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17자) · 사십일

여덟 정거장

오늘은 여덟 정거장을 걸었다 · 도경

퇴사 아흐레째 아침, 나는 여덟 정거장을 구간으로 나눴다.

엑셀을 켰다가 껐다. 퇴사하고 아흐레 만에 엑셀을 켜니까 손이 저절로 단축키를 눌렀다. 컨트롤, 시프트, 화살표. 십일 년 동안 매일 쓰던 손이다. 그 손이 무서워서 껐다. 종이에 손으로 그렸다. 자를 안 대고 그려서 줄이 휘었다.

1구간 집에서 시장 십팔 분. 2구간 시장에서 큰길 십일 분. 3구간 큰길에서 극장 구 분. 4구간 극장에서 다리 육 분. 5구간 다리에서 학교 십사 분. 6구간 학교에서 육교 이십이 분. 7구간 육교에서 공원 이십육 분. 8구간 공원에서 종점 사십사 분. 합이 두 시간 십 분.

그 아래에 날마다 걸린 시간을 적었다. 여드레 동안 여덟 번. 매번 달랐다. 두 시간 이십이 분, 두 시간 십사 분, 두 시간 삼십일 분, 두 시간 십 분, 두 시간 사십칠 분, 두 시간 구 분. 이레째가 세 시간 반이었다. 다리에서 방석이 강에 빠진 날. 여드레째는 두 시간 팔 분. 아무 일도 없었다.

시간이 늘어난 날은 뭔가 있었던 날이다. 시장에서 콩자반을 산 날, 육교에서 비를 피한 날, 다리에서 탁 반장을 만난 날. 짧은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당연한 얘기다. 그 당연한 것을 여드레 걸려 알았다.

아흐레째에 나는 일부러 늘려 보기로 했다. 방법은 하나다. 멈추는 것.

반찬가게 앞에서 섰다.

“오늘도 지나가시네.”

“사장님, 콩자반 말고 뭐가 잘 나가요.”

오순자 사장님이 주걱을 멈췄다.

“그거 왜 물어봐.”

“가게 없어지기 전에 다 먹어 보려고요.”

사장님은 주걱을 든 채로 나를 한참 봤다. 그러다 진열대를 한 칸씩 짚었다. 멸치볶음, 우엉조림, 깻잎, 도라지무침, 가지나물. 짚을 때마다 그 반찬을 누가 사 가는지 말했다. 멸치는 학교 앞 문구점 아줌마, 우엉은 경비 아저씨, 깻잎은 삼 층 사는 대학생, 도라지는 문 영감.

“문 영감님이 도라지를 드세요?”

“그 양반 이가 안 좋아서 부드러운 거만 먹어. 도라지를 푹 무쳐 달래. 이십 년째.”

나는 도라지무침 반 통을 샀다. 사장님은 도라지를 한 번 더 무쳐서 담았다. 부드럽게. 사장님이 비닐을 묶으며 말했다.

“재우 총각, 그거 알아? 우리 시장이 없어지면 문 영감 도라지는 누가 무쳐 주나.”

거기서 육 분을 썼다.

큰길 사거리에서 신호를 두 번 기다렸다. 한 번은 어차피 기다려야 하고, 두 번째는 일부러 안 건넜다. 그 이 분 동안 버스가 여섯 대 지나갔다. 그중 넷이 같은 노선이었다. 같은 노선이 사 분에 넷이면 배차가 일 분이라는 뜻인데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다음 신호에도 안 건넜다. 칠 분 동안 그 노선 버스가 다섯 대 왔다. 그리고 십사 분 동안 한 대도 안 왔다.

앞차가 늦으면 뒤차가 붙는다. 붙으면 몰려온다. 몰려오고 나면 한참 비어 있다. 입사하고 첫 두 달은 이 노선 버스로 다녔다. 몰려오면 못 타고, 그다음에 십사 분을 기다렸다. 십일 년 동안 그걸 배차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늘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배차는 맞다. 길이 막혀서 몰린다. 원인은 버스가 아니라 이 사거리였다.

여기서 십육 분을 썼다. 발바닥이 아스팔트 열기에 데워졌다.

