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04자) · 주걱

반 통

오늘은 여덟 정거장을 걸었다 · 도경

퇴사 열나흘째에는 걷지 않았다. 다리까지 버스를 탔다. 여섯 정거장, 십일 분. 걸으면 한 시간 십 분이다. 무릎 때문이 아니었다. 육교에서 한석이 한 말 때문이었다. 삼 년. 나는 그 숫자가 무서웠다. 삼 년 동안 매일 육교에 서서 차를 세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알았다. 무서운 건 한석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될까 봐였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한석 잘못이 아니었다.

다리에서 문 영감 옆에 앉았다.

“어르신, 여기 계속 앉아도 되겠습니까. 매일 한 시간쯤.”

“여기 내 자리 아니오. 앉고 싶으면 앉으쇼.”

앉아 있는 것은 걷는 것보다 어려웠다. 걸으면 몸이 뭘 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간다. 앉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 첫 삼십 분은 휴대폰을 봤다. 그다음 삼십 분은 안 봤다. 한 시간쯤 지나니까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다섯이 나를 봤다. 셋은 그냥 지나갔고, 하나는 두 번 봤고, 하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사람은 육십 대 여자였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이십일 년 동안 뭘 보셨어요.”

“사람 지나가는 거. 근데 아는 사람이 늘어요. 매일 지나가는 사람은 얼굴을 알게 되지.”

“인사하세요?”

“안 하오.”

“그럼 아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치면 아는 게 뭐요. 당신도 이제 내가 아는 사람이오. 열 번 봤으니까.”

퇴사 열닷새째. 시장 입구에 일 톤 트럭 두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아침 아홉 시 이십 분. 순자네 반찬 앞에 검은 조끼 여섯이 서 있었다. 성하1구역 현장 안전 관리. 그 가운데 탁 반장. 트럭 짐칸에 반찬 진열대가 거꾸로 실려 있었다. 스테인리스 반찬 통들이 짐칸 바닥에서 덜그럭거렸다. 콩자반 통이 옆으로 누워 간장이 흘러나왔다. 짐칸 틈으로 간장이 떨어져 아스팔트에 검은 점을 찍었다.

오순자 사장님은 가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로. 주걱을 쥔 채로. 아무 말도 안 했다. 주걱 끝에서 콩자반 간장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 옆 가게 사람들이 문을 반쯤 내리고 틈으로 보고 있었다. 건어물 가게, 떡집, 신발 가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탁 반장이 나를 봤다. 다리에서 본 얼굴. 휴대폰으로 찍어 간 얼굴.

“또 지나가는 분이시네. 이사 도와드리는 거예요. 사장님이 조기 이주 협약에 도장 찍으셨거든요. 시월 일 일까지 비우기로. 우리가 좀 일찍 와서 도와드리는 거고.”

나는 사장님을 봤다. 사장님이 주걱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나를 보지 않았다.

“오늘은 구월 십오 일입니다. 시월 일 일까지 보름 남았습니다.”

“빨리 하면 좋잖아요. 이사 비용도 회사가 대고.”

“본인이 오늘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탁 반장은 대답하지 않고 짐칸에 올라가 반찬 통 하나를 더 받아 실었다. 받아 싣는 손이 거칠었다. 통 뚜껑이 열렸다. 멸치볶음이 짐칸 바닥에 쏟아졌다.

시장 골목에 간장 냄새가 퍼졌다. 짠 냄새. 삼십일 년 동안 이 가게 앞을 지나간 사람들이 맡았을 냄새가 아스팔트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떡집 사장님이 셔터 틈에서 소리쳤다. 「순자 형님, 도장 찍었다며! 우리한테 한마디도 없이!」 다른 셔터 틈에서도 소리가 났다. 「혼자 살겠다고 먼저 받아 갔대!」 사장님 어깨가 움찔했다.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말들이 탁 반장이 오늘 여기 온 이유였다. 나는 그걸 알았다. 윤 상무가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따로따로. 한 집이 먼저 나가면 나머지가 서로를 의심한다. 의심하는 동안 버티는 힘이 빠진다. 보상 산정표 맨 뒤 시트에 내가 적어 둔 주석이 있었다. 조기 이주 인센티브는 구역 내 결속도가 높은 상가군에 우선 제안할 것. 이탈 효과 기대. 이탈 효과. 그게 이 소리였다. 셔터 틈에서 새어 나오는, 이웃이 이웃에게 하는 소리.

