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001자) · 스무 가지 반찬

원가표

오늘은 여덟 정거장을 걸었다 · 도경

퇴사 열여드레째. 아침에 시장까지만 걸었다. 반찬가게 진열대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사흘 전 트럭에서 도로 내린 그대로. 오순자 사장님이 내 코를 먼저 봤다.

“코피 총각, 코 가라앉았네. 오늘은 어디 가.”

“전 회사 상무님이 점심 사 주신대요.”

사장님이 주걱을 멈췄다.

“밥 사는 사람 조심해. 우리 시장에 부동산 사람들 처음 왔을 때도 다 밥부터 샀어. 한정식. 밥 먹고 나면 사람이 순해져. 순해지면 도장 찍어. 그러니까 숟가락 들기 전에 할 말 다 해. 알았지. 숟가락 들면 끝이야.”

사장님은 우엉조림 반 통을 싸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머리 쓰는 날엔 우엉이야. 씹으면 정신 들어.”

퇴사 열여드레째. 윤 상무가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회사 근처 한정식집. 십일 년 동안 분기마다 한 번씩 그가 원가팀을 데리고 가던 곳이다. 나는 여덟 정거장을 걸어서 가지 않았다. 지하철을 탔다. 십육 분. 걸으면 두 시간 십 분 걸리는 거리가 지하철로는 십육 분이었다. 그 십육 분 동안 창밖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는 창밖이 없다. 십일 년 동안 나는 창밖이 없는 길로 출근했다.

한정식집 마당에는 소나무 분재가 줄지어 있었다. 가지마다 철사가 감겨 있었다. 철사가 감긴 방향대로 가지가 휘어 자라고 있었다. 방은 늘 쓰던 안쪽 방이었다. 윤 상무가 먼저 와 있었다. 반찬이 스무 가지 깔려 있었다. 반찬이 스무 가지인 상 앞에서 나는 순자네 반찬 진열대를 떠올렸다. 여기 반찬은 전부 한 입 거리로 작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반 통이 아니라 한 입.

“코는 괜찮냐.”

그가 내 코를 한참 봤다. 걱정하는 눈이었다.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오늘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탁이는 현장에서 뺐다. 다른 구역으로 돌렸어.”

“다른 구역에도 반찬가게가 있을 겁니다.”

윤 상무는 웃지 않았다. 수저를 들지 않고 서류 봉투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두꺼웠다.

“밥 먹기 전에 이거부터 보자. 먹고 나서 보면 체하니까.”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출력물이었다. 성하1구역_사업성_v14. 내가 만든 파일. 보상 산정표 세 번째 시트, 영업손실 보상 가정. 칠십 퍼센트. 셀 옆에 메모가 달려 있었다. 메모 작성자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내 이름이었다. 메모 내용. 업계 평균 수준. 재검토 불요.

여섯 번째 시트, 보행교 철거 편익. 일평균 사십일 명. 메모. 교통영향평가 공식 수치 적용. 현장 확인 불요. 작성자, 내 이름.

맨 뒤 시트, 조기 이주 인센티브. 결속도 높은 상가군 우선 제안. 이탈 효과 기대. 작성자, 내 이름.

“다 네 글씨야. 파일 속성에도 네 이름만 있어. 최종 수정자도 너고.”

윤 상무는 출력물을 한 장씩 넘겨 내 앞으로 밀었다.

“재우야. 모레 주민 공청회 있다며. 구청 민원실에서 네 이름으로 발언 신청 들어왔다고 연락 왔다. 거기서 사십일이 틀렸다고, 칠십이 틀렸다고 말할 거지.”

“네.”

“그럼 우리는 이걸 낼 거야. 공청회 자료로. 사업성 분석 담당자 본인이 이렇게 판단했다. 회사는 담당자 판단을 믿고 결재했다. 담당자가 퇴사 후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영업비밀 누설로 고소도 할 거고. 네가 공청회에서 말하는 숫자는 다 회사 자료니까.”

