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04자)

첫 춤은 우리 둘이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왕궁 대연회장 천장에는 마법 등불 삼백 개가 매달려 있었다. 손바닥만 한 유리구 안에서 하얀 불빛이 떨림 없이 타올랐고, 그 빛이 금박 기둥에 부딪혀 사람들 얼굴을 한 겹 더 밝게 칠했다. 현악단이 조율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흘렀다. 첼로 한 대가 같은 음을 세 번 고쳐 잡았다.

이사벨라는 연회장 왼쪽 기둥 옆에 서서 오른발 뒤꿈치를 바닥에서 조금 들고 있었다. 새 구두가 발뒤꿈치 살을 반 마디쯤 벗겨 놓았다. 오늘 무도회에 나가려고 장미 정원 소동 다음 날부터 엿새 동안 춤 선생에게 붙들려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스텝을 알았다. 이사벨라가 열두 살부터 배운 왈츠를 그 다리가 기억하고 있었다. 채령은 다리가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다리가 아니라 손이었다. 왈츠를 출 때 손을 어디에 둘지는 다리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가씨, 저기요.”

엘로이즈가 뒤에서 속삭였다. 장미 정원 이후로 엘로이즈는 말수가 더 줄었다. 깨진 찻잔은 그날 저녁 엘로이즈가 쓸어 갔고, 채령은 그 잔을 누가 탁자에 놓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직은 묻지 않기로 도희와 정했다. 물으면 엘로이즈가 달아날 것이고, 달아나면 원작의 증언대로 갈 길밖에 없었다.

엘로이즈가 가리킨 쪽에서 엘리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흰 드레스에 금실 띠 하나, 오른손에는 여전히 붕대. 엘리스 옆에 대신관 오르텐이 붙어 걸었고, 한 걸음 뒤에 성기사 루카스가 있었다. 엘리스의 얼굴은 성녀답게 고요했다. 채령은 그 얼굴이 입 안에서 무슨 욕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했다.

연회장 끝 높은 단 위에 왕이 앉아 있었고, 그 오른쪽에 왕태자 카시안이 서 있었다. 원작 남주였다. 스물넷, 검은 머리, 원작이 첫 등장에 한 페이지를 쓴 턱선. 채령은 논문에서 그 한 페이지를 ‘남주 외모 묘사의 과잉’ 사례로 인용했다. 실물을 보니 과잉이 아니었다. 채령은 그 사실이 조금 분했다.

“언니한테 올 거예요.”

채령은 엘리스가 축복을 돌며 가까이 왔을 때 한국말로 말했다.

“알아. 백오십 화까지 읽은 사람한테 그걸 설명하냐?”

“원작 4화요. 루미엘에선 시즌 첫 무도회에서 왕태자가 첫 곡을 청하는 사람이 왕태자비 후보예요. 첫 곡 끝나면 반지 나와요. 대신관이 그 자리에서 축복하고요.”

“그거 사실상 청혼이잖아.”

“사실상이 아니라 청혼이에요.”

“나 저 남자랑 결혼하면?”

“교단 축복으로 왕실에 들어가요. 왕실은 성녀를 갖고, 교단은 왕실을 쥐고. 그리고 이사벨라는 질투에 미쳐서 와인을 끼얹어요. 그다음부터 쭉 내리막.”

“와인 끼얹지 마.”

“안 끼얹어요. 근데 언니가 반지 받으면 제가 안 끼얹어도 누가 끼얹었다고 할걸요.”

엘리스가 이사벨라의 이마에 손끝을 댔다. 손끝이 차가웠다. 오르텐이 바로 옆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 나라 말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영애께 축복을.”

“감사합니다, 성녀님.”

오르텐이 미소를 지은 채 이사벨라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정원에서 쓰러지셨다 들었습니다. 숨은 편하십니까?”

“덕분에요, 대신관님.”

“오늘 밤은 무리하지 마십시오. 춤은 숨을 많이 씁니다.”

오르텐은 성녀를 데리고 단 쪽으로 걸어갔다. 단 아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첫 곡이 시작되면 왕태자가 계단을 내려와 성녀 앞에 서기 좋은 자리였다.

