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18자)
값을 올려 준 사람
악녀는 결혼 첫날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 서지오
대신전 성녀 처소의 초는 밤마다 반만 탔다. 루시아가 그렇게 정했다. 반만 태우고 끄면 남은 반을 고아원 아이들 방에 보낼 수 있었다. 그날 밤도 초가 반쯤 내려왔을 때 문밖에서 근위병의 갑옷 소리가 났고, 루시아는 초를 끄지 못했다.
레오니스는 혼자 들어왔다. 그는 처소 안을 둘러보았다. 좁은 침대, 기도대, 아이들이 그려 준 그림 몇 장. 그림 하나에는 성녀가 해처럼 웃고 있었는데, 그린 아이가 해를 그리다 지쳤는지 얼굴 절반이 노란 덩어리였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오.”
“전하는 미안한 일을 늘 늦은 시간에 하시죠.”
레오니스가 웃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서서 말하는 쪽이 이 방의 주인처럼 보였다.
“내일 길드에서 로웬 영애의 장사를 심사하오. 성녀가 한마디만 해 주면 되오. 남문 밖 시장에서 그 여자가 성녀의 옷감을 빼앗으려 했고, 성녀가 겁이 나서 비싼 값을 치렀다고.”
“그런 일은 없었어요.”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성녀가 말하는 대로 정해지오.”
루시아는 초를 보았다. 촛농이 한 방울 흘러내려 촛대 받침에 굳었다. 그녀는 대신관이 처음 그녀를 이 처소에 들이던 날을 떠올렸다. 대신관은 성녀가 황태자비가 되면 신전의 금고가 다시는 비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대신관은 그녀의 눈이 아니라 신전 지붕의 깨진 기와를 보고 있었다.
그날부터 루시아는 알았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야기에는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야 했다.
“전하.”
“말하시오.”
“그날 저는 그 사람에게 옷 세 벌을 샀어요. 은화 넷이라는 걸 다섯 쳐서요. 그건 겁이 나서 한 일이 아니었어요. 전하 앞에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드리고 싶어서 한 일이었어요.”
레오니스의 웃음이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거절이오?”
“네.”
“고아원은 겨울마다 황실 지원금으로 장작을 사지.”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흔들릴 것 같았다. 아이들 방의 벽난로가 떠올랐다. 지난겨울 장작이 떨어진 사흘 동안 아이들은 한 침대에 넷씩 붙어 잤다.
“올겨울 지원금은 없을 거요. 성녀가 아이들보다 악녀를 아끼니.”
“전하. 아이들 장작으로 저를 사시려는 거예요?”
“사는 게 아니오. 셈을 알려 주는 거지.”
그가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고 돌아섰다.
“성녀가 악녀 편을 드는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않소. 이 제국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없으니까.”
문이 닫혔다. 루시아는 오래 서 있다가 초를 껐다. 반이 조금 넘게 탄 초였다. 오늘은 고아원에 보낼 초가 조금 짧았다.
*
그날 아침 하숙집을 나서기 전에 한나가 내 머리를 땋았다. 손이 떨려서 세 번을 풀었다 다시 땋았다. 세 번째에 내가 거울 속에서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몇째 날이야?”
“스무여드레째요.”
“심사에서 떨어지면 내가 화를 낼지도 몰라.”
“그럼 스무아흐레째 날에 다시 세면 돼요. 아가씨가 화를 내는 거하고 손을 드는 건 다르니까요.”
한나는 마지막 머리끈을 묶고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베르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게를 봐야 한다고, 견습생 둘이 또 할 일이 없다고. 도라는 어젯밤 소금 단지를 끌어안고 잠들었다는 소식만 골목 아이 편에 보내왔다. 무슨 뜻인지 나는 몰랐다.
*
길드 회관의 심사실은 삼층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한나가 세 번 넘어질 뻔했다. 긴장하면 다리가 꼬인다고 했다. 나는 다리보다 배가 꼬였다.
심사실에는 긴 탁자 하나가 있었고, 탁자 저편에 원로 다섯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가 그레고르였다. 그 왼쪽에 곡물상, 사흘을 못 버틴다고 은화를 건 사람이었다. 오른쪽에 포목상, 닷새에 건 사람이었다. 나머지 둘은 향신료상과 선주였다. 탁자 위에는 내 매상표가 펼쳐져 있었다. 금화 스물셋.
그레고르가 수염을 쓸었다.
“숫자는 맞소. 그런데 숫자가 맞다고 장사가 맞는 건 아니오. 셋을 묻겠소.”
“네.”
“첫째. 앞치마에 먹인 생선 기름은 생선 조합의 물건이오. 조합에 값을 치렀소?”
“생선 골목에서 날마다 통으로 버리는 찌꺼기였어요. 도라 씨가 거저 줬고, 통은 돌려줬어요.”
“거저 받은 물건으로 이익을 냈다면 그건 이익이 아니라 얻어먹은 거요.”
곡물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아르덴 공작가가 앞치마 열두 장을 샀소. 부인의 남편 집안이. 귀족이 뒤를 봐주는 장사는 길드 장사가 아니오.”
“공작가 부엌장이 샀어요. 열두 장에 은화 서른여섯. 다른 손님하고 같은 값이에요.”
“부엌장 뒤에는 공작이 있지.”
향신료상이 웃었다. 그레고르는 매상표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작가 열두 장을 빼면 은화 서른여섯이 빠지오. 금화로 셋하고 은화 여섯. 남는 건 열아홉 닢 하고 조금. 평균 스물에 못 미치오.”
