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31자)
수놓던 바늘로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왕실 매사냥은 수도 북쪽 은사슴 숲에서 열렸다. 해마다 성년식 시즌 첫 달 열엿새였고, 사냥 전에 성녀가 매와 말과 사냥꾼을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신전은 무도회 이후 성녀의 외출을 막았지만 왕실 사냥의 축복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엘리스는 구호소에 몰래 다녀온 날 이후 처음으로 대신전 담장 밖에 나왔고, 나오자마자 말똥을 밟았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베티 수녀님. 이것도 축복이에요.”
베티가 무슨 축복이냐는 얼굴로 엘리스의 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스 뒤에는 성기사 루카스가 말을 끌고 서 있었다. 장미 정원 일 이후로, 엘리스가 허락받고 담장 밖에 한 발만 내딛으면 루카스가 따라붙었다. 루카스는 말이 없었다. 하루에 하는 말이 「예」와 「아닙니다」와 「이쪽입니다」 세 가지쯤이었다.
숲 가장자리 풀밭에 왕실 천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매 스무 마리가 횃대 위에서 가죽 두건을 쓴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날개 터는 소리, 방울 소리, 개 짖는 소리, 말이 콧김 뿜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젖은 풀 냄새와 가죽 냄새 사이로 아침 이슬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크레센트 공작 천막 앞에서 승마 장갑을 끼고 있었다. 무릎에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올려 두고 있었다. 엘리스가 축복을 돌며 가까이 오자 이사벨라가 한국말로 말했다.
“리나 잘 먹어요. 어제 빵 세 개.”
“열 내렸어?”
“내렸어요. 어머니가 리나한테 실 감는 거 가르치고 있어요. 접시 떨어뜨린 분이.”
“그 상자 뭐야?”
“자수 상자요. 원작에 이사벨라가 사냥 날 왕태자한테 손수건 주는 장면 있어요. 거절당하고 숲에 버려지는 손수건. 어머니가 그 장면 그대로 시키셔서 사흘 동안 문장 수놨어요.”
이사벨라가 상자를 열어 손수건을 보여 주었다. 하얀 비단에 왕실 문장인 날개 달린 사자가 금실로 수놓여 있었다. 엘리스는 한참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사자야? 닭인데?”
“사자예요.”
“목이 너무 길어.”
“바늘을 처음 잡아 봤다고요. 이 몸 손가락은 바늘을 몰라요. 다리만 춤을 알아요.”
“너 무도회 때 그 말 했어.”
“두 번 해도 사실이에요.”
엘리스가 웃음을 삼키며 이사벨라의 이마에 손끝을 댔다. 축복이었다. 저만치 왕실 천막 앞에서 카시안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매 한 마리가 그의 팔뚝 위에서 날개를 폈다.
*
사냥이 시작되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숲 안쪽에서 개들이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엘리스와 이사벨라는 숲 가장자리 언덕에 있었다. 성녀는 사냥에 들지 않고 숲 입구에서 기도하는 것이 관례였고, 이사벨라는 말에서 떨어질까 봐 무섭다는 핑계로 성녀 옆에 붙어 있었다. 핑계가 아니었다. 이사벨라의 다리는 왈츠는 알았지만 말은 몰랐다.
덤불이 갈라졌다. 처음 나온 것은 카시안의 말이었다. 말이 눈을 뒤집고 언덕 쪽으로 달려왔고, 그 뒤로 검은 덩어리가 덤불을 찢고 튀어나왔다. 멧돼지였다. 어깨 높이가 사람 허리만 했고, 아래 엄니 둘이 누렇게 휘어 있었다. 흙과 피와 사향 냄새가 바람을 타고 언덕까지 끼쳤다.
카시안의 말이 언덕 앞에서 앞발을 들었다. 카시안이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숙였다. 멧돼지는 말을 지나쳐서, 언덕 위의 흰 옷을 향해 곧장 올라왔다. 흰 옷이 가장 잘 보였다.