다리에는 문 영감이 있었다. 새 방석. 푸른 체크무늬. 탁 반장이 윤 상무 지시로 가져다준 것이라고 했다. 문 영감은 그 방석 위에 앉아 있지 않았다. 옆에 개어 두고, 강에서 건진 옛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다 말랐는데 물 얼룩이 남아 있었다.

“새 거 두고 왜 헌 거에 앉으세요.”

“새 거는 받았다는 표시로 옆에 둔 거고, 앉는 건 내 거에 앉아야지.”

나는 도라지무침 반 통을 문 영감에게 건넸다. 문 영감은 봉지를 받아 들고 웃었다. 순자가 시켰지, 하고.

그날 나는 다리에서 두 시간 앉아 있었다. 사람을 셌다. 노트 한 쪽에 바를 정 자를 그어 가며. 두 시간에 백열넷. 혼자 건너는 사람 아흔둘, 둘 이상 스물둘. 유모차 아홉, 휠체어 둘, 자전거 끌고 가는 사람 열하나. 학교 끝나는 시간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서른 명쯤 건넜다. 아이들은 다리 한가운데서 꼭 한 번씩 난간에 매달려 물을 내려다봤다. 문 영감이 그때마다 말했다. 「떨어진다, 이놈들아.」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도망갔다. 매일 그런다고 했다.

문 영감은 내 노트의 바를 정 자를 들여다보고 코웃음을 쳤다.

“백열넷? 나는 안 세도 알아. 아침 여덟 시 반에 애들 오십, 열한 시에 장 보는 아줌마들 서른, 두 시에 병원 가는 노인네들 스물, 네 시에 애들 또 오십, 여섯 시에 퇴근하는 사람들 백. 비 오면 반. 눈 오면 삼분의 일. 이십일 년 앉아 있으면 그냥 알아.”

“그걸 적어 두신 적 있으세요?”

“왜 적어. 매일 보는데.”

나는 문 영감이 불러 준 숫자를 노트에 받아 적었다. 더하니 하루 이백오십. 비 오는 날 백이십오. 사십일과는 자릿수부터 달랐다.

다리를 건너 5구간, 학교 앞을 지나 6구간 육교에 닿았다. 육교 한가운데에서 오른쪽으로 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사십 대 남자가 난간에 팔을 얹고 서 있었다. 열흘 동안 여덟 번 봤다. 늘 같은 자리. 오늘은 그가 손가락으로 아래 차들을 하나씩 짚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세고 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갔다. 말을 걸지 않았다. 나도 세는 사람이라 세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집에 와서 구청 누리집을 뒤졌다. 성하1구역 재정비촉진계획, 첨부 문서 열두 개. 그중 여덟 번째. 교통영향평가 요약본.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췄다.

성하보행교 보행 수요. 일평균 이용자 사십일 명. 보행 기능 미미. 인근 횡단보도로 대체 가능. 차량교로 전환 시 교통 편익 연간 삼십이억.

사십일 명. 하루에.

나는 그 숫자를 안다. 보상 산정표 여섯 번째 시트, 보행교 철거 편익. 나는 그 칸에 교통영향평가 숫자를 그대로 가져다 넣었다. 사십일. 의심하지 않았다. 용역 보고서 숫자니까. 공식 숫자니까. 그 사십일에 곱하기를 해서 편익을 만들고, 그 편익이 사업성 지표를 기준선 위로 한 번 더 밀어 올렸다.

나는 노트를 폈다. 오늘 두 시간 백열넷. 이레째 한 시간 쉰일곱. 하루로 치면 몇 백 명이다. 적어도 사십일은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성하구청 도시정비과 민원 창구에 섰다. 담당 주무관은 남기선. 삼십 대 후반. 넥타이를 느슨하게 맸다. 책상 위에 민원 서류가 두 뼘 높이로 쌓여 있었고, 그 꼭대기에 아이가 그린 듯한 크레파스 그림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내 노트를 받아 들고 바를 정 자가 빼곡한 쪽을 넘겼다.

“직접 세신 거예요?”

“네. 이틀 동안 세 시간.”

“선생님, 이건 개인 관찰이고요. 교통영향평가는 전문 용역 기관이 규정된 방법으로 조사한 거예요. 공신력이 달라요.”

“그 조사는 언제 했습니까?”

남 주무관이 서류철을 넘겼다.