*

현악단이 활을 들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가장자리로 물러나면서 가운데에 넓은 대리석 바닥이 드러났다. 등불이 그 바닥에 하얀 원을 그렸다.

카시안이 계단 첫 칸에 발을 디뎠다.

채령은 걸었다. 다리가 먼저 갔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왔다. 기둥에서 단 아래까지 마흔 걸음쯤이었다. 왕태자는 계단 일곱 칸을 내려와야 했다. 채령은 원작에서 이 계단이 몇 칸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마흔 걸음이 일곱 칸보다 짧기를 바랐다.

카시안이 다섯째 칸에 있을 때, 이사벨라가 엘리스 앞에 섰다.

“성녀님.”

목소리가 연회장 끝까지 갔다. 채령이 생각한 것보다 컸다. 이사벨라의 목은 사람을 부르는 데 익숙했다.

“대신관님께서 성녀님이 제 부정을 씻어 주셔야 한다 하셨습니다. 목요일 기도만으로는 모자란 것 같아서요. 오늘 첫 곡을, 정화의 춤으로 청합니다.”

이사벨라가 손을 내밀었다.

연회장이 숨을 멈췄다. 카시안이 여섯째 칸에서 멈췄다. 오르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굳었다. 그가 직접 붙인 말이었다. 성녀가 악녀의 부정을 받았으니 성녀가 씻어 내야 한다고, 그는 대신전 전체가 듣는 데서 말했다. 지금 그 말을 거두면 지난번 박수도 같이 거두어야 했다.

엘리스가 한국말로 아주 작게 말했다.

“너 미쳤냐?”

“네.”

“나 왈츠 못 춰.”

“제가 남자 쪽 할게요. 언니는 세면서 따라와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엘리스가 붕대 감은 오른손을 이사벨라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붕대 아래로 열기가 전해졌다. 아직 덜 아문 살의 열이었다. 채령은 그 손을 너무 세게 쥐지 않으려고 손가락 끝에만 힘을 주었다.

첫 음이 울렸다.

*

현악단이 당황했는지 첫 마디가 반 박자 빨랐다. 이사벨라의 다리는 그 빨라진 박자를 바로 따라잡았고, 엘리스의 다리는 따라잡지 못했다. 엘리스가 첫 바퀴에서 이사벨라의 발등을 밟았다. 새 구두 위였다. 채령은 비명을 삼키고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셋에서 어디로 가?”

“뒤로요. 아니, 언니 기준으로 뒤. 아, 그쪽 말고.”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엘리스가 한국말로 숫자를 세는 소리가 음악 사이로 들렸다. 가장자리에 선 귀족들이 그 소리를 듣고 수군거렸다. 프리실라 하웰이 부채를 펴서 옆 영애에게 속삭였는데, 이번에도 속삭임이 아니었다.

“신성어 성가예요. 성녀님이 춤추시면서 정화 성가를 외시는 거예요. 세 마디씩 끊어서. 어머, 어머, 크레센트 영애가 따라 하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두 번째 바퀴에서 엘리스는 박자를 잡았다. 간호사는 리듬을 금방 탔다. 심폐소생술도 박자로 하는 일이었다. 엘리스가 고개를 들었고, 이사벨라와 눈이 마주쳤다. 등불이 둘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은빛 머리와 금빛 머리가 같은 빛을 받아 번갈아 반짝였다.

“너 진짜 이 몸이 춤을 기억하네.”

“다리만요. 손은 몰라요.”

“손은 잘하고 있어.”

엘리스의 왼손이 이사벨라의 어깨 위에 있었다. 이사벨라의 오른손은 엘리스의 허리에 있었다. 코르셋 위가 아니라 금실 띠 바로 위, 천 한 겹 아래로 숨 쉬는 갈비뼈가 손바닥에 닿는 자리였다. 엘리스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갈비뼈가 손바닥을 조금씩 밀었다. 채령은 박자를 세는 것을 한 번 놓쳤다.

“하나 둘…”

“셋.”

엘리스가 대신 셌다. 그리고 웃었다. 성녀가 웃는 얼굴이 아니라, 한도희가 웃는 얼굴이었다. 입이 한쪽으로 조금 더 올라갔다.