루카스가 엘리스 앞에 섰다. 창을 낮게 들었고, 발을 땅에 박았다. 멧돼지가 창끝에 부딪혔다. 창대가 활처럼 휘었다가 부러졌다. 부러진 창 끝이 멧돼지 어깨에 박혔고, 멧돼지는 쓰러지면서 고개를 한 번 휘둘렀다. 엄니 하나가 루카스의 오른쪽 허벅지를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루카스가 무릎을 꿇었다. 다리 갑옷 이음매 사이로 피가 쏟아졌다. 쏟아진다는 말 그대로였다. 풀밭이 금세 검게 젖었다.
엘리스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왼손으로 루카스의 허벅지 위쪽을 눌렀다. 한국말이 터져 나왔다.
“대퇴 쪽 아니지, 아니어야 돼, 제발. 야, 채령아! 끈! 아무거나 끈!”
이사벨라가 승마 장갑을 벗어 던지고 제 허리띠를 풀었다. 엘리스가 그 허리띠로 루카스의 허벅지 위쪽을 감아 조였다.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피가 줄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엘리스가 왼손을 상처 위에 얹었다. 손바닥에서 빛이 일었다. 희미했다. 리나의 폐에 쏟고 사흘 동안 다 채워지지 않은 빛이었다. 상처 가장자리가 조금 오므라들었다가, 거기서 멈췄다. 엘리스의 손이 떨렸다. 빛이 꺼졌다.
“안 돼. 모자라. 깊어.”
“어떡해요?”
“꿰매야 돼. 바늘. 실.”
이사벨라가 자수 상자를 열었다. 엘리스가 그 안을 보았다. 은바늘 열두 개, 비단실 여섯 색. 그리고 목이 긴 사자.
“너 진짜 하늘이 보낸 애다.”
“닭이라면서요.”
“닭 덕분에 산다.”
*
엘리스는 바늘을 골랐다. 가장 굵은 것이었다. 사냥 천막에서 끓던 물 주전자를 하인이 들고 뛰어왔고, 엘리스는 바늘과 흰 실을 그 물에 넣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오래 넣지는 못했다. 이사벨라가 아버지의 술병을 가져와 엘리스의 손과 상처 위에 부었다. 독한 포도 증류주 냄새가 피 냄새를 덮었다. 루카스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잡아. 다리. 움직이면 안 돼.”
이사벨라가 루카스의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갑옷이 차고 미끈거렸다. 피가 이사벨라의 승마복 소매로 스몄다. 따뜻했다. 채령은 따뜻하다는 것이 이상했다. 사람 피가 이렇게 따뜻한 줄 처음 알았다.
엘리스가 바늘을 넣었다. 한 땀, 두 땀. 왼손잡이도 아니면서 왼손으로 바늘을 잡았고, 붕대 감은 오른손 손가락 둘로 상처 가장자리를 맞붙였다. 붕대가 피에 젖어 붉어졌다. 엘리스는 땀을 셀 때마다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일곱. 여덟. 루카스 경, 숨 쉬어요. 숨. 네, 그렇게. 아홉.”
언덕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냥꾼, 시종, 귀족들. 카시안이 말에서 내려 맨 앞에 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성녀가 피투성이 무릎을 꿇고 바늘을 들고 있는 그림을, 이 나라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다.
열아홉 땀째에서 엘리스가 실을 끊었다. 이사벨라의 자수 가위였다. 상처는 길고 삐뚤게 이어졌지만 벌어지지 않았다. 엘리스가 다시 왼손을 얹었다. 남은 빛이 실과 실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상처 가장자리가 붉은빛을 잃고 분홍빛이 되었다.
“감을 거. 깨끗한 거.”
이사벨라가 상자 안을 보았다. 깨끗한 천은 하나뿐이었다. 흰 비단 손수건, 목이 긴 금실 사자.
이사벨라가 손수건을 꺼내 엘리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스가 그것을 접어 상처 위에 대고, 남은 허리띠로 묶었다. 카시안의 눈이 그 손수건에 박혔다. 원작에서 그가 숲에 버린 손수건이었다. 지금 그 손수건이 그를 지키다 다친 기사의 다리를 감고 있었다.
