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22자)
아직 안 냈소
악녀는 결혼 첫날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 서지오
베르 의상실의 진열창 안에는 이제 머리 없는 나무 인형이 셋 서 있었다. 하나는 스물두 매듭, 하나는 스물다섯, 하나는 스물여덟. 맨 끝에는 인형 대신 옷걸이 하나가 따로 걸려 있었고, 거기에 기름 먹인 무명 앞치마가 진주 단추를 달고 걸려 있었다. 베르는 그 옷걸이를 보고 사흘 내내 혀를 찼다. 그래도 치우지는 않았다.
금빛 비단 예복은 가게 안쪽 벽으로 옮겨졌다. 첫날 내가 끌어안고 돌리다가 받침으로 바닥을 긁었던 그 인형이 이제 벽을 등지고 손님을 보고 서 있었다. 바닥에는 그날 긁힌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계약서는 계산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베르가 직접 썼다. 글씨가 바늘땀처럼 촘촘했다.
“가게값은 금화 이백. 이익에서 달마다 나눠 낸다. 두 해 안에 다 못 내면 가게는 도로 내 거다.”
“네.”
“이름은 베르 의상실 그대로.”
“네. 손님들이 그 이름을 알아요.”
“내가 고향 가도.”
“사장님이 고향 가셔도요.”
베르가 매듭 끈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오늘은 끈을 목에 걸지 않고 손에 감고 있었다. 나는 그 끈을 보았고, 베르는 내가 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안 판다.”
“안 사요.”
“고향 갈 때 생각해 보지.”
“생각해 보시는 거죠?”
“생각만.”
한나가 문간에서 손님을 막고 있었다. 계약하는 날이라 가게를 오전에만 닫았는데, 생선 골목 여자들이 아침부터 진열창에 코를 박고 있었다. 도라는 소금 단지를 옆구리에 끼고 왔다. 오늘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
정오 종이 울리자 가게 앞에 마차가 섰다. 검은 마차였고, 마부의 장갑 끝에 금실 태양이 있었다.
내리는 사람이 시종관일 줄 알았다. 레오니스였다. 그레고르 바스티안이 그 뒤를 따라 내렸다. 그레고르의 수염은 오늘 유난히 빳빳하게 말려 있었다. 생선 골목 여자들이 길을 비켰다. 도라가 소금 단지 뚜껑에 손을 얹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라가 아쉬운 얼굴로 손을 내렸다.
레오니스는 종을 울리며 들어와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진열창의 인형 셋, 진주 단추 앞치마, 벽으로 옮겨진 금빛 예복. 그는 금빛 예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가게가 불타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저도 들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도요.”
“누구요?”
“원작의, 아니 소문 속의 악녀요. 그런데 그 악녀는 지금 이 가게를 사고 있네요.”
레오니스가 웃었다. 그는 계산대로 와서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맨 아래 서명란 옆에 내가 미리 써 둔 이름이 있었다. 비올렛 로웬.
“로웬이라 썼군.”
“제 이름이니까요.”
“황궁 문서청에 부인의 이혼 서류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소. 오늘 아침까지.”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판결이 난 지 열이레가 지나 있었다. 사십 일 가운데 열이레. 카일은 그 사이 한 번도 서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게 바보였다.
“그러니 문서청이 아는 부인의 이름은 아직 비올렛 아르덴이오. 공작 부인이 가게를 사는 계약이지. 아르덴 공작가의 재산이 되는 가게.”
그레고르가 헛기침을 했다. 베르의 손이 매듭 끈을 꽉 쥐었다.
“그건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
“서른 날 안에 메이에게 삼백을 갚으면 이혼은 무르지 않아요. 남은 날은 열사흘이고, 저는 아직 백 하고 조금밖에 못 모았어요. 그래도 갚을 거예요. 그리고 공작님은 서류를 내실 거예요. 그럼 이 가게는 로웬 거예요.”
레오니스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황실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계약서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럼 이것도 상관없겠지.”
소환장이었다. 베르 의상실 뒷골목 방화 미수 사건을 황궁 재판에 부친다. 피고 아르덴 공작 부인 비올렛 아르덴.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피고를 맞아들인 아르덴 공작가는 재판에 함께 나와 책임을 답할 것.
“황궁 재판은 귀족 법정과 다르오. 원로 열둘이 앉지 않지. 황제 폐하를 대리하는 사람 하나가 판결하오.”
“전하요?”
“나요.”
그는 아주 다정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원작 2권 표지와 똑같아서 나는 잠깐 웃음이 날 뻔했다. 독자들은 그 표지를 보고 태양 오빠라고 불렀다. 그 독자들 가운데 이 남자의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재판은 건국제 전에 열리오. 그전에 부인이 공작 부인이든 아니든, 이 사건의 피고는 소환장에 적힌 이름이오.”
나는 소환장을 계약서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펜을 잉크에 담갔다.
“서명해도 되죠? 입회하러 오셨잖아요.”
레오니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손님에게 길을 내주는 점원처럼.
“하시오.”
나는 서명란에 펜을 댔다. 비올렛 로웬. 이미 써 둔 이름 위에 다시 한 번 덧써서 굵게 만들었다. 베르가 그 옆에 자기 이름을 썼다. 그레고르가 견습 상인 인장을 찍었다. 놋쇠가 종이를 누르는 소리가 나고, 찍힌 자리에서 봉랍 냄새가 났다. 베르의 정식 인장이 그 옆에 찍혔다. 보증인의 자리였다.
“축하하오, 아르덴 공작 부인.”
