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163자)
엘로이즈의 은화 여섯 닢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엘로이즈는 새벽 다섯 시면 빨래방에 내려갔다. 공작저 지하 맨 끝 방이었고, 큰 구리 솥 셋에서 잿물이 끓었다. 벽돌 벽은 늘 축축했고, 잿물 김이 눈을 따갑게 했다. 그 시간에 빨래방에 오는 사람은 엘로이즈뿐이어서, 엘로이즈는 거기서 돈을 셌다.
앞치마 안쪽 주머니에서 무명 주머니를 꺼냈다. 매듭을 풀자 은화가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여섯 닢. 한 닢 가장자리가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대신전 부사제 그레고르가 처음 준 동전이었고, 엘로이즈는 그 찌그러진 동전을 아직 한 번도 쓰지 못했다.
목요일마다 아가씨가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하면 한 닢이었다. 구호소에 누워 있는 동생 리나의 기침약이 일주일에 반 닢이었다. 나머지 반 닢은 모아서, 언젠가 리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공작가의 시녀가 대신전에 아가씨 이야기를 흘리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엘로이즈는 알았다. 그래서 동전을 셀 때마다 손가락이 축축했다. 잿물 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섯 닢이네.”
엘로이즈의 손바닥에서 은화 하나가 떨어졌다. 구리 솥 받침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빨래방 계단 위에 이사벨라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숄 하나만 걸쳤고, 맨발이었다. 무도회에서 벗겨진 뒤꿈치에 천이 감겨 있었다.
“아, 아가씨. 이런 데를…”
“앉아.”
엘로이즈는 앉지 못했다. 이사벨라가 계단을 내려와 떨어진 은화를 주웠다. 찌그러진 동전이었다. 이사벨라가 그 동전을 등불에 비춰 보았다.
“대신전 주조소 표시네. 그레고르 부사제?”
엘로이즈의 무릎이 꺾였다. 잿물로 젖은 돌바닥 위였다.
“아가씨, 제가, 저는…”
“목요일마다 한 닢. 그리고 장미 정원에서 내 잔에 뭘 탔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약초라고 했습니다. 아가씨께서 밤마다 신성어로 문양을 그리시니, 마음이 들떠 계신 거라고, 가라앉혀 드려야 한다고. 해가 되는 건 아니라고, 부사제님이…”
“그 사람 말 믿었어?”
엘로이즈가 대답하지 못했다. 이사벨라가 은화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채령은 이 장면을 원작으로 알지 못했다. 원작 180화에서 엘로이즈는 재판정에 서서 증언하고, 증언이 끝난 뒤 한 문단 동안 우는데, 그 문단에 동생 이름이 한 번 나온다. 리나. 기침병. 구호소. 채령이 아는 것은 그 세 단어뿐이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말하면, 넌 오늘 아침 안에 이 집에서 나가. 추천장 없이. 그럼 수도 어느 집에서도 너 안 받아.”
엘로이즈가 고개를 들었다. 이사벨라의 얼굴은 원작 악녀의 얼굴이었다. 차고 반듯했다. 채령은 그 얼굴을 일부러 쓰고 있었다. 지금 다정하게 굴면 엘로이즈는 오늘 밤 그레고르에게 달려갈 것이었다.
“말 안 할게. 대신 리나, 오늘 내가 보러 간다.”
“네?”
“성녀님이랑 같이.”
*
대신전 구호소는 성벽 동쪽 끝, 가죽 무두질하는 골목 뒤에 있었다. 골목에 들어서자 썩은 가죽 냄새와 석회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쳤다. 이사벨라는 손수건을 코에 대려다 말았다. 엘리스는 대지 않았다. 엘리스는 이 냄새를 알았다. 하수 냄새와 고름 냄새와 끓인 보리죽 냄새가 섞인 냄새. 사람이 많이 누워 있는 곳의 냄새였다.
엘리스는 오늘 공식 외출이 아니었다. 무도회 다음 날부터 교단은 성녀의 사가 축복을 막았고, 대신전 안 기도와 정해진 날의 구호소 방문만 허락했다. 오늘은 정해진 날이 아니었다. 엘리스는 베티에게 대신전 약초밭에 간다고 말하고 나왔고, 베티는 따라나섰다가 골목 입구에서 얼굴이 하얘졌다.