나는 출력물을 봤다. 내 이름이 여섯 번 인쇄돼 있었다. 나는 첫 번째 메모를 소리 내어 읽었다. 업계 평균 수준. 재검토 불요. 내 목소리로 들으니 낯설었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한 번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소리 내어 읽었으면 그 자리에서 지웠을 것이다.

“제가 쓴 거 맞습니다.”

“상무님이 칠십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물으셨습니다.”

“물었지.”

“그리고 제가 업계 평균이라고 하니까, 그럼 됐다고 하셨습니다. 업계 평균이 사십인 거 아셨잖습니까?”

윤 상무는 수저를 들었다.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떴다. 천천히 삼켰다.

“알았지. 그래서 물은 거야. 너 스스로 고치라고. 안 고치더라. 그래서 결재했어. 재우야, 나는 네가 그 칸에 뭘 넣든 결재할 수 있어. 네가 사십을 넣었으면 사업성이 안 나왔을 거고, 이사회에서 이 사업은 접혔을 거고, 우리 회사는 그해 적자를 봤을 거고, 삼백 명 중에 오십 명쯤 나갔겠지. 그것도 결재할 수 있었어. 네가 칠십을 넣었어.”

“제가 칠십을 넣은 건 상무님이 원하시는 걸 알아서였습니다.”

“그래. 그게 네 일이었어. 윗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고 숫자로 만들어 오는 거. 잘했어. 십일 년 동안.”

그 말은 칭찬처럼 들렸다. 칭찬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윤 상무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재우야. 제안 하나 할게. 공청회 가지 마. 대신 다음 달부터 돌아와. 차장으로. 성하1구역 보상 재산정 네가 맡아. 영업손실 가정 칠십에서 오십으로 낮춰. 순자 사장님 같은 분들 보상이 좀 늘어나게. 보행교는 못 살려. 그건 교통 편익이 사업성의 뼈대야. 대신 극장 매표소 영감님은 협의 보상으로 넉넉히 드리자. 네가 직접 가서.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거 절반은 되잖아. 공청회 가서 다 날리는 것보다.”

나는 그 제안을 계산했다. 계산이 빨랐다. 십일 년 동안 해 온 일이니까. 칠십에서 오십이면 시장 상인 보상이 평균 삼십 퍼센트 늘어난다. 매표소 한 평은 두 배까지 줄 수 있다. 보행교는 사라진다. 아이들이 매달려 물을 보는 다리는 왕복 사 차로가 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창밖이 없는 길로 출근한다.

절반. 윤 상무 말이 맞았다. 절반은 된다.

“다리는요.”

“다리는 안 돼.”

“하루 이백오십 명입니다. 사십일이 아니라.”

“누가 그래.”

“문 영감님이 이십일 년 앉아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조사원이 원래 계수를 넣으면 그렇게 나온다고 했습니다.”

윤 상무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조사원을 만났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 상무는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사진이었다. 육교 위, 나와 한석. 탁 반장 쪽 사람이 찍은 것.

“이 사람이구나. 재우야, 이 사람은 서명했어. 계수 칸 비우고. 공청회에서 이 사람이 입 열면 허위 조사 공범이야. 이 사람 인생은 누가 책임져.”

그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석의 문자가 떠올랐다. 있다는 말이에요. 드린다는 말은 아니에요.

“생각할 시간 줄게. 모레 오전까지.”

윤 상무는 계산서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반찬 스무 가지 가운데 우리가 손댄 것은 된장국 한 숟가락뿐이었다. 그가 방문을 열다가 돌아봤다.

“그리고 재우야, 네 누나. 매형이 대성 협력사 다니지. 대성조경. 그 회사 성하1구역 조경 공사 들어가 있어. 알고 있으라고 하는 말이야. 협박 아니야.”

그는 나갔다. 협박 아니라는 말이 방에 남았다. 스무 가지 반찬 위에. 나는 한참 앉아 있다가 된장국을 한 숟가락 더 떴다. 식어 있었다.