나는 트럭 뒤에 섰다. 짐칸 문 앞에.

“내려 놓으세요. 본인 동의 없이 기한 전에 물건을 빼는 건 협약 위반입니다. 협약서 제육조. 이주 일정은 이주자가 정한다.”

“당신이 협약서를 어떻게 알아.”

“제가 그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탁 반장이 짐칸에서 뛰어내렸다. 내 앞에 섰다. 먼지와 담배 냄새.

“상무님이 그러더라. 당신 원래 우리 편이었다고. 편 바꾸니까 좋아?”

“편 없습니다. 반찬 통 내려놓으세요.”

탁 반장이 웃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쳤다. 주먹이 아니었다. 손바닥이었다. 그런데 무거웠다. 코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다. 나는 트럭 범퍼에 등을 부딪쳤다. 범퍼가 허리에 박혔다. 입안에 쇠 맛이 났다. 귀가 잠깐 멍했다. 시장 골목의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그때 플라스틱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순자 사장님이 일어서 있었다. 주걱을 쥐고. 콩자반을 뒤적이던, 내 팔뚝만 한 나무 주걱. 사장님은 그 주걱으로 탁 반장의 어깨를 내리쳤다. 한 번. 딱 소리가 시장 골목 끝까지 갔다.

“탁씨네 막내! 너 어릴 때 우리 가게 앞에서 멸치 훔쳐 먹던 거 내가 다 봐줬어! 그 손으로 우리 손님을 때려?”

탁 반장이 어깨를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붉어졌다. 조끼 입은 다섯이 웃음을 참았다. 하나는 못 참고 웃었다. 탁 반장이 그 사람을 노려봤다.

“아줌마, 이거 폭행이에요.”

“그래 폭행이다! 신고해! 나도 할 거야! 이 총각 코피 난 거 사진 찍어!”

떡집 셔터가 올라갔다. 떡집 사장님이 휴대폰을 들고 나왔다. 건어물 사장님도. 신발 가게도. 셔터가 하나씩 올라갔다. 시장 골목에 휴대폰 여섯 개가 들렸다. 탁 반장 쪽으로.

탁 반장은 한참 서 있다가 조끼들에게 턱짓을 했다. 조끼들이 짐칸의 반찬 통을 도로 내렸다. 거칠게. 쏟아진 멸치는 그대로 두고. 트럭 두 대가 시장을 빠져나갔다. 떠나기 전에 탁 반장이 창문을 내리고 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자기 코를 톡 쳤다.

사장님은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앉았다. 주걱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 셔터를 올린 이웃들이 다 듣게.

“도장 찍었어. 맞아. 우리 아들 빚 때문에. 사천만 원. 사채야. 이자가 매달 백오십씩 붙어. 부동산 사람이 조기 이주하면 이주비에 인센티브까지 칠천 준다고 했어. 그거면 아들 빚 갚고 컨테이너라도 하나 얻어. 다들 버틴다는데 나는 못 버텨. 버티는 동안 이자가 붙어.”

떡집 사장님이 휴대폰을 내렸다.

“형님, 그걸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너네가 나 말렸을 거잖아. 말리면 나 버텼을 거고. 버티면 아들 죽어.”

골목이 조용해졌다. 간장 떨어진 자국이 아스팔트에서 마르고 있었다. 떡집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건어물 사장님은 괜히 자기 셔터 손잡이를 만졌다.

나는 코를 손등으로 훔쳤다. 피가 멎어 가고 있었다. 사장님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주걱으로 내 정강이를 톡 쳤다.

“재우 총각은 왜 막았어. 내가 도장 찍은 거 알면서.”

“기한은 보름 남았으니까요. 그 보름은 사장님 겁니다.”