곡이 끝났다. 엘리스가 마지막 바퀴에서 이사벨라의 왼발을 한 번 더 밟았다. 이사벨라가 한국말로 악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고대 신성어의 마침 소리로 들렸는지 박수가 터졌다. 처음엔 몇 사람이었고, 곧 연회장 전체였다. 박수 사이로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악녀와 성녀가 춤을 췄어요. 첫 곡을. 이건 백 년에 한 번 나오는 소문이에요.”

*

박수가 잦아들기 전에 카시안이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왕태자가 직접 바닥을 밟자 박수가 뚝 그쳤다. 그는 엘리스 앞에 섰다. 이사벨라를 보지 않았다.

“성녀. 다음 곡은 내가 청하지.”

반지 상자가 그의 왼손 안에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벨벳 모서리가 비쳤다. 엘리스가 붕대 감은 손을 들어 보였다.

“전하. 손이 이래서, 오늘은 한 곡이 다입니다. 방금 다 썼습니다.”

“그대 손이 다친 것은 저 영애 때문이라고 들었다.”

“제가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대를 그렇게 만든 자리에 저 영애가 있었지.”

카시안이 이제야 이사벨라를 보았다. 눈이 검고 깊었고, 그 깊은 데서 분이 끓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그 눈을 원작에서 백 번은 읽었다. 이사벨라를 볼 때 늘 그 눈이었다.

“크레센트 영애. 그대는 오늘 이 나라의 관례를 춤 한 곡으로 깔아뭉갰다.”

“관례를 깬 적은 없습니다, 전하. 첫 곡이 정화의 춤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법을 아는군.”

“배웠습니다.”

“그럼 이것도 알겠지.”

단 위에서 오르텐이 일어났다. 왕의 옆에 서서, 그는 연회장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촛불이 아니라 등불 아래서 보니 그의 얼굴이 더 희었다.

“폐하. 오늘 성녀께서 보이신 자비를 보니, 성녀의 몸과 마음을 더 일찍 교단이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즌 중순으로 잡았던 성녀 서약식을, 다음 달 열이렛날로 앞당기기를 청합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왕은 이 밤의 소란에 지쳐 보였다. 손짓 하나로 허락이 났다.

엘리스의 손이 이사벨라의 손 안에서 굳었다. 서약식까지는 다섯 주가 남았다. 원래는 일곱 주였다.

오르텐이 단에서 내려와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이사벨라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말했다.

“정화의 춤이라. 영애께서 제 말을 이렇게 귀담아들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 목요일부터는 기도 시간을 두 배로 늘리지요. 무릎이 성하시기를.”

그의 제의 자락이 이사벨라의 맨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단인데도 거칠었다. 오르텐이 연회장 저편으로 멀어지자 엘리스가 한국말로 물었다.

“서약하면 정확히 뭐가 되는데?”

“성녀는 평생 대신전 담장 밖에서 못 자요. 결혼도 교단이 정한 사람하고만. 원작 90화쯤.”

“평생 기숙사 사감이네.”

“사감은 퇴근이라도 하죠.”

엘리스가 웃지 않았다. 붕대 감은 손가락 끝이 이사벨라의 손바닥 위에서 한 번, 아주 약하게 오므라들었다.

*

발코니에는 밤바람이 불었다. 왕궁 정원의 분수 소리가 아래서 올라왔다. 이사벨라가 난간에 기대어 구두 한 짝을 벗었을 때, 문이 열렸다. 카시안이었다. 시종도 없이 혼자였다.

이사벨라는 구두를 도로 신지 않았다. 한 발은 맨발로 차가운 돌 위에 있었다.

“전하.”

“성녀가 그대를 감싼 것이 두 번이다. 대신전에서 한 번, 오늘 한 번.”

“성녀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서요.”

“나는 그대를 안다, 이사벨라. 어릴 때부터. 그대는 평민 성녀를 위해 춤추는 사람이 아니다.”

원작의 이사벨라라면 맞는 말이었다. 채령은 그 말이 맞아서 대답하지 못했다. 카시안이 한 걸음 다가왔다. 분수 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덮지 못했다.

“묻겠다. 성녀에게 무엇을 먹였지?”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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