카시안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죽은 멧돼지 쪽으로 걸어갔다. 부러진 창대를 뽑아 들고 오래 내려다보았다.
*
숲 가장자리 개울은 손이 시릴 만큼 찼다. 엘리스가 두 손을 물에 담그자 붉은 물이 한 줄기 하류로 풀려 나갔다. 오른손 붕대는 벗겨 내야 했다. 데인 살 위에 남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엘리스의 손이 물속에서 떨렸다. 처음엔 손가락 끝만 떨리더니 손목까지 올라왔다. 이사벨라가 옆에 쪼그려 앉아 그 손을 제 두 손으로 덮었다. 물이 차서 둘 다 손등이 금세 빨개졌다.
“응급실에선 안 떨었는데.”
“거긴 바늘이 수술용이었잖아요.”
“거긴 내가 꿰매다 틀려도 선생님이 다시 해 줬어.”
이사벨라는 대답 대신 손을 더 꽉 쥐었다. 개울 위로 매 한 마리가 낮게 지나갔다. 방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둘은 손을 물에서 꺼내지 않았다.
*
해가 기울 무렵 대신관 오르텐이 숲에 왔다. 성기사가 다쳤다는 전갈을 받고 대신전에서 마차로 달려온 길이었다. 루카스는 성기사단 막사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고, 엘리스는 그 옆 의자에서 피가 마른 붕대를 갈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막사 입구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소매의 피는 검게 굳었다.
오르텐은 루카스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실밥과 금실 사자를 차례로 보았다.
“성녀의 손이 바늘을 든다라.”
“빛이 모자랐습니다.”
“빛이 모자라셨다면, 교단 밖에서 함부로 쓰셨겠지요. 무두질 골목 구호소에서처럼.”
엘리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르텐은 의자를 끌어와 루카스의 머리맡에 앉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루카스 경. 그대는 내 사람이오. 성녀께서 상처를 꿰매실 때 크레센트 영애와 신성어로 무슨 말씀을 나누셨소?”
루카스가 천장을 보았다. 막사 천 위로 저녁 햇빛이 비쳐 노랗게 번졌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기도하셨습니다.”
“무슨 기도?”
“숫자를 세는 기도였습니다. 땀마다 하나씩. 그리고 숨을 쉬라고 하셨습니다.”
“신성어로?”
“예.”
“크레센트 영애는?”
“제 다리를 잡고 계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이사벨라는 기둥에 기댄 채 숨을 참았다. 엘리스가 피 젖은 풀밭에서 「채령아」 하고 이사벨라를 부른 소리를, 루카스는 들었을 것이었다. 이 나라에 없는 이름이었다. 루카스는 그 이름을 빼고 말했다.
오르텐이 루카스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그러고 나서 웃었다.
“좋소. 그대가 성녀의 곁을 그렇게 잘 지킨다니, 오늘부터 밤낮으로 성녀를 모시시오. 대신전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리고 매일 밤 내 방에 와서 성녀께서 하신 기도를 하나도 빼지 말고 고하시오. 다리가 낫는 대로.”
“…예.”
오르텐이 일어섰다. 엘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성녀님. 서약식이 한 달 남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손을 아끼십시오. 바늘은 교단에도 많습니다.”
*
밤이 되자 막사에 등불 하나만 남았다. 이사벨라는 공작 천막으로 돌아갔고, 베티는 막사 밖에서 졸았다. 엘리스가 마지막으로 붕대를 확인하려고 일어섰을 때, 루카스가 눈을 떴다.
“성녀님.”
“아파요? 열 나요?”
“아닙니다.”
루카스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그는 한참 망설였고, 망설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담요 끝을 두 번 접었다 폈다.
“제 어머니는 동쪽 바다 건너 섬에서 왔습니다. 대신전에서 신성어 경전을 베끼는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 옆에서 자랐습니다.”
엘리스의 손이 붕대 위에서 멈췄다.
“성녀님과 크레센트 영애가 하시는 말은, 신성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