“성녀님, 오늘 구호소는…”
“알아요, 베티 수녀님. 그러니까 잠깐만 봐요.”
구호소 문 앞에 부사제 그레고르가 서 있었다. 마흔쯤 된 남자였고, 배가 나와서 사제복 허리끈이 배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가 엘리스를 보더니 두 팔을 벌려 문을 막았다. 손바닥이 넓고 손톱 밑이 까맸다.
“성녀님. 오늘은 치유일이 아닙니다.”
“환자가 오늘이 치유일인지 알아요?”
“성녀의 치유는 대신관님이 정하신 날, 정하신 사람에게 내려집니다. 신의 은혜가 아무 데나 흩어지면 귀해지지 않지요.”
“그럼 귀해질 때까지 사람들 기침하라고요?”
그레고르의 눈이 엘리스 뒤에 선 이사벨라에게로 갔다. 다시 그 뒤에 선 엘로이즈에게로 갔다. 엘로이즈가 고개를 숙였다. 그레고르의 입가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크레센트 영애까지 오셨군요. 정화 기도를 구호소에서 하시려고요?”
“부사제님 은화 냄새를 따라왔어요.”
이사벨라가 찌그러진 은화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어 보였다. 그레고르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그는 문을 막은 팔을 내리지 않았지만, 팔꿈치가 조금 굽었다.
엘리스가 그 틈으로 들어갔다. 어깨로 그레고르의 팔을 밀었다. 성녀의 흰 소매가 사제의 검은 소매를 스쳤고, 그레고르가 반 걸음 물러섰다. 엘리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관님께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성녀님.”
“하세요. 손 씻고 하세요.”
*
구호소 안은 길쭉한 방 하나였다. 짚을 채운 자리가 서른 개쯤 양쪽 벽에 붙어 있었고, 창문은 전부 닫혀 있었다. 기침 소리가 사방에서 났다. 낮은 기침, 젖은 기침, 숨이 끊어질 듯한 기침. 수녀 둘이 죽 냄비를 들고 돌아다니다가 엘리스를 보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죽이 바닥에 조금 쏟아졌다.
“일어나요. 창문 열어요. 전부.”
한국말이었다. 수녀들이 무릎을 꿇은 채 서로를 보았다. 엘리스가 이 나라 말로 다시 했다.
“창문을 여십시오. 신의 바람이 들어오게.”
수녀들이 뛰어가 창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들어오자 방 안의 냄새가 한 겹 벗겨졌다. 엘리스가 이어서 시켰다. 기침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을 양쪽으로 갈라 눕힐 것, 물은 끓였다가 식혀서 줄 것, 환자를 만진 손은 잿물로 씻을 것. 수녀들은 성녀가 신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줄 알고 받아 적는 시늉까지 했다. 이사벨라는 그 옆에서 이 나라 말로 통역 아닌 통역을 했다.
“성녀님께서, 그 냄비 바닥 탄 거 버리시랍니다.”
“그런 계시도 있습니까, 영애?”
“있답니다.”
리나는 창가 맨 끝 자리에 있었다. 엘로이즈가 거기로 달려갔다. 리나는 열네 살이었고, 언니를 닮아 눈썹이 짙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짚 자리 전체가 흔들렸다. 입가에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
엘리스가 무릎을 꿇었다. 붕대 감은 오른손 대신 왼손을 리나의 가슴 위에 얹었다. 손바닥 아래서 갈비뼈 사이로 숨이 그르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희는 응급실에서 그 소리를 수백 번 들었다. 그 소리 끝에 기계를 달아 준 환자도 있었고, 기계를 달 틈도 없이 보낸 환자도 있었다. 그 마지막 하나를 도희는 아직 이름까지 외우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무언가 빠져나갔다. 미지근한 물이 손목에서 손끝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고, 오늘은 그 물이 평소보다 오래 흘렀다. 엘리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리나의 그르렁거림이 한 번 끊겼고, 다시 이어지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리나가 눈을 떴다. 언니를 보았다.
