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275자)

제 성력을 걸겠습니다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한도희가 이 세계에 온 지 마흔나흘째 되는 밤, 대신관 오르텐이 성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

도희는 침대에 앉아 오른손 붕대를 풀고 있었다. 물집은 다 가라앉았고, 손등에 번들거리는 분홍빛 새살이 지도처럼 퍼져 있었다. 손가락을 다 펴면 새살이 당겼다. 맞은편 침대에서 베티가 기도서를 펴 놓고 졸다가 노크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오르텐은 혼자였다. 제의가 아니라 수수한 검은 사제복을 입었고, 등불 하나를 들었다. 그가 베티를 보았다. 베티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나가면서 도희 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르텐은 베티가 앉았던 침대에 앉았다.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소매에서 네 번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무릎 위에서 펼쳤다. 검은 가루가 손톱만큼 있었다.

“크레센트 공작저 저장고 계단에서 나왔습니다. 성녀께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등불이 아래서 비춰서 오르텐의 얼굴은 턱 밑이 밝고 눈 언저리가 어두웠다.

“모레가 첫 빛 축일입니다. 해마다 시즌 둘째 달 닷새에 대신전이 왕실을 모시고 올리는 큰 미사지요. 그날 성녀께서 제단 앞에서 크레센트 영애를 지목하십시오. 영애가 성녀를 홀렸고, 마탑 견습을 숨겼다고. 성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면 왕께서는 재판을 승인하실 겁니다.”

“싫어요.”

“아직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르텐이 손수건을 다시 접었다. 손가락이 느렸다. 한 번 접을 때마다 모서리를 꼼꼼히 맞췄다.

“서약식이 끝나면 성녀께 구호소 셋을 맡기겠습니다. 무두질 골목 구호소까지. 창문을 여시든 물을 끓이시든, 성녀 뜻대로 하십시오. 수녀들을 성녀 손에 붙이겠습니다. 손 씻는 법도 가르치시고요.”

도희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오므라들었다. 새살이 당겼다.

“제가 그걸 원하는 걸 어떻게 알아요?”

“구호소에 몰래 가는 성녀는 처음 봤습니다. 성녀께서는 사람을 살리고 싶으신 분이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사람 살리고 싶은 사람이 사람을 태워요?”

오르텐이 웃지 않았다. 등불 쪽으로 고개를 숙여, 바닥에 놓인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십오 년 전 역병 때, 왕실은 성문을 닫았습니다. 귀족들은 남쪽 영지로 떠났고요. 성문 밖에 남은 것은 교단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서른아홉이었고, 성문 밖에서 넉 달 동안 사람을 묻었습니다. 동생도 묻었습니다. 다음 역병이 오면 왕실은 또 성문을 닫을 겁니다. 그때 성녀가 왕실 것이면, 성녀도 성문 안에 있겠지요. 성녀는 교단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문 밖에서 사람이 삽니다.”

“그거랑 이사벨라 태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왕실은 교단이 무섭지 않습니다. 시즌 끝에 마녀 하나가 타면 무서워하겠지요. 교단이 누가 깨끗하고 누가 더러운지 정한다는 것을 보면.”

도희는 그 말을 응급실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모양만 달랐다. 병상이 모자라니 누구를 먼저 받을지 정해야 한다고, 과장이 회의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맞았다. 맞는데도 도희는 그 회의실에서 나와 비상계단에 앉아 한 시간을 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녀님. 축일 아침까지.”

오르텐이 일어섰다. 등불을 들었다. 문을 열기 전에 돌아보았다.

“지목하지 않으시면, 이 재는 제가 직접 꺼냅니다. 그때는 성녀께서도 같은 자리에 서시게 될 겁니다.”

*

베티는 복도 끝 창가에 서 있었다. 오르텐이 지나간 뒤에도 거기 있었다. 도희가 문을 열고 나가자 베티가 어깨를 떨었다.

“수녀님이 주웠죠. 그 재.”

“…네.”

“왜요?”

베티가 창틀을 손으로 쥐었다. 비뚤어진 앞니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대신관님이 저를 키워 주셨어요. 역병 때 성문 밖에서 저를 주우셨어요. 저는 여덟 살이었어요. 엄마는 그 옆에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베티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도희는 베티 옆에 섰다. 창밖으로 대신전 앞 광장이 보였다. 축일 준비로 광장에 등불 기둥이 줄지어 세워지고 있었다.

