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71자)

쓴내 나는 홍차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한도희는 이 세계에 온 지 열엿새째 되는 아침에도 꿀과 싸우고 있었다.

“성녀님, 대신관님께서 꼭 발라 드리라고 하셨어요. 들꽃 꿀이에요. 남쪽 수도원에서 올라온 거라 아주 귀한 거고요.”

수련 수녀 베티가 작은 도기 단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스물셋이라고 했고, 웃을 때 앞니 하나가 조금 비뚤었다. 베티의 숟가락 끝에서 금빛 꿀이 길게 늘어져 침대 시트 위로 떨어지려 했다.

“베티 수녀님. 그거 내려놔요.”

“그래도…”

“데인 데 꿀 바르면 개미가 와요. 개미가 오면 덧나요. 덧나면 손을 잘라요.”

베티가 단지를 내려놓았다. 도희가 지어낸 말이었는데 반만 거짓말이었다. 도희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붕대를 다시 감았다. 데인 자리에 물집이 셋 잡혀 있었고, 터뜨리지 않고 깨끗한 천으로 덮어 두었다. 사흘 동안 거처에 갇혀서 한 일이라고는 물집 지키기와, 끓인 물을 식혀 천을 빠는 일과, 수녀들에게 손 씻는 법을 가르친 것뿐이었다. 마지막 일은 아무도 따라 하지 않았다.

성력은 손바닥에서 일어났다. 손을 대면 미지근한 물이 손목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무언가 빠져나갔고, 닿은 사람의 상처가 오므라들었다. 도희는 구호소에서 아이의 찢어진 이마가 제 손 아래서 닫히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봉합 키트 없이 봉합을 끝낸 기분이 들었다. 그 손이 자기 손등 위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오늘 정화 기도는 성녀님께서 직접 집전하시래요.”

“누구 정화요?”

“크레센트 영애요. 대신관님께서, 성녀님이 부정을 받으셨으니 성녀님이 씻어 내셔야 한다고.”

도희는 웃음을 참느라 볼 안쪽을 깨물었다. 오르텐은 악녀를 성녀 앞에 목요일마다 무릎 꿇리는 그림을 그린 모양이었다. 그 그림이 두 빙의자에게 목요일마다 정기 회의를 잡아 준 것을 그는 몰랐다.

*

정화 기도는 대신전 옆 작은 기도실에서 했다. 이사벨라가 무릎을 꿇었고, 엘리스가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베티는 문 옆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영애의 죄를 씻어 주소서.”

엘리스가 이 나라 말로 기도문을 외다가, 같은 숨에 한국말로 이었다.

“연고 가져왔어?”

“가져왔어요. 아버지 주치의 거 훔쳐 왔어요.”

“냄새 뭐야?”

“돼지기름이랑 밀랍이랑, 뭔지 모를 풀.”

“풀은 빼고 바르자. 신이시여, 이 영애를 굽어살피소서.”

베티가 문 옆에서 성호를 그었다. 신성어로 이어지는 기도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베티는 기도가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고, 한 번 몰래 눈물을 훔쳤다.

기도가 끝나자 엘리스는 크레센트 공작가에 축복을 내리러 간다고 했다. 정화받은 영애의 집도 한 번 씻어야 한다는 말을 도희는 그 자리에서 지어냈다. 베티가 따라나섰다.

*

크레센트 공작저의 장미 정원은 원작이 두 쪽을 들여 묘사한 곳이었다. 붉은 장미와 흰 장미가 번갈아 아치를 이루었고, 가운데 대리석 정자에 하얀 탁자가 있었다. 오후 햇볕에 데워진 장미 냄새가 너무 진해서 도희는 첫 숨에 기침을 했다. 정자 기둥에는 오래된 덩굴이 손가락 굵기로 감겨 있었고, 탁자 다리 하나가 조금 짧아서 누군가 접은 천을 받쳐 두었다.

원작에서 이사벨라는 이 탁자에서 성녀에게 독이 든 차를 내민다. 성녀는 마시고 쓰러지고, 왕태자가 달려온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끓여.”

