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67자)
…한국인?
악녀와 성녀가 손을 잡았다 · 백해원
루미엘 왕국 수도의 대신전은 아침부터 촛농 냄새로 숨이 막혔다. 성년식 시즌 첫날이었다. 스무 살이 된 귀족 자녀들이 사교계에 처음 나서는 넉 달이 오늘 열렸고, 그 첫 행사가 새 성녀의 공표식이었다. 천장 높이까지 쌓인 흰 초 수백 자루가 한꺼번에 녹으면서 기름 냄새와 꿀 냄새를 섞어 내뿜었고, 그 아래 귀족들은 비단 소매로 코를 가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윤채령은 맨 앞줄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크레센트 공작 영애 이사벨라의 몸이 맨 앞줄에 서 있었고, 채령은 그 안에서 코르셋 끈이 갈비뼈를 몇 개째 누르는지 세고 있었다. 넷째에서 셈을 그만두었다.
사흘 전, 채령은 학교 도서관 열람실에서 논문 3장 초고를 쓰다가 엎드려 잠들었다. 깨어 보니 장미 무늬 천장이 있었고, 거울 속에 은빛 머리를 늘어뜨린 스무 살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을 채령은 알았다. 웹소설 『루미엘의 성녀』의 악녀, 이사벨라 드 크레센트. 채령의 논문 제목은 「한국 로맨스판타지의 악녀 서사 연구」였고, 이 작품은 3장 첫 번째 사례였다.
그리고 오늘이 3화였다.
원작 3화에서 이사벨라는 무릎 꿇은 성녀 앞으로 걸어가 뺨을 때린다. 성수 그릇이 엎어지고, 은그릇이 대리석 바닥에서 세 번 튄다. 왕태자가 성녀를 일으키고, 사교계가 악녀를 등진다. 채령은 그 장면에 각주를 네 개 달았다. 독자의 분노를 한곳에 모으는 장치, 라고 썼다.
“아가씨.”
뒤에서 시녀 엘로이즈가 속삭였다. 엘로이즈의 손이 이사벨라의 소매 끝을 아주 조금 잡아당겼다.
“공작 각하께서, 오늘은 성녀에게 고개를 숙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숙일 생각 없어.”
“그럼, 다행입니다.”
엘로이즈가 손을 놓았다. 채령은 고개를 숙일 생각도 없었지만 때릴 생각은 더 없었다. 원작대로 가면 이 뺨 한 대가 넉 달 뒤 화형대의 첫 장작이 된다.
제단 위에서 은방울이 울렸다. 대신관 오르텐이 걸어 나왔다. 쉰을 넘긴 남자였고, 은실로 짠 제의가 걸음마다 바닥을 쓸었다. 머리는 반쯤 희었는데 목소리는 젊었다. 그가 두 손을 들자 수백 개 촛불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였다.
“루미엘의 자녀들이여. 신께서 이 땅에 다시 손을 내미셨습니다.”
옆문이 열리고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엘리스. 수도 변두리 빵집 딸이었다가 열흘 전 구호소에서 죽어 가던 아이의 손을 잡고 빛을 낸 사람. 원작이 쉰 줄을 들여 묘사한 금발은 오늘 수수하게 땋여 있었고, 맨발이었다. 대리석이 차가웠는지 엘리스는 발가락을 한 번 오므렸다가 폈다.
공표식은 원작대로 흘렀다. 오르텐이 엘리스의 이마에 성유를 발랐고, 엘리스가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르텐이 성수 그릇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둘을 합친 크기의 은그릇이었고, 테두리에 포도 덩굴이 새겨져 있었다. 깨끗한 손은 그 안의 성수가 차게 받고 마녀의 손은 끓는다고, 이 나라 아이들은 다섯 살 때부터 배운다.
“성녀께서는 이제 내려가 귀족들을 축복하십시오.”
엘리스가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맨 앞줄 끝에서부터 한 사람씩 이마에 손끝을 댔다. 백작, 백작부인, 자작의 아들. 채령은 원작 문장을 머릿속으로 따라 읽었다. 성녀가 이사벨라 앞에 섰을 때, 이사벨라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평민 주제에.