“수녀님. 그 사람이 수녀님을 주운 건 맞아요. 그래도 그 재 때문에 사람이 타면, 그건 수녀님이 주운 거예요.”

베티가 울었다. 소리 없이 울었고, 도희는 손수건을 건넸다. 오르텐의 손수건이 아니라 도희가 늘 소매에 넣어 다니는 무명 손수건이었다. 베티가 그걸로 코를 풀었다. 크게 풀었다.

“죄송해요, 성녀님.”

“괜찮아요. 그거 원래 코 푸는 거예요.”

*

첫 빛 축일 아침, 대신전은 공표식 날보다 사람이 많았다. 천장의 흰 초가 새로 갈렸고, 촛농 냄새에 장미수 냄새가 섞였다. 맨 앞줄에 왕이 앉았고, 그 옆에 왕태자 카시안이 앉았다. 크레센트 공작 일가는 셋째 줄이었다. 연금이 풀린 이사벨라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뒷줄 어딘가에 깃털 모자 하나가 솟아 있었다.

미사 전, 제의실에서 루카스가 엘리스에게 다가왔다. 그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었다.

“성녀님. 성수 그릇 받침 밑에 돌이 있었습니다.”

“돌?”

“마법 등불 돌입니다. 불빛 대신 열을 내도록 깎은 것. 받침 안쪽에 박혀 있었습니다. 공표식 날도 있었을 겁니다. 오늘 새벽에 제가 뺐습니다.”

루카스가 장갑 낀 손바닥을 펴 보였다. 달걀만 한 돌이 하나 있었다. 아직 미지근했다. 도희는 그 돌을 보다가, 루카스의 얼굴을 보았다.

“경은 이거 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압니다.”

루카스는 돌을 다시 쥐고 제의실을 나갔다. 다리를 거의 절지 않았다.

*

오르텐의 강론은 길었다. 빛과 어둠과, 성문 밖의 밤과, 신이 손을 내미는 자리에 대해. 그의 목소리는 대신전 천장까지 고르게 올라갔다. 강론 끝에 그가 엘리스를 불렀다.

“성녀께서 오늘 이 빛의 날에, 신께서 보여 주신 것을 말씀하실 겁니다.”

엘리스가 제단 앞에 섰다. 맨발이었다. 대리석이 첫날만큼 차가웠다. 엘리스는 대신전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셋째 줄의 은빛 머리가 보였다. 이사벨라는 엘리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무릎 위의 제 손을 보고 있었다. 숄 끝을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성수 그릇을 가져와 주십시오.”

엘리스가 말했다. 오르텐의 눈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사제 하나가 은그릇을 받쳐 들고 왔다. 포도 덩굴 테두리. 공표식 날의 그 그릇이었다.

“크레센트 영애. 이리 오십시오.”

대신전이 술렁였다. 이사벨라가 일어났다. 공작이 딸의 소매를 잡으려다 놓쳤다. 이사벨라가 중앙 통로를 걸어왔다. 걸음 소리가 대리석 위에서 하나씩 울렸다. 제단 앞에 서자 엘리스가 한국말로 말했다.

“손 넣어. 오늘은 차가워.”

“어떻게 알아요?”

“루카스가 돌 뺐어.”

이사벨라가 손을 넣었다. 엘리스도 붕대를 푼 오른손을 넣었다. 새살이 물에 닿자 도희는 이를 악물었다. 물은 차가웠다. 김도 거품도 없었다. 두 사람의 손이 은그릇 바닥에서 겹쳤다. 엘리스가 그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대신전 전체에 보였다. 물방울이 두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깨끗한 손은 성수가 차게 받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보십시오.”

웅성거림이 대신전 끝까지 번졌다. 왕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카시안이 의자 팔걸이를 쥐었다.

오르텐은 웃었다. 웃음이 첫날보다 조금 늦게 왔다.

“성녀께서 영애의 손을 잡으셨으니, 성녀의 빛이 영애를 덮었겠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그가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제단 위에서 펼쳤다. 검은 재가 은그릇 옆에서 촛불을 받았다. 빛이 그 위에서 먹혀들었다.