사장님은 나를 오래 봤다. 그리고 웃었다. 웃다가 앞치마로 눈가를 눌렀다.

“그 협약서 양식, 총각이 만들었다며.”

“네.”

“그럼 사천만 원짜리 빚 있는 반찬가게 아줌마가 거기 도장 찍을 줄도 알았겠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았다. 이름은 몰랐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알았다. 그래서 인센티브라는 칸을 만들었다. 버틸 수 없는 사람부터 나가게.

사장님은 주걱을 짚고 일어섰다. 짐칸에서 도로 내려진 반찬 통들을 하나씩 진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떡집 사장님이 와서 같이 올렸다. 건어물 사장님도. 아무도 도장 얘기를 다시 하지 않았다. 쏟아진 멸치를 떡집 사장님이 빗자루로 쓸었다.

진열대가 다 세워졌을 때 사장님이 콩자반 통 하나를 집어 반을 덜어 작은 통에 담았다.

떡집 사장님이 가게로 들어가더니 절편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코피 떡. 피 나면 떡을 먹어야 돼. 우리 엄마가 그랬어.」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건어물 사장님이 옆에서 쥐포 한 장을 얹었다. 「쥐포도 먹어야 돼.」 그것도 처음 들었다. 신발 가게 사장님은 줄 게 없어서 한참 망설이다가 깔창 한 켤레를 가져왔다. 「많이 걷는다며.」

사장님이 그걸 보고 웃었다.

“이제 총각 이름은 코피 총각이야. 이 시장에서.”

“반 통. 오늘은 공짜야. 코피 값.”

“저 콩자반 세 통 남았어요.”

“그러니까 반 통이지.”

그날 나는 다리까지만 걸었다. 코에 휴지를 꽂고. 문 영감이 나를 보고 한참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순자가 주걱을 들었구먼. 이십 년 만이야. 저번에 든 건 남편 바람났을 때.」

오후에 윤 상무에게서 문자가 왔다. 「탁이 선 넘었다. 내가 사과한다. 치료비 보낼게.」 그리고 한 통이 더. 「근데 재우야. 순자 사장님은 칠천 받으면 아들 산다. 보름 버티면 그 이자만 칠십오만 원이야. 네가 막은 게 누구한테 좋은 건지 계산해 봐라.」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계산은 이미 해 봤다. 윤 상무 말이 맞았다. 칠십오만 원. 그런데 그 계산에는 오늘 셔터를 올린 여섯 사람이 없었다. 원가표에는 셔터가 올라가는 칸이 없다.

저녁에 한석에게서 문자가 왔다. 동네 단톡방에 영상이 돈다고. 반찬가게 아줌마가 주걱으로 용역을 때리는 영상. 조회 수가 벌써 삼천이라고. 「아줌마 멋있어요. 코피 난 분도요.」 그리고 한 줄이 더. 「저 오늘 서랍 열어 봤어요. 열기만 했어요.」

집에 와서 노트를 폈다.

9월 15일 · 다리까지 · 한 시간 오십 분 순자네 반찬 · 조기 이주 협약 · 아들 빚 사천만 원 이탈 효과 · 내가 쓴 주석 주걱 · 한 번 · 딱 콩자반 · 반 통 · 코피 값 절편 · 쥐포 · 깔창 한 켤레 · 셔터 여섯 개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적는 데 오래 걸렸다.

내가 만든 칸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코가 욱신거렸다. 냉장고를 열었다. 콩자반 세 통과 반 통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반 통이 제일 작았다. 제일 무거웠다.

자기 전에 신발 가게 사장님이 준 깔창을 운동화에 깔았다. 발바닥이 조금 높아졌다. 한 번 서 보고, 방 안을 세 걸음 걸어 봤다. 내일은 여덟 정거장을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코가 욱신거려도. 이 시장 사람들이 깔아 준 높이만큼.

5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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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밤에책2026.05.20· 5화

    같은 출발점에서 나온 다른 작품도 읽고 왔는데 완전히 달라서 신기했어요.

    • 종이배2026.05.21

      저도 그 장면에서 멈췄어요.

반 통 · 오늘은 여덟 정거장을 걸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