엘리스가 이사벨라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엘리스의 얼굴 오른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눈 밑은 거뭇했고 입술은 텄다. 엘리스가 손끝을 들어 이사벨라의 이마에 대려다가,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제발 때리지 마라, 부기 겨우 빠졌는데.”
한국말이었다.
“안 때려요.”
채령의 입에서도 한국말이 나갔다. 생각보다 먼저였다.
둘 다 굳었다. 엘리스의 손끝이 이사벨라의 이마 앞 한 뼘에서 멈췄다. 촛농 한 방울이 어디선가 떨어져 바닥에서 탁 소리를 냈다.
“…한국인?”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같은 높이, 같은 억양이었다.
뒷줄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하웰 백작가의 프리실라였다. 프리실라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옆 사람에게 속삭였는데, 그 속삭임은 대신전 반쪽까지 들렸다.
“들으셨어요? 고대 신성어예요. 성녀님이 크레센트 영애께 고대 신성어로 축복을 내리셨어요. 영애도 신성어로 답하셨고요.”
엘리스가 손끝을 마저 대며,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서울. 신촌. 도서관에서 자다가.”
“나 강남 쪽 응급실. 당직실에서 자다가. 십육 시간 근무 끝나고.”
“이거 몇 화까지 읽었어요?”
“백오십. 나이트 근무 때 휴게실에서. 그다음은 못 읽었어.”
“저는 외전까지 다 읽었어요. 논문 써서.”
엘리스의 손끝이 이마에서 떨렸다. 이사벨라는 성녀의 축복을 받는 영애의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입만 바빴다.
“그럼 알겠네. 나 뺨 맞고, 그거 넉 달 동안 다 쌓이고, 마지막에 너…”
“제가 타죠. 원작에선.”
“외전은?”
채령이 대답하기 전에, 제단 위에서 오르텐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크레센트 영애.”
수백 개 고개가 한꺼번에 돌았다. 오르텐은 성수 그릇을 든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걸음이 느렸다. 느린 걸음이 사람을 더 오래 보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성녀께 무엇을 속삭이셨소?”
“축복에 감사드렸습니다, 대신관님.”
“신성어로?”
“집안에 전해 오는 기도문입니다.”
“크레센트 공작가에 신성어 기도문이 전해 온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오르텐이 웃었다. 웃음이 부드러웠고, 눈은 하나도 웃지 않았다. 그가 이사벨라 앞에 멈춰 서서 은그릇을 내밀었다. 그릇 안에서 성수가 잔잔했다.
“그러면 이 그릇이 영애의 손을 차게 받겠지요. 성녀께서 처음 축복하신 손이니, 모두 앞에서 한 번 보이십시오.”
채령은 이 장면을 몰랐다. 원작 3화에 없었다. 원작의 이사벨라는 여기서 뺨을 때렸고, 오르텐은 그릇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뺨을 안 때렸더니 대신관이 직접 장작을 들고 왔다.
이사벨라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수면에 가까워지자, 성수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처음엔 한 가닥이었고, 곧 그릇 전체에서 하얗게 올라왔다. 작은 거품이 바닥에서 하나, 둘 떠올랐다.
대신전이 술렁였다. 누군가 “마녀”라고 말했다. 그 말이 다음 사람의 입으로, 그다음 사람의 입으로 옮아갔다.
엘리스가 그릇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릇의 은 테두리를 손등으로 한 번 스쳤고, 바로 손을 뗐다. 엘리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한국말로,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그릇이 밑에서부터 뜨거워. 물이 아니라 은이 달궈져 있어.”
“네?”
“손 넣지 마. 화상 2도야, 저 정도면.”
채령이 손을 멈췄다. 그러자 오르텐이 그릇을 한 뼘 더 들이밀었다.
“영애. 손이 떨리십니까?”
엘리스가 먼저 움직였다. 성녀의 흰 소매가 이사벨라의 손과 그릇 사이로 들어갔고, 엘리스가 제 오른손을 성수 속에 통째로 담갔다.
