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139자)
불타지 않는 불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노엘은 마탑 칠 층 견습실 창틀에 걸터앉아 손바닥 위의 불을 굴리고 있었다. 검은 불이었다. 촛불만 한 크기였고, 타오르는 모양은 여느 불과 같았는데 빛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먹었다. 불이 닿은 자리마다 창틀의 나뭇결이 조금씩 어두워졌고, 손바닥에는 차가운 기운만 남았다.
열일곱 살 되던 봄, 노엘은 마탑 입학 시험에서 물을 데우는 불을 보였다. 등록된 불이었다. 시험관들은 그 불이 빨갛게 탄다고 적었고, 노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불은 보이지 않았다. 마탑은 등록된 마법만 허용했고, 등록되지 않은 불은 대신전 감찰관에게 넘겼다. 넘겨진 견습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노엘! 내려와! 시연 순서 나왔어!”
아래층에서 동기가 불렀다. 노엘은 손바닥을 오므렸다. 검은 불이 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면서 고운 재가 한 줌 떨어졌다. 노엘은 재를 창밖으로 털어 냈다. 오늘은 마탑 공개 시연회였다. 견습마다 한 사람씩 왕실과 귀족과 대신전 앞에서 배운 불을 보이는 날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대신전에서 감찰관이 셋이나 온다고 했다.
*
“루카스 경이 약속하라고 했어요.”
마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엘리스가 한국말로 말했다. 맞은편 자리에 루카스가 앉아 있었다. 사냥 날 꿰맨 다리를 쭉 뻗고, 창밖만 보고 있었다. 사흘 만에 걸어 다녔다. 엘리스가 매일 밤 남은 빛을 실밥 사이로 조금씩 넣어 준 덕이었다.
“뭘요?”
“자기는 우리가 누군지 안 묻겠대. 매일 밤 대신관한테 거짓말도 하겠대. 대신 시즌 끝에 화형대에 아무도 안 세우겠다고 약속하래. 자기는 원래 그 화형대 경비 맡기로 돼 있었대.”
이사벨라가 루카스를 보았다. 원작에서 그녀를 화형대로 끌고 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 그 화형대를 없애 달라고 하고 있었다.
“약속했어요?”
“했지. 너도 해.”
이사벨라가 이 나라 말로 말했다.
“루카스 경. 약속합니다.”
루카스가 창밖을 보던 고개를 돌렸다. 한 번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차 바퀴가 돌길 위에서 덜컹거렸다.
“근데 우리 오늘 마탑엔 왜 가는 거야?”
“원작 110화요. 마탑 시연회에서 견습 하나가 실수로 검은 불을 보여요. 감찰관이 바로 잡아가요. 이름은 노엘. 그 불이 나중에 재판정에서 마녀의 불로 나와요. 이사벨라가 노엘을 시켜서 성녀를 저주했다는 증거로.”
“그럼 노엘을 우리가 먼저 데려오면?”
“재판에 마녀의 불이 없어요. 증거 없는 마녀 재판은 왕이 승인 못 해요. 원작 법대로라면.”
“그거 교단 속이는 거잖아.”
“네.”
엘리스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숨처럼 웃었다.
“좋아. 이미 꿰매는 성녀인데 뭐.”
*
마탑 일 층 시연장은 둥근 방이었고, 천장까지 뚫린 가운데로 바람이 돌았다. 벽마다 그을음 자국이 층층이 있었다. 백 년 동안 견습들이 실수한 흔적이었다. 매캐한 시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어디선가 유황 냄새도 났다.
귀족 관람석 맨 앞에 대신관 오르텐이 앉아 있었다. 감찰관 셋이 그 뒤에 섰다. 검은 사제복에 은 사슬을 목에 건 남자들이었다. 엘리스는 성녀 자리로 안내받았고, 이사벨라는 두 줄 뒤에 앉았다. 이사벨라 옆자리에 누가 털썩 앉았다.
“크레센트 영애! 여기 계셨네요!”
프리실라 하웰이었다. 연분홍 드레스에 깃털 달린 모자, 부채 둘. 하나는 부치는 용이고 하나는 입을 가리는 용이라고 했다.