“이천이십삼 년 십일월. 둘째 주 화요일, 오후 두 시부터 네 시.”

“날씨는요.”

“그런 건 안 적혀 있는데요.”

나는 휴대폰으로 기상청 과거 자료를 찾았다. 이천이십삼 년 십일월 십사일 화요일. 서울 강수량 이십팔 밀리미터. 비였다. 평일 오후 두 시부터 네 시. 학교가 끝나기 전, 시장이 한가한 시간, 비 오는 날. 그날 이 다리를 두 시간 동안 건넌 사람이 사십일 명이었다면 믿을 수 있다. 그걸 하루로 늘려 적은 게 문제였다.

“비 오는 평일 오후 두 시간을 세고 하루치라고 적었습니다. 그 숫자로 다리를 없애는 편익을 계산했고요.”

남 주무관이 서류철을 덮었다.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편익 계산을.”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고르지 않기로 했다.

“제가 했습니다. 대성개발 원가팀에서. 그 숫자를 그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남 주무관은 나를 오래 봤다. 넥타이를 한 번 만졌다.

“그럼 선생님이 틀리신 거네요. 틀리신 분이 틀렸다고 오시면 저는 뭘 믿어야 돼요.”

그는 내 노트를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저도 그 다리 알아요. 우리 애가 성하초 다녀요. 아침마다 그 다리로 가요. 난간에 매달려서 물 보는 애들 중에 우리 애도 있을 거예요. 근데 선생님, 저는 여기 앉아서 서류로 일해요. 서류에 사십일이라고 적혀 있으면 저는 사십일로 일해야 돼요. 그게 제 일이에요.”

“재조사 요청은 민원으로 접수할게요. 처리 기한은 삼십 일이에요. 그 전에 관리처분 인가 신청이 들어갈 수도 있고요. 그러면 순서상 그게 먼저예요.”

구청 민원실을 나와 앞마당 벤치에 앉았다. 벤치 옆에 성하1구역 조감도 입간판이 서 있었다. 번쩍이는 유리 아파트 사이로 왕복 사 차로 다리가 그려져 있었고, 그 다리 위에는 사람이 한 명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노트를 펴고 문 영감의 숫자를 다시 봤다. 이백오십. 그 옆에 남 주무관의 사십일. 둘 다 이 동네 다리를 가리키는 숫자였다. 하나는 이십일 년 동안 앉아 있던 사람이 셌고, 하나는 비 오는 화요일 두 시간 동안 누가 셌다. 숫자는 누가 셌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걸 나는 십일 년 동안 알면서 모른 척했다.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윤 상무였다.

“재우야. 구청 갔다며.”

“이십 분 전입니다.”

“남 주무관이 전화했어. 전 직원이 민원 넣었다고. 재우야, 그 사십일은 용역이 한 거야. 우리가 한 게 아니야. 넌 받아서 넣었을 뿐이고. 이제 와서 그걸 흔들면 제일 먼저 흔들리는 게 네 이름이야. 네가 넣었으니까.”

“압니다.”

“알면서 왜 해.”

나는 구청 앞 횡단보도에 섰다. 신호는 팔십 초. 버스가 몰려왔다가 지나갔다.

“상무님, 어제 다리에서 두 시간 백열넷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매일 난간에 매달려서 물을 봅니다. 그걸 사십일이라고 적은 표에 제 이름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게 제 이름이면 흔들리게 두겠습니다.”

그날 밤 노트를 폈다. 전날 적어 둔 줄 아래에 오늘 것을 이었다.

9월 9일 · 세 시간 사 분 · 일부러 멈춤(반찬가게 육 분, 사거리 십육 분, 다리 두 시간) 다리 · 두 시간 백열넷 · 교통영향평가 하루 사십일 9월 10일 · 구청 · 민원 처리 기한 삼십 일 사십일을 넣은 사람 · 나

적고 나서 표를 오래 봤다. 여드레 동안 나는 시간을 줄이려고 걸었다. 빨리 걸으면 하루가 덜 남으니까. 아흐레째부터는 늘리려고 걸었다. 같은 길인데 다른 일이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겨울차2026.05.18· 3화

    이 장면 묘사가 오래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줄이요.

    • 한화만더2026.05.19

      완전 공감합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