거품이 엘리스의 손목까지 올라왔다. 엘리스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손등의 핏줄이 섰고, 어금니를 무는 소리가 채령에게까지 들렸다. 엘리스가 대신전 전체를 향해 말했다. 이번에는 이 나라 말이었다.
“성수가 성녀의 손에서도 끓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마녀입니까?”
조용해졌다. 촛불 타는 소리만 남았다.
엘리스가 손을 뺐다. 손등부터 손가락 마디까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물방울이 대리석 위로 떨어졌다. 엘리스가 그 손을 가슴께로 올렸을 때, 손끝에서 희미하게 빛이 일었다가 꺼졌다. 상처는 그대로였다.
채령은 그 장면을 알았다. 원작 12화 각주에 적어 둔 설정이었다. 성녀가 손을 대면 남의 상처는 아물지만 제 상처는 그대로다. 성력은 남만 고친다.
오르텐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 무언가가 지나갔다. 그리고 곧 부드러운 웃음으로 돌아왔다. 그가 은그릇을 내리고 두 팔을 벌렸다.
“보십시오. 성녀께서 크레센트 영애의 부정을 제 손으로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녀의 자비입니다.”
박수가 터졌다. 앞줄 백작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채령은 박수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졌다. 같은 장면이 그대로 악녀를 위한 장작이 되어 있었다.
“크레센트 영애는 오늘부터 목요일마다 대신전에 나와 정화 기도를 드리십시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성녀께서는 허락 없이 그릇에 손을 대셨으니, 오늘부터 사흘 동안 거처에서 나오지 않으실 겁니다. 몸을 돌보셔야지요.”
오르텐이 엘리스의 데인 손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스는 그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신의 축복이 두 분과 함께하기를.”
*
크레센트 공작저의 저녁 식탁은 은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공작은 수프를 한 숟갈도 뜨지 않고 딸을 노려보았고, 공작부인은 포크로 같은 감자를 다섯 번째 찌르고 있었다.
“대신관 앞에서 그릇에 손을 못 넣은 딸을, 나는 내일 왕궁에서 뭐라고 설명해야 하느냐?”
“그릇이 달궈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누가 그걸 믿겠느냐?”
“성녀가 손을 넣었잖아요. 그 손 보셨잖아요.”
“그러니까 더 문제다. 평민 성녀가 공작가의 딸을 감쌌다. 내일부터 사교계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느냐?”
채령은 안다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원작에서 사교계는 이 시점부터 이사벨라를 등졌다. 지금은 아마 다르게 떠들 것이다. 어떻게 다를지는 채령도 몰랐다.
방으로 돌아오니 엘로이즈가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있었다. 탁자 위에 대신전 문양이 찍힌 꽃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흰 백합 사이에 접힌 종이가 꽂혀 있었다.
“대신전에서 왔습니다. 성녀님 거처에서요. 정화 기도용 꽃이라고…”
채령이 종이를 펼쳤다. 삐뚤빼뚤한 한글이었다. 왼손으로 쓴 글씨였다.
목요일 정화 기도 끝나고, 너네 장미 정원. 원작 독살 장면 거기. 이번엔 차 내가 끓임. 손은 괜찮음, 2도. 연고 가져와. 여기 수녀들 데인 데다 꿀 바름. 꿀. 내가 빵이냐?
채령은 웃음이 터질 뻔해서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응급실 간호사가 이 세계에 와서 맨 처음 싸운 상대는 대신관이 아니라 꿀 단지를 든 수녀들이었던 모양이다.
“아가씨.”
엘로이즈가 등 뒤에 와 있었다. 엘로이즈의 눈이 종이 위의 글씨에 박혀 있었다. 동그라미와 막대와 갈고리가 얽힌 모양을, 엘로이즈는 숨을 멈추고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문양입니까?”
“기도문.”
“신성어로요?”
“응.”
엘로이즈가 한 걸음 물러섰다. 앞치마를 쥔 손이 떨렸다. 벽난로 불빛이 엘로이즈의 얼굴 반쪽만 비췄고, 그 반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네, 아가씨. 기도문이군요.”
엘로이즈는 방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종이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모양을 외우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