“이것은 크레센트 공작저 지하에서 나온 재입니다. 마탑이 등록하지 않은 불, 연기도 냄새도 없이 남는 불의 재. 교단은 이것을 마녀의 불이라 부릅니다. 성녀님. 이 재가 그 집에서 나왔는데도, 그 집의 영애가 깨끗하다고 하시겠습니까?”

대신전이 숨을 죽였다. 엘리스는 재를 내려다보았다. 노엘이 벽 뒤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리나가 손님방에서 실을 감고 있었다. 엘로이즈가 짠 수프를 다 먹었다. 공작부인이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을 때 달그락거렸다. 그 집에서 도희가 본 것들이었다.

“네.”

엘리스가 말했다. 이 나라 말로, 대신전 끝까지 들리게.

“그 집은 깨끗합니다. 그 영애도 깨끗합니다. 제가 틀렸다면, 제 성력을 걸겠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손을 대도 아무도 낫지 않게 해 주십시오. 신께서 보고 계시다면.”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장에서 촛농 한 방울이 떨어졌을 뿐이다.

오르텐이 손수건을 접었다. 모서리를 맞췄다. 그리고 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폐하. 성녀께서 교단의 물음에 답하지 않으시고, 마녀의 재 앞에서 그 집을 감싸셨습니다. 서약을 앞둔 성녀가 교단의 눈을 가리셨으니, 교단은 오늘부로 성녀의 자격을 정지합니다. 성녀께서 다시 교단의 딸로 돌아오실 때까지, 대신전은 성녀께 문을 닫습니다.”

왕이 손을 들었다. 늙은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가 내려갔다. 허락이었다.

카시안이 일어섰다.

“아바마마. 저 손이 제 기사를 살렸습니다.”

왕은 아들을 보지 않았다. 카시안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엘리스를 보았다. 엘리스는 고개를 숙여 왕태자에게 예를 갖췄다. 그것뿐이었다.

사제 둘이 엘리스의 양옆에 섰다. 엘리스는 혼자 걸었다. 중앙 통로를 지나, 열린 정문을 지나, 대신전 계단 위로 나섰다. 뒤에서 무거운 문짝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쇠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계단 위에 햇볕이 쏟아졌다. 엘리스는 맨발이었다. 돌계단이 햇볕에 데워져 발바닥이 따뜻했다. 돌아갈 방 없이 대신전 바깥 돌을 밟는 것은 처음이었다.

옆문이 열리고 이사벨라가 뛰어나왔다.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 계단을 두 칸씩 내려왔다. 엘리스 앞에서 멈췄다. 숨이 찼다.

“바보예요?”

“응.”

“성력 걸었다가 진짜 없어지면요?”

“안 없어졌잖아. 신이 안 보고 있나 봐.”

이사벨라가 웃다가 울었다. 엘리스가 붕대 없는 오른손으로 이사벨라의 눈가를 닦았다. 새살이 당겼다.

*

공작가 마차 안은 좁았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앞 마차에 탔고, 뒤 마차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바퀴가 돌길 위에서 덜컹거릴 때마다 두 사람의 무릎이 부딪혔다. 창밖으로 축일 등불 기둥이 하나씩 지나갔다.

“나 이제 집 없어.”

“우리 집 침대 많다고 했잖아요.”

“너네 아버지가 나 받아 줄까?”

“어머니가 받아 줄 거예요. 어머니는 리나도 받았어요.”

엘리스가 이사벨라를 보았다. 이사벨라도 엘리스를 보았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면서 크게 기울었다. 엘리스가 이사벨라 쪽으로 쏠렸다. 엘리스는 도로 바로 앉지 않았다.

입술이 닿았다. 짧았다. 엘리스의 입술은 텄고, 장미수 냄새가 났다. 마차가 다시 바로 섰을 때 엘리스가 떨어졌다.

“이거 우정이야?”

채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차 바퀴가 돌길 위에서 한참 덜컹거렸다.

“몰라요.”

“나도 몰라.”

엘리스가 웃었다. 입이 한쪽으로 조금 더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이사벨라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둘 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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