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102자)

포도주 저장고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연금 첫날, 크레센트 공작저 대문에 성기사 둘이 섰다. 은빛 갑옷이 아침 햇볕을 받아 대문 철창 사이로 번쩍였다. 성기사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문 밖에 서서, 들어가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하인들은 장을 보러 나갈 때마다 바구니 속을 열어 보였다.

이사벨라는 그날 하루 종일 노엘을 설득했다.

“남쪽으로 가. 아버지 영지에 아는 마부가 있어. 바구니 마차 밑칸에…”

“싫어.”

“대문 앞에 성기사가 있어. 열흘 뒤엔 집 안까지 들어와.”

“그러니까 싫다고. 나가다 잡히면 바로 대신전 지하야. 여기 있다가 잡혀도 대신전 지하고. 같은 지하면 침대 있는 데서 기다릴래.”

노엘은 하인 숙소 창가에서 마탑 쪽을 보고 있었다. 수도 북쪽 언덕 위에 탑 꼭대기가 손가락 한 마디만 하게 보였다. 목에 건 칠 층 견습실 열쇠를 노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만졌다. 마탑에서 이름을 지웠으니 그 열쇠로 열 문은 이제 없었다.

“그리고 나 아직 안 물어봤어. 그 사제 이름.”

“무슨 사제?”

“나한테 불 가르쳐 준 사제. 그 사람이 지금 대신전에 있으면, 나는 남쪽 가서 평생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살아. 그건 싫어.”

채령은 그날 밤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원작에도 외전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십오 년 전 역병, 검은 불, 재가 된 시체들.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대신전에 몇이나 남았을지, 채령은 짐작만 했다.

*

연금 닷새째, 공작은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인 말로는 밤마다 포도주를 한 병씩 비운다고 했다. 이사벨라가 서재 문을 두드렸을 때 대답이 없었다.

엘로이즈는 집 안에서 투명한 사람이 되었다. 예비 심문 다음 날부터 하인들은 엘로이즈가 지나가면 말을 멈췄다. 부엌 하녀 하나가 엘로이즈의 수프 그릇에 소금을 한 줌 부었다. 엘로이즈는 그 수프를 다 먹었다. 이사벨라가 부엌에 내려가서 그 하녀를 불러 세웠지만, 하녀는 아가씨 앞에서 고개만 숙일 뿐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전에 아가씨를 판 년이라는 말이 이미 집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안 괜찮아.”

“짰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엘로이즈가 웃었다. 공작저에 온 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리나는 손님방에서 공작부인에게 실 감기를 배우다가 공작부인의 은실 한 타래를 다 엉클어 놓았다. 공작부인은 그것을 풀면서 한숨을 쉬었고, 다 풀고 나서 리나에게 한 타래를 더 주었다.

*

연금 아흐레째 밤, 공작부인이 이사벨라의 방에 왔다. 등불 하나를 들고, 잠옷 위에 두꺼운 숄을 걸친 채였다. 공작부인은 문을 닫고 한참 서 있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있지?”

이사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등불을 탁자 위에 놓았다.

“네 아버지는 내일 그 아이를 넘길 거다. 너까지 넘기겠다는 말은 화가 나서 한 말이지만, 그 아이는 정말 넘긴다. 아버지는 대신전이 무섭다. 나도 무섭다.”

“그럼 어머니는 왜 오셨어요?”

공작부인이 숄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채령이 그 손짓을 보다가 깨달았다. 이사벨라가 긴장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 버릇이 어디서 왔는지 채령은 그제야 알았다.

“따라오너라.”

*

포도주 저장고는 공작저 북쪽 날개 지하에 있었다. 계단이 스물두 칸이었고, 내려갈수록 서늘해졌다. 시큼한 포도 냄새와 오크 나무 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한데 엉겨 있었다. 술통이 양쪽 벽에 세 단씩 쌓여 있었고, 맨 안쪽 벽 앞에 다른 술통보다 두 배는 큰 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통의 쇠테에 녹이 슬어 있었고, 마개 위 밀랍에 크레센트 문장이 찍혀 있었다.

