그 말을 전하자 문 영감이 한참 말이 없다가 말했다. 「그 애 어머니 산소가 어딘지 알아봐 주쇼. 한번 가 봐야겠소. 그 애 기저귀 갈아 준 얘기, 그 양반한테는 해 줘야지.」

저녁에 극장 앞으로 갔다. 매표소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누나와 매형이 있었다. 매형이 조경 공사용 잭을 가져와서 기울어진 매표소 밑동을 들어 올리고, 수평계를 대고, 받침 블록을 괴어 놓았다. 매형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기운 나무 세우는 거랑 똑같아. 뿌리 쪽을 먼저 잡아야 돼.」 누나는 창구 유리의 금 간 자리에 투명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한 줄, 대각선으로, 끝에서 끝까지. 테이프를 붙이니 금이 더 잘 보였다.

“누나, 그거 붙이면 더 보여.”

“보이라고 붙이는 거야. 여기 금 갔었다고.”

오순자 사장님은 그날 오후 대성 쪽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영업손실 보상 가정이 오십으로 바뀌면 조기 이주 협약도 다시 계산해 준다고. 칠천이 구천쯤 된다고. 사장님은 그 전화를 받고 한참 앉아 있다가 떡집에 갔다고 했다. 떡집 사장님한테 먼저 말하려고. 「이번엔 따로 안 받아. 같이 받아. 시장 사람들 다 오십으로 다시 계산해 달라고 해. 나 혼자 구천 받으면 또 셔터 내려가.」

사장님이 반찬 통을 들고 와서 매형에게 내밀었다. 멸치볶음 한 통. 반 통이 아니라 한 통. 「가족이면 한 통이지.」 매형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 받아 들었다. 누나가 웃었다. 누나가 웃는 걸 나는 몇 년 만에 봤다. 소리 내서.

그날 밤 노트에 적었다.

9월 25일 · 구청 · 현장사무소 · 극장 앞 한석 · 서명한 칸을 내려놓음 · 손이 떨림 · 자격 정지 삼 년 보행교 · 평일 이백육십삼 · 존치 안건 버전 칠 · 사십 · 버전 팔 · 칠십 · 바꾼 사람 나 · 묻기 하루 전 윤 이사대우 · 여덟 시 반 · 떨어진다, 이놈들아 매표소 · 매형이 세움 · 누나가 금을 보이게 함 순자 · 이번엔 같이 받아 문 영감 · 깁스 · 떨어진다, 이놈들아 고소 · 퇴직금 가압류

마지막 줄을 적고 나서 나는 볼펜을 한참 쥐고 있었다. 퇴직금은 십일 년 치였다. 그 돈으로 여덟 정거장을 몇 번 걸을 수 있는지 계산하려다 그만뒀다. 걷는 데는 돈이 안 든다. 콩자반 값만 든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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