레오니스가 말했다. 그리고 종을 울리며 나갔다. 그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도라가 참지 못하고 소금 한 움큼을 마차 바퀴에 뿌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마차가 떠난 뒤에도 그레고르는 가게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외투 안쪽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자주색 벨벳이 아니었다. 낡은 소가죽이었다.
“회관 내기 은화요. 열흘 쪽에 건 사람은 부인 하나였지.”
“그걸 왜 길드장님이 갖고 계세요?”
“내기판은 길드장이 맡소. 길드는 내기 빚은 갚소. 다른 빚은 몰라도.”
주머니를 열어 보니 은화가 수북했다. 세어 보지 않아도 무거웠다. 그레고르는 수염 끝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견습 상인은 석 달마다 심사를 받소. 다음 심사 때도 생선 골목 여자들을 몰고 오면, 그땐 회관 바닥을 부인이 닦으시오.”
“다음엔 진주 단추 단 분들만 모시고 갈게요.”
“그게 더 무섭소.”
그는 돌아서다가 진열창의 앞치마를 보았다. 아주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사흘 뒤 그레고르의 아내가 진주 단추 앞치마를 사러 오게 될 줄은 그때 아무도 몰랐다. 나도 몰랐다.
*
오후에는 가게 문을 열었다. 생선 골목 여자들이 몰려 들어와 진열창의 인형을 하나씩 끌어안았다. 한나가 안 된다고 소리치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같이 웃었다. 세탁장의 덩치 큰 여자가 딸을 데려와서, 깃이 안 줄어든 옷을 입은 딸을 내 앞에 세워 놓고 한 바퀴 돌게 했다. 딸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돌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해 질 녘에 신전 소년 하나가 꾸러미를 들고 왔다. 루시아가 보냈다. 안에는 반쯤 탄 초 열 자루와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게 밝히세요. 아이들 방에는 아직 남았어요.” 나는 그 초를 계산대 밑에 넣었다. 마도 등불이 있어서 쓸 일은 없었다. 쓸 일이 없어도 버릴 수는 없었다.
메이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금고에 금화 백세 닢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뚜껑을 닫았다. 삼백까지 백아흔일곱. 열사흘.
그레고르가 놓고 간 내기 은화는 금고에 넣지 않았다. 손수건에 따로 싸서 한나의 보따리 맨 밑에 밀어 넣었다. 서른 날 가까이 품삯 한 닢 없이 내 뒤를 따라다닌 사람이었다. 한나는 내일 아침 보따리를 풀다가 그걸 찾아내고 소리를 지르겠지. 그 소리를 미리 듣는 것 같아서 나는 혼자 조금 웃었다. 웃다가, 한나가 오늘 밤에는 몇째 날을 셀지 생각했다. 서른째였다.
밤 열한 시, 마지막 손님이 나갔다. 베르는 견습생들을 데리고 먼저 갔고, 한나는 하숙집에 가서 물을 데워 놓겠다고 했다. 나는 혼자 가게에 남아 진열창의 마도 등불을 낮췄다. 불빛이 줄어들자 인형 셋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길어졌다.
문을 잠그려고 밖으로 나섰다. 중앙가 돌바닥은 밤이슬에 젖어 있었고, 향수 가게 앞에서는 오늘도 장미 냄새가 올라왔다. 이 거리에 처음 왔을 때와 같은 냄새였다. 그때 나는 이 가게 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뻔했다.
가게 앞 마도 등불 아래 누가 서 있었다.
회색 외투였다. 키가 컸고, 외투 단추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등불이 그의 어깨 위에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법정에서 쇠붙이 소리가 나던 그 주머니였다.
“공작님.”
카일 아르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진열창을 보고 있었다. 인형 셋과 진주 단추 앞치마.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보았다.
“가게를 샀다고 들었소.”
“로더릭 씨한테요?”
“소식지에서.”
“읽으셨어요?”
“오늘은 읽었소.”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무쇠 반지가 있었다. 결혼식 날 밤 내가 빼서 그의 손에 올려놓은 반지였다. 장식 하나 없이 거칠게 두드린 쇠였고, 등불 아래에서 안쪽만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그 반지가 열이레 동안 그의 주머니 속에서 무엇과 부딪혔는지 나는 몰랐다.
“오늘 황태자가 소환장을 가져왔지.”
“네. 공작님 이름도 있었어요.”
“알고 있소.”
“공작님. 서류는요?”
카일은 반지를 손바닥 위에서 한 번 굴렸다. 쇠가 살 위에서 구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너무 작은 소리였다.
“이혼 서류, 아직 안 냈소.”
밤바람이 중앙가를 지나갔다. 장미 냄새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나는 열쇠를 쥔 손을 내렸다. 열쇠가 치마에 닿아 작게 짤랑거렸다.
“왜요?”
카일이 반지를 쥐었다. 주먹 사이로 쇠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류를 내는 날, 부인은 공작 부인이 아니게 되오. 공작 부인은 귀족 법정에서만 재판을 받소. 귀족 법정에는 원로 열둘이 앉고, 원로 열둘은 웃기도 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지.”
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진열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혼한 로웬가 장녀는 황궁 경비청이 데려가오. 서류가 들어간 이튿날 아침에. 황태자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소.”
“그럼, 저를 지키시려고요?”
말해 놓고 나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원작 독자 게시판에 이 남자를 살려 달라고 이름을 올리던 내가, 지금 그 남자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카일은 창밖을 보는 대신 진열창을 보았다. 그곳이 지금 그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말했다.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