도희가 주전자를 들었다. 오른손을 못 써서 왼손으로 들었는데, 첫 잔에서 물이 반은 받침으로 흘렀다. 시녀 엘로이즈가 수건을 들고 달려왔다가, 이사벨라가 고개를 젓자 정원 입구로 물러갔다. 베티는 그 옆에 섰다. 두 시녀가 나란히 서서 정자를 보았다.

“엘로이즈가 저 쪽지 봤어요.”

채령이 찻잔을 받으며 한국말로 말했다.

“한글을?”

“저주 문양인 줄 알아요. 그날 밤 내내 문 밖에서 서성였어요.”

“원작에서 저 사람 뭐 하는데?”

“마지막에 증언해요. 아가씨가 밤마다 이상한 문양을 그리며 성녀를 저주했다고.”

도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받침에 고인 물이 흔들렸다.

“우리가 증거를 만들어 줬네.”

“제가요. 언니가 썼잖아요. 저는 받았고.”

“언니?”

“서른하나라면서요. 저 스물여덟이에요.”

도희가 잠깐 채령을 보았다. 스무 살 공작 영애의 얼굴로, 스물여덟의 대학원생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한 가닥이 찻잔 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도희가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붕대 감은 손이었다. 채령이 움찔했다.

“아파?”

“아뇨. 언니 손이 아프겠죠.”

“나 괜찮아. 그래서, 외전.”

채령이 숨을 한 번 골랐다. 정원 입구 쪽을 흘끗 보고, 목소리를 더 낮췄다.

“원작은 다 아시죠. 시즌 마지막 날 성녀의 날, 대신전 앞마당에서 마녀 재판. 이사벨라가 타요. 외전은 만약에 이야기예요. 이사벨라가 참회하고 착하게 살면 어떻게 되나. 작가가 독자 투표로 쓴 거.”

“착하게 살면 살아?”

“이사벨라는 살아요. 근데 재판은 열려요. 대신관이 그해 마녀를 하나 태우겠다고 이미 왕한테 말해 놨거든요. 이사벨라가 아니면, 성녀가 가짜 기적을 일으켰다고 걸어요.”

“그럼 내가 타고.”

“네.”

장미 덤불 어딘가에서 벌 한 마리가 붕붕거렸다. 도희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하고 떫었다. 왼손으로 끓인 차였다.

“재판이 마녀 하나를 꼭 태운다. 이 둘 중 누가 착하든 말든.”

“그러니까 재판을 없애야 해요. 누가 타느냐가 아니라, 재판이 아예 열리지 못하게.”

“어떻게?”

“그건 아직 몰라요.”

“논문 쓴 사람이?”

“논문은 결말을 분석하지 고치진 않거든요.”

도희가 웃었다. 응급실에서 보호자에게 나쁜 소식을 전한 다음에 혼자 화장실에서 웃던 웃음과 비슷했다. 채령은 그 웃음을 처음 보았고,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채령은 외전 이야기를 거기서 멈췄다. 외전에서 성녀를 화형대에 세운 마지막 증언이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도희는 묻지 않았다.

*

정원 입구가 시끄러워졌다. 말발굽 소리, 쇠 장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 엘로이즈가 허리를 숙였고, 베티는 무릎을 꿇었다.

대신관 오르텐이 장미 아치 아래로 들어오고 있었다. 은빛 갑옷을 입은 성기사 둘이 뒤를 따랐다. 앞의 한 사람은 키가 컸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채령이 한국말로 빠르게 속삭였다.

“저 사람 루카스. 성기사 부단장. 원작에서 저 끌고 가요. 화형대로.”

“지금 끌고 가러 온 거 아니지?”

“모르겠어요. 원작에 이 장면 없어요.”

오르텐이 정자 계단 아래에서 멈췄다. 장미 냄새 사이로 그의 몸에서 향으로 피우는 몰약 냄새가 났다. 대신전에서 날마다 피우는 향이 옷에 밴 것이었다.

“성녀님. 정화 기도가 길어지신다기에 모시러 왔습니다.”

“아직 축복이 안 끝났습니다, 대신관님.”