“저 요즘 영애 덕분에 잠을 못 자요. 악녀와 성녀가 차를 마신다, 악녀와 성녀가 춤을 췄다, 악녀의 손수건이 성기사 다리를 감았다. 이번 시즌 소문 세 개가 다 영애 거예요. 오늘은 뭐예요? 오늘도 뭐 하실 거죠?”
“아무것도 안 해요.”
“거짓말이다. 눈이 거짓말이에요.”
시연이 시작되었다. 견습들이 하나씩 나와 불을 보였다. 빨간 불, 파란 불, 물 위에 뜨는 불. 일곱째가 노엘이었다. 키가 작고 머리를 짧게 잘랐고, 견습복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노엘이 손바닥을 펴자 빨간 불이 올라왔다. 등록된 불이었다.
이사벨라는 노엘의 소매 끝을 보았다. 소매 안쪽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원작 110화 문장 그대로였다. 긴장하면 손끝에서 검은 불이 새어 나온다.
빨간 불 가장자리에 검은 테두리가 한 가닥 일어났다.
맨 앞줄 감찰관 하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사벨라는 프리실라의 손목을 잡았다.
“영애. 소문 하나 드릴게요. 이번 시즌 제일 큰 거.”
“네?”
“대신 지금, 크게 쓰러져 주세요.”
프리실라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부채 둘을 동시에 떨어뜨렸고, 모자를 한 손으로 쥔 채 의자에서 미끄러지며 시연장이 울리도록 비명을 질렀다.
“쥐! 쥐가! 내 치마 안에 쥐가!”
관람석이 뒤집혔다. 영애들이 일어서서 치마를 들었다. 백작 하나가 의자 위로 올라갔다. 감찰관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노엘의 손에서 검은 불이 확 번졌다가, 노엘이 주먹을 쥐자 꺼졌다. 시연대 위에 재가 한 줌 내려앉았다.
“성녀님! 이 영애를 봐 주십시오!”
이사벨라가 소리쳤다. 엘리스가 성녀 자리에서 뛰어 내려왔다. 쓰러진 프리실라 옆을 지나면서 엘리스는 시연대 쪽으로 손을 뻗었고, 노엘의 팔을 잡았다.
“너도 놀랐지? 이리 와. 얼굴이 하얘.”
*
공작가 마차 뒤칸에는 엘로이즈가 늘 갈아입을 시녀복을 한 벌 실어 두었다. 노엘은 그 시녀복을 입고 앞치마를 둘렀다. 짧은 머리 위에 하얀 머릿수건을 씌우자 영락없는 공작가 막내 시녀였다. 견습복은 엘로이즈가 둘둘 말아 의자 밑에 쑤셔 넣었다.
“나 왜 데려가?”
노엘은 시녀복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말투였다.
“너 오늘 잡혀갈 거였어.”
“어떻게 알아?”
“알아. 그냥 알아.”
“귀족은 다 그렇게 말해?”
“나만 그래.”
마차 문이 열렸다. 대신관 오르텐이 서 있었다. 뒤에 감찰관 둘. 루카스가 마차 옆에서 한 발 다가섰지만, 오르텐이 손을 들자 멈췄다.
“크레센트 영애. 하웰 영애는 괜찮으십니까?”
“쥐가 나갔답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시연 일곱째 견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란 중에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견습은 우리가 아니라 마탑 소관 아닌가요, 대신관님?”
“감찰은 교단 소관입니다.”
오르텐의 눈이 이사벨라를 지나 노엘에게 갔다. 오래 머물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새 시녀를 들이셨군요. 손을 보여 주겠느냐?”
노엘이 이사벨라를 보았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이 손을 내밀었다. 오르텐이 그 손을 잡았다. 장갑 낀 손으로 손등을 쓸었고, 손바닥을 뒤집었다. 노엘의 손은 차가웠다. 검은 불을 쥔 손은 늘 그랬다.
“손이 얼음이로구나.”
엘리스가 마차 안에서 말했다.
“제가 방금 그 아이 손을 찬물에 씻겼습니다, 대신관님. 하웰 영애의 토사물이 묻어서요.”
오르텐이 엘리스를 보았다. 엘리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차 안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 아직 영애들이 쥐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르텐이 노엘의 손을 놓았다. 장갑 손가락 끝을 한 번 비볐다. 그리고 웃었다.