“언니, 아가씨 옷이 너무 예뻐.”
엘로이즈가 리나의 손을 잡고 엎드렸다. 울음소리가 짚 속으로 묻혔다. 이사벨라는 그 뒤에 서서 숄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원작에서 엘로이즈가 재판정에서 한 문단 동안 우는 장면을, 채령은 지금 다른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엘리스가 일어서다가 비틀거렸다. 이사벨라가 팔을 잡았다. 엘리스의 팔이 차가웠다.
“괜찮아요?”
“한 사람에 이만큼 쓴 거 처음이야. 폐는 무겁네.”
“앉아요.”
“앉으면 못 일어나. 갈 데 있어. 가면서 말해 줘. 어젯밤 그 왕자, 발코니에서 뭐래?”
“성녀한테 뭘 먹였냐고요.”
“뭐라고 했는데?”
“차 한 잔이요. 그것도 성녀님이 직접 끓인 거, 왼손으로, 반은 받침에 흘리면서. 그랬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던데요.”
“진짜 그렇게 말했어?”
“구두 한 짝 손에 들고요.”
엘리스가 웃다가 기침을 했다. 리나의 기침이 옮은 것이 아니라 웃음이 목에 걸린 기침이었다. 수녀 하나가 그 소리에 놀라 창문을 하나 더 열었다.
*
갈 데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구호소 문을 나서자, 그레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대신전에서 온 수사 둘이 함께였다.
“성녀님. 대신관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녀께서 허락 없이 신의 은혜를 쓰셨으니, 그 은혜를 받은 자는 구호소에 머물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리나는 구호소를 떠납니다.”
엘로이즈가 리나를 끌어안았다. 리나는 아직 일어서지도 못했다.
“방금 나은 애를 내보낸다고요?”
“나았다면서요, 성녀님. 나은 사람이 구호소에 있을 까닭이 없지요.”
그레고르가 웃었다. 이번에는 이사벨라 쪽을 보며 웃었다. 은화를 들고 왔던 손을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웃음이었다.
이사벨라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리나는 우리 집으로 와요. 크레센트 공작저가 대신전 구호소보다 침대는 더 많거든요.”
“영애. 공작가가 대신전이 내친 자를 들이는 걸 공작 각하께서도 아십니까?”
“지금부터 알게 되실 거예요.”
*
공작부인은 알게 된 순간 접시를 하나 떨어뜨렸다. 손님방 침대에 무두질 골목 냄새가 밴 열네 살 소녀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서 딸이 직접 이불을 덮어 주고 있었다.
“이사벨라. 너 요즘 정말 무슨 일이니?”
“정화 중이에요, 어머니.”
“정화가 무슨 이런 거니?”
“대신관님이 정화하라고 하셨어요.”
공작부인은 대신관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다물고 나서 바닥의 접시 조각을 보았고, 다시 딸을 보았고, 결국 시녀장을 불러 손님방에 깨끗한 이불을 한 채 더 들이라고 했다. 나가면서 한 번 더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이 화난 얼굴인지 놀란 얼굴인지 채령은 구분하지 못했다.
밤이 깊어 리나가 잠들자, 엘로이즈가 이사벨라의 방에 왔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명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은화 여섯 닢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 옆에 접은 종이 한 장을 놓았다.
“부사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즌 끝, 성녀의 날 사흘 전에 대신전에서 증언할 준비를 해 두라고. 아가씨가 밤마다 그리시는 문양이 무엇인지, 성녀님과 무슨 말을 하시는지. 그리고 문양을 베껴 오라고 하셨습니다.”
채령이 종이를 펼쳤다. 서툴게 베낀 한글이었다. 받침이 엉뚱한 자리에 붙어 있었다. 목요일, 장미 정원, 원작 독살 장면. 엘리스의 첫 쪽지였다. 꿀 이야기까지 있었다.
채령은 웃지 못했다.
“이거 말고 또 있어?”
엘로이즈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쥐었다. 등불 아래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처음 베낀 한 장은, 장미 정원에 가시기 전 날, 이미 부사제님께 드렸습니다. 대신관님께 올라갔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