나는 그 숫자를 머릿속으로 다시 셌다. 맞았다. 로더릭이 생선 비늘 하나 묻히지 않고 가져간 그 열두 장이 없으면 나는 떨어졌다. 공작이 읽지도 않는 소식지를 서랍에 넣는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공작가 부엌장은 다른 손님하고 똑같이 줄을 섰어요. 아흐레째 오후에요. 도라 씨가 봤어요.”
“줄을 섰든 안 섰든 공작가 돈이오.”
“그럼 포목상님 댁 돈은요? 곡물상님 댁 돈은요? 그분들 부인도 제 앞치마를 사 가셨는데요.”
포목상이 헛기침을 했다. 곡물상은 못 들은 척 창밖을 보았다. 그레고르는 매상표를 덮었다.
“셋째. 수도에 소문이 돌고 있소. 부인이 시장에서 성녀를 위협해 비싼 값에 옷을 팔았다고. 성녀를 협박한 사람에게 길드 인장을 내줄 수는 없소.”
그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지 나는 알았다. 그레고르의 외투 안으로 들어간 자주색 주머니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면 증거 없는 모함이 되었다.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에요.”
“증거가 있소?”
“없어요.”
“그럼 판정하지.”
그레고르가 손을 들려는 순간 아래층에서 소란이 일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 그리고 문지기의 고함. 심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도라였다. 기름 먹인 앞치마를 두른 채였고, 그 뒤로 생선 골목 여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비린내가 심사실을 단번에 채웠다. 선주가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그 여자들 뒤에서 비단옷을 입은 부인 셋이 들어왔다. 셋 다 진주 단추 앞치마를 비단 드레스 위에 두르고 있었다.
포목상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여보?”
포목상의 아내가 남편 앞까지 걸어가서 앞치마 자락을 손으로 툭 쳤다. 진주 단추가 서로 부딪혀 작게 울렸다.
“이거 내가 금화 하나 주고 샀어요. 내 돈으로. 이 여자가 날 협박했으면 내가 진주 단추를 골랐겠어요? 당신, 내가 돈 쓴 데까지 심사해요?”
포목상이 앉았다. 곡물상 옆에 곡물상의 아내가 와서 섰다. 향신료상의 아내도 남편 어깨 뒤에 섰다. 원로들의 등 뒤에 부인들이 한 사람씩 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심사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도라가 탁자 앞으로 나섰다.
“생선 기름은 내가 줬어. 버리는 거라서. 길드장님은 우리가 기름 버릴 때 한 번이라도 값을 쳐 준 적 있어? 없지? 그럼 지금 와서 그게 물건이라고 하지 마.”
그레고르의 수염이 내려갔다.
“이건 길드 심사요. 생선 장수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오.”
“그럼 성녀님은 끼어들 자리예요?”
문간에서 목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루시아가 회색 수녀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소매는 내려와 있었다.
“소문이 저를 두고 도는 거라서 왔어요.”
루시아가 탁자 앞까지 걸어왔다. 그레고르가 일어섰다. 다른 원로들도 따라 일어섰다.
“저는 남문 밖 시장에서 이 사람에게 옷 세 벌을 샀어요. 이 사람은 은화 넷을 불렀고, 저는 다섯을 냈어요.”
루시아가 그레고르를 똑바로 보았다.
“길드장님은 장사를 오래 하셨죠. 협박당한 사람이 값을 올려 주는 걸 보신 적 있으세요?”
그레고르가 대답하지 못했다. 장사꾼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도 서울에서 칠 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판정하시죠. 저는 여기 서서 보겠어요.”
*
손은 셋이 올라갔다. 포목상, 향신료상, 그리고 한참 망설이던 선주. 선주의 아내는 오지 않았는데, 선주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손을 들었다. 비린내에 항복한 손이었다. 곡물상과 그레고르는 손을 들지 않았다.
그레고르가 천천히 앉았다.
“셋 대 둘. 인장은 주지.”
한나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손톱이 살에 박혔다. 생선 골목 여자들이 함성을 지르려는 순간 그레고르가 손을 들었다.
“다만 조건이 있소. 견습 상인은 정식 상인 하나가 자기 인장을 걸고 보증해야 하오. 견습 상인이 길드 규칙을 어기면 보증인도 인장을 잃소. 이 여자를 보증할 사람이 있소?”
심사실이 조용해졌다. 생선 골목 여자들은 길드 상인이 아니었다. 부인들도 아니었다. 그들의 남편은 방금 손을 들었지만, 자기 인장까지 걸 사람은 없었다. 포목상이 아내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여기.”
문간에서 누가 말했다. 베르였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그녀는 목에 건 매듭 끈 아래에서 가죽끈에 꿴 놋쇠 인장을 꺼냈다. 인장의 테두리가 닳아 둥글었다.
“오델 베르. 정식 상인. 스물두 해째요.”
그녀가 인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놋쇠가 나무에 닿는 소리가 났다. 나는 베르를 보았다. 성녀 예복 주문을 잃은 지 이레 된 여자였다. 그 주문은 나 때문에 날아갔다.
“사장님.”
“입 다물어. 실패하면 내가 너를 죽이고 고향 간다.”
“네.”
“이번엔 농담 아니다.”
“이번에도 네.”
그레고르가 베르의 인장을 집어 들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게 길드 인장이 담긴 작은 상자를 밀어 주었다. 견습 상인의 인장이었다. 정식 인장보다 반 치 작았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날을 정하시오. 베르 의상실 인수 계약.”
“모레요.”
“좋소. 그리고 알려 두지. 그날 황궁 사람이 입회할 거요.”
“왜요?”
“황실 지시요. 이혼이 아직 서지 않은 귀족 부인이 가게를 사는 일이니까.”
그는 웃지 않았다. 수염만 아주 조금 올라갔다. 루시아가 문간에서 내 쪽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는데, 소매 끝을 쥔 손가락이 하얬다. 올겨울 장작값을 나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