한정식집을 나와 지하철역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버스를 탔다. 창밖이 있는 쪽으로. 공원 정류장에서 내려 벤치에 앉았다. 운동기구 앞에서 아주머니들이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가방 속 우엉조림을 꺼내 반을 먹었다. 씹으니 정말 정신이 들었다. 사장님 말은 대개 맞았다. 숟가락 들기 전에 할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된장국 한 숟가락. 그래도 도장은 안 찍었다.

그날 오후 누나가 전화했다. 매형이 회사에서 얘기를 들었다고. 성하1구역에 문제가 생기면 조경 공사가 미뤄지고, 미뤄지면 협력사는 하청 대금을 못 받는다고.

“재우야. 너 공청회 나간다며. 나가지 마. 우리 집 대출 이자가 한 달에 이백이야. 형부 월급이 석 달 밀리면 우리 애들 학원 끊어야 돼.”

“누나.”

“네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나는 말리지 않았어. 너 힘들어 보였으니까. 근데 이건 다르잖아. 네가 만든 걸 네가 부수는 거잖아. 왜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 식구가 다쳐야 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나 목소리가 떨렸다. 누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울었다. 그때 누나는 조문객 신발을 정리하고, 육개장 그릇 수를 세고, 부의금 봉투를 장부에 옮겨 적었다. 우리 집에서 세는 손은 원래 누나였다.

“누나. 그 사람들 이름 알아. 순자, 기춘, 한석. 그 사람들도 누구 식구야.”

“알아. 근데 우리 애들 이름은 네가 더 잘 알잖아.”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 화면에 누나 이름이 한참 떠 있다가 꺼졌다. 조카들 사진이 배경 화면으로 돌아왔다. 작년 설에 찍은 것. 큰애가 내 무릎에 앉아 있고, 작은애가 내 안경을 쓰고 있다.

곧 한석에게서 문자가 왔다. 「모레 공청회 가세요? 저는 못 가요. 대리 콜이 그 시간에 제일 많아요.」 한 줄이 더 왔다. 「거짓말이에요. 무서워서요.」 나는 답장을 썼다. 「저도 무섭습니다.」 보내고 나서 알았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한 건 처음이었다. 회사에서는 무섭다는 말을 하면 숫자가 약해 보였다.

나는 다리에 가서 문 영감 옆에 앉았다. 해가 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영감도 묻지 않았다. 해가 강물에 붙었다가 떨어질 무렵 문 영감이 말했다.

“오늘 얼굴이 원가표 같소.”

“원가표가 어떤 얼굴인데요.”

“칸이 너무 많은 얼굴.”

나는 웃으려다 못 웃었다. 문 영감이 방석 끝을 두드렸다. 옛 방석. 강에 빠졌다 건진.

“할 걸 정했소?”

“반쯤요.”

“반 통이구먼.”

문 영감은 그 말을 하고 혼자 웃었다. 그러다 매표소 열쇠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새 자물쇠 열쇠.

“시행사가 오늘 또 왔소. 협의 보상 두 배 준대. 두 배면 내가 이십일 년 동안 여기 앉아서 번 돈보다 많아. 근데 나는 이 한 평 팔면 앉을 데가 없어.”

“두 배면 다른 데 앉으실 수 있잖아요.”

“다른 데서는 극장 지붕이 안 보여.”

문 영감은 열쇠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도 칸이 많으면 하나만 골라 봐. 앉을 데 하나.”

집에 와서 노트를 폈다. 쓰기 전에 오래 앉아 있었다.

9월 18일 · 지하철 십육 분 · 창밖 없음 원가표 · 내 이름 여섯 번 제안 · 차장 · 칠십을 오십으로 · 다리는 안 됨 · 절반 누나 · 이자 이백 · 애들 학원 문 영감 · 원가표 같은 얼굴

그 아래에 두 줄을 적고 하나를 지웠다. 지운 줄은 이것이었다. 돌아간다. 남긴 줄은 이것이었다. 모레 공청회에서 내 이름부터 읽는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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