“성녀님은 손이 바쁘시군요. 서약식 전에 손이 다 닳지 않으시기를. 영애, 시녀가 영애 곁에서 오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마차 문을 닫았다. 감찰관들과 함께 마탑 쪽으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시녀가 오래 있기를 바란다는 건 무슨 말이야?”
노엘이 물었다. 이사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엘의 손등에서 오르텐의 장갑이 스친 자리에 검은 그을음이 한 줄 남아 있었다.
*
해 질 녘 마탑에서 전갈이 왔다. 감찰 시간에 자리에 없던 견습 노엘은 오늘부로 마탑에서 이름을 지운다고 했다. 노엘은 공작저 하인 숙소 창가에서 그 쪽지를 받았다. 한 번 읽고, 접고, 다시 펼쳐 읽었다. 그러고 나서 쪽지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검은 불이 일어났다. 쪽지는 타지 않았다. 다만 글씨부터 차례로 까맣게 먹혀 들어가서, 마지막엔 빈 종이 모양의 재가 되었다.
“칠 층까지 올라가는 데 삼 년 걸렸어.”
노엘이 말했다. 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스무 살이 되던 봄에 칠 층 견습실 열쇠를 받았고, 그 열쇠는 아직 노엘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이사벨라는 문가에 서 있었다. 들어가지 못했다. 원작에서 노엘은 대신전 지하에서 끝났다. 오늘 노엘은 살았고, 대신 노엘이 원하던 것 하나가 없어졌다. 채령은 그 둘을 저울에 올릴 수 없었다.
프리실라는 그 시간에 응접실에서 엘리스에게 차를 얻어 마시고 있었다. 엘리스가 왼손으로 따른 차였다. 반은 받침으로 흘렀다.
“그래서 제 소문은요, 영애?”
이사벨라가 응접실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악녀와 성녀가 같은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게 다예요?”
“성녀님이 오늘 공작가에서 주무시고 가요. 루카스 경이 문 앞을 지키고요. 대신관님께는 공작가 정화를 밤새 하셨다고 고할 거예요.”
프리실라가 부채 둘을 동시에 폈다.
“아, 이거다. 이거 내일 아침까지 수도 한 바퀴 돌아요. 대신관님 귀에는 점심 때쯤 들어갈 거고요.”
“그게 좋아요. 대신관님이 소문을 들을 때, 우리가 뭘 숨기는지는 못 듣게.”
프리실라가 부채 하나를 접었다. 접은 부채 끝으로 찻잔 테두리를 톡톡 두드렸다. 처음으로 감탄사 없이 말했다.
“잘 아시네요. 소문은 먼저 낸 쪽이 이겨요. 저는 열여섯 살 때 남이 먼저 낸 소문에 졌어요. 그 뒤로는 제가 먼저 내요.”
무슨 소문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프리실라는 다시 부채를 펴고, 차가 식었다고 투덜거렸다.
*
밤이 깊었다. 손님방 등불 아래서 엘리스가 노엘의 손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손바닥에 동상처럼 터진 자리가 셋 있었다. 엘리스가 왼손을 대자 터진 자리가 하나씩 닫혔다. 노엘은 그 빛을 신기하게 보다가 불쑥 말했다.
“너네 둘,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
“원작… 아니, 꿈에서 봤어.”
“무슨 꿈?”
“네가 그 불 때문에 잡혀가는 꿈. 그 불이 다른 사람을 태우는 증거가 되는 꿈.”
노엘이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 꿈에서 하나는 틀렸네.”
“뭐가?”
“이 불, 내가 혼자 깨친 거 아니야. 가르쳐 준 사람이 있어. 다섯 살 때, 역병 돌던 해에. 대신전 사제였어. 성문 밖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는데, 그 사람이 이 불로 그걸 다 재로 만들었어. 냄새도 연기도 없이. 나한테 그 불 붙이는 걸 보여 주고 말했어. 이건 신의 불이라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이사벨라가 문가에서 숨을 들이켰다. 채령은 원작을 끝까지 읽었고, 외전까지 읽었다. 그 어디에도 노엘이 방금 한 말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