“네 외할머니 혼례 때 담근 술이다. 쉰 해 넘게 아무도 안 열었다.”

공작부인이 그 통 옆 벽을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벽돌 하나를 누르자 벽돌이 안쪽으로 반 뼘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어깨로 벽을 밀었다. 벽 한 칸이 문처럼 열렸다. 그 뒤로 어른 셋이 누울 만한 빈방이 있었다. 바닥에 오래된 짚이 깔려 있었고, 벽에 아이 손바닥 크기의 그을음 자국이 줄지어 찍혀 있었다.

“역병 돌던 해에, 대신전이 성문을 닫으라 했을 때 네 외할머니는 이 문을 열었다. 하인들 아이를 여기 숨겼다. 일곱이었다. 나는 그때 다섯 살 난 너를 위층에 재워 두고, 밤마다 여기 죽을 날랐다.”

공작부인이 벽의 그을음 자국 하나에 손가락을 댔다. 아이들이 촛불 아래서 손바닥을 벽에 대고 놀던 자국이었다.

“일곱 다 살았다. 그 해 우리 집 하인 아이들만.”

채령은 할 말이 없었다. 원작에서 공작부인은 딸이 화형대로 끌려갈 때 창문 커튼을 닫는 사람이었다. 문장 하나였다. 채령은 그 문장에 각주를 달지 않았다.

“그 아이를 여기 둬라. 네 아버지는 이 방을 모른다.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아무도 안 알려 줬다.”

그날 밤 노엘은 담요 두 장과 물 한 병과 빵 세 덩이를 안고 벽 뒤 빈방으로 들어갔다. 짚 위에 앉자마자 코를 찡그렸다.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겠다.”

“내일은 더 심할 거야.”

“왜?”

“그냥 알아.”

“또 그 말.”

노엘이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려다 말고 고개를 내밀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 성녀, 너한테 뭐야?”

채령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동지라는 말도,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말도, 언니라는 말도 다 맞았다. 그런데 셋 다 모자랐다. 채령은 입을 도로 닫았다. 노엘이 히죽 웃고 담요 속으로 들어갔다.

“됐어. 대답 들었어.”

*

수색 날 아침, 성기사 열둘이 대문으로 들어왔다. 앞에 루카스가 섰고, 그 뒤로 대신관 오르텐이 걸어 들어왔다. 오르텐 옆에 흰 옷을 입은 엘리스가 있었다. 엘리스의 오른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뒤를 베티가 따랐다.

“성녀께서 공작가의 수색을 축복하실 겁니다.”

오르텐이 현관 앞에서 말했다. 공작이 허리를 숙였다. 공작의 눈 밑이 거뭇했고, 숨에서 포도주 냄새가 났다.

엘리스가 이사벨라 앞을 지나며 이마에 손끝을 댔다. 한국말이 손끝보다 먼저 왔다.

“어디?”

“저장고. 벽 뒤.”

“서약식 보름 남았어.”

“알아요.”

성기사들이 방마다 흩어졌다. 옷장 문 여는 소리, 침대 들어 올리는 소리,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 안 곳곳에서 났다. 리나가 손님방에서 겁에 질려 기침을 했고, 엘로이즈가 그 등을 쓸었다. 공작부인은 응접실 의자에 꼿꼿이 앉아 차를 마셨다. 찻잔이 받침에 닿을 때마다 아주 작게 달그락거렸다.

정오가 지나 수색은 북쪽 날개에 이르렀다.

루카스가 저장고 계단 위에 섰다. 성기사 둘이 횃불을 들고 먼저 내려갔다. 루카스는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술통뿐입니다, 부단장님.”

아래에서 성기사가 외쳤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장고, 끝.”

“아니오.”

오르텐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엘리스와 이사벨라가 그 뒤를 따랐다. 오르텐은 계단 앞에서 멈추지 않고 첫 칸을 밟으려 했다. 루카스가 계단 입구에 섰다. 몸으로 막지는 않았다. 다만 비켜서지도 않았다.