“공작가 정원을 다 축복하시려면 해가 집니다. 성녀께서 사가에 오래 머무르시면 말이 납니다. 성녀는 교단의 딸이시니까요.”

“저는 빵집 딸인데요.”

정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스의 눈썹이 한 번 움직였다. 오르텐은 웃었다.

“이제는 교단의 딸이십니다. 시즌 중순에 서약식을 올리면, 더는 누구도 그 사실을 다르게 말하지 못하겠지요. 가시지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목에 감긴 묵주 알이 달그락거렸다. 엘리스가 일어나지 않자, 오르텐이 계단 하나를 올라왔다.

그때 이사벨라가 쓰러졌다.

정말로 쓰러졌다. 의자에서 옆으로 기울었고, 탁자 끝을 붙잡으려다 놓쳤고, 이사벨라의 팔꿈치가 찻잔을 쳐서 홍차가 하얀 탁자 위로 쏟아졌다. 잔이 대리석 바닥에서 깨졌다. 도희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이사벨라의 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댔다.

“맥 빨라요. 숨 얕고.”

한국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나라 말로 바꿨다.

“영애께서 정화 기도 중에 받으신 부정이 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자리를 뜨면 위험합니다.”

“부정이 몸으로 나온다는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만.”

“저도 성녀가 된 지 보름이 안 됐습니다, 대신관님.”

이사벨라가 눈을 감은 채 한국말로 웅얼거렸다.

“코르셋 때문에 진짜 숨 안 쉬어져요. 반은 진짜예요.”

“알아. 가만있어. 명치 누른다.”

“네?”

도희가 이사벨라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코르셋 끈 매듭을 하나 풀었다. 이사벨라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소리가 너무 진짜라서 루카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오르텐이 내려다보았다. 쏟아진 홍차가 탁자 끝에서 한 방울씩 그의 신발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 방울을 한참 보다가, 무릎을 굽혀 이사벨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기도하지요.”

그의 손바닥은 서늘하고 말랐다. 채령의 이마 위에서 그 손이 아주 조금 눌렀다. 기도는 길었다. 끝날 무렵 오르텐이 도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오늘부터 베티 수녀가 성녀님 방에서 함께 지낼 겁니다. 몸이 성치 않으신 분이 밤에 혼자 계시면 안 되지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가에 축복을 내리러 가실 때는 성기사가 모실 겁니다. 루카스 경, 들었소?”

“예.”

루카스의 대답은 짧았다. 오르텐이 일어섰다. 제의 자락에 홍차 얼룩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얼룩을 털지 않았다.

“한 시간 뒤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신의 축복이 영애의 숨과 함께하기를.”

*

오르텐과 성기사들이 장미 아치 밖으로 나가자, 이사벨라가 눈을 떴다. 도희는 아직 무릎을 꿇고 있었다.

“졌네요.”

“졌지. 베티랑 한 방 쓰게 생겼어. 밤에 한국말로 잠꼬대하면 끝이야.”

“언니 잠꼬대해요?”

“응급실 사람들 다 해. 콜 받는 꿈 꿔.”

채령이 웃다가 기침을 했다. 도희는 그 등을 몇 번 두드려 주고, 바닥에 깨진 찻잔 조각을 주우려다 멈췄다.

쏟아진 홍차가 대리석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정원의 장미 냄새가 진했는데, 그 냄새를 뚫고 다른 냄새가 올라왔다. 쓴내였다. 덜 마른 약초를 불에 그을렸을 때 나는, 혀뿌리가 저릿해지는 냄새.

도희가 끓인 주전자는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 도희는 주전자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떫은 찻잎 냄새뿐이었다. 다시 바닥에 엎어진 이사벨라의 잔으로 고개를 숙였다. 쓴내는 거기서만 났다.

“이거, 마셨어?”

“아직요. 한 모금도.”

“잔 누가 놨어?”

채령이 정원 입구를 보았다. 엘로이즈가 수건을 쥐고 서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 정원에서 악녀가 독을 탔다. 원작 어디에도 악녀의 잔에 독이 든 장면은 없었다.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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