“대신관님. 수색 지휘는 제가 맡았습니다.”

“그대가 맡았지.”

“저장고는 제가 봤습니다. 술통뿐입니다.”

“그대는 계단 위에서 봤소. 루카스 경, 그대의 다리가 아직 성치 않아 내려가지 못했다면, 내가 대신 내려가겠소.”

“다리는 다 나았습니다.”

“그럼 왜 안 내려갔소?”

루카스가 대답하지 못했다. 복도에 횃불 그을음 냄새가 찼다. 오르텐이 웃었다.

“좋소. 내려가지 않겠소. 대신 술통을 전부 깨시오. 통 안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것은 하나도 빼지 말고.”

공작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 저장고에는 공작가 삼대가 모은 술이 있었다.

“대신관님, 그건…”

“공작 각하. 마녀가 없다면 술값은 교단이 갚겠습니다.”

*

도끼 소리가 저장고에서 울려 올라왔다. 쿵, 쿵, 쩍. 통이 갈라질 때마다 포도주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붉은 냄새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복도를 채웠다. 시큼하고 달고, 오래된 것은 쇠 냄새가 났다. 공작이 벽에 손을 짚었다.

이사벨라는 계단 위에 서서 그 소리를 셌다. 열한 통, 열두 통. 맨 안쪽 큰 통에 도끼가 닿으면, 벽 바로 옆이었다. 노엘이 그 벽 뒤에서 포도주 냄새를 참고 있을 것이었다. 노엘은 재채기를 잘했다.

엘리스가 이사벨라 옆에 섰다. 둘의 손등이 스쳤다. 엘리스의 손가락이 이사벨라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붕대가 거칠었다. 이사벨라가 그 손을 쥐었다. 오르텐은 계단 아래를 보고 있었고, 베티는 오르텐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두 사람의 손을 보지 않았다.

“이 통은 오십 년이 넘은 겁니다, 부단장님.”

아래에서 성기사가 외쳤다. 맨 안쪽 큰 통이었다.

“깨라.”

오르텐이 말했다. 루카스가 아니라 오르텐이었다.

“깨지 마라.”

공작부인이 복도 저편에 서 있었다. 찻잔을 든 채였다. 그녀가 걸어와 오르텐 앞에 섰다. 오르텐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대신관님. 그 통은 제 어머니가 혼례 때 담근 겁니다. 역병 돌던 해에도 저 저장고에 있었지요. 그해 대신전이 성문을 닫으라 했을 때, 대신관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오르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처음이었다. 채령은 그 얼굴을 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성문 밖에 있었습니다, 부인.”

“그럼 아시겠군요. 성문 안에서 아이들이 어디 숨었는지.”

오르텐이 오래 말이 없었다. 계단 아래서 도끼를 든 성기사가 위를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포도주가 바닥을 타고 흘러 계단 첫 칸까지 차올랐다.

“그만.”

오르텐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견습은 없군요. 공작 각하, 술값은 교단이 갚겠습니다. 루카스 경, 오늘 밤 내 방에서 고할 것이 많겠소.”

*

행렬이 대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오르텐이 앞장섰고, 엘리스는 그 옆에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성기사들의 장화에 포도주가 묻어 현관 대리석에 붉은 발자국이 줄지어 찍혔다.

베티가 맨 끝에 있었다. 저장고 계단 앞을 지나다가 베티가 걸음을 멈췄다. 무릎을 굽혔다. 계단 셋째 칸 모서리, 포도주에 젖지 않은 마른 자리에 검은 가루가 손톱만큼 묻어 있었다. 재였다. 연기도 냄새도 없이 남는 재.

베티가 손수건을 꺼냈다. 그 재를 손수건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 담았다. 네 번 접었다. 소매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행렬 끝을 따라 대문을 나섰다.

이사벨라는 그것을 이층 복도 창문에서 보았다. 창유리에 손바닥을 댔다. 유리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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