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57자)

악녀한텐 안 판다

악녀는 결혼 첫날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 서지오

베르 의상실은 수도 중앙가의 은행과 향수 가게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간판은 검은 나무에 금박으로 이름만 적은 것이었고, 금박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진열창 안에는 머리 없는 나무 인형이 하나 서 있었는데, 인형이 입은 금빛 비단 예복은 무게가 내 몸무게의 절반쯤은 되어 보였다. 인형은 거리를 등지고 가게 안쪽을 보고 서 있었다.

원작 3권 열두째 장에서 이 가게는 불탄다. 초여름 밤, 비올렛이 하인을 시켜 뒷문에 기름을 붓게 한다. 성녀의 건국제 드레스가 이 가게에서 지어지고 있었고, 비올렛은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장을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었고, 불탄 가게 앞에서 주인이 재를 움켜쥐는 삽화에 댓글을 달았다. 악녀 진짜 미쳤다고.

문을 밀자 종이 울렸다. 안에서 바늘을 입에 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흔 중반쯤, 회색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었고, 목에는 매듭이 촘촘히 지어진 끈을 걸고 있었다. 오델 베르였다. 그녀는 바늘을 입에서 빼지도 않고 말했다.

“악녀한텐 안 판다.”

“사러 온 거 아니에요.”

“그럼 더 안 판다.”

말이 안 되는 대꾸였는데 이상하게 말이 됐다. 비올렛의 기억이 따라 올라왔다. 작년 가을, 비올렛은 이 가게에 무도회 드레스를 맞췄다가 허리선이 마음에 안 든다며 값을 치르지 않았고, 옷을 바닥에 던졌고, 그걸 주우러 온 견습생의 뺨을 때렸다.

나는 허리를 숙였다. 45도. 로더릭 집사에게 배웠다.

“작년 일은 죄송합니다. 그 드레스값은 오늘 갚을게요.”

하숙비로 남길 열한 닢을 빼고, 은화 서른 닢이 든 주머니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베르가 주머니를 열어 보더니 바늘을 뺐다.

“모자라.”

“알아요. 그래서 나머지를 일로 갚으려고요.”

“무슨 일.”

“가게를 팔리게 하는 일이요.”

베르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한 번 들썩였다.

“공작 부인이 바늘을 잡겠다고?”

“바늘은 못 잡아요. 대신 진열을 잡을게요. 이레만 주세요. 지난 이레보다 매출이 두 배가 안 되면, 저는 나가고 그 주머니는 사장님 거예요.”

“두 배면?”

“일당을 주세요. 그리고 저를 쫓아내지 마세요.”

베르는 목에 건 끈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매듭 하나하나를 세는 손짓이었다.

“세 배면 생각해 보지.”

“세 배면 뭘 생각해 주실 건데요?”

“그건 세 배가 되면 생각해 보지.”

*

첫째 날, 나는 매상표 대신 문을 보았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넷이었다. 둘은 귀족가의 하인이었고 주문서를 놓고 갔다. 하나는 길을 묻고 갔다. 하나는 베르에게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온 원단상이었다.

베르의 손님은 전부 귀족이었다. 그들은 임시로 꿰맨 옷을 입어 보는 가봉을 세 번 하고 석 달을 기다렸다. 그사이 중앙가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수천 명이었다. 은행원의 딸들, 향수 가게 점원들, 상인의 아내들. 그들은 진열창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인형의 등을 보고 다시 걸었다.

“인형을 돌려야 해요.”

“손님은 가게 안에 있다.”

“손님은 가게 밖에 있어요. 아직 안 들어왔을 뿐이에요.”

베르는 대답 대신 바늘에 실을 꿰었다. 나는 인형을 끌어안고 돌렸다. 금빛 예복이 무거워서 인형 받침이 바닥을 긁었고, 그 소리에 베르가 눈을 감았다.

둘째 날에는 옷이 문제였다. 진열창에 금빛 예복을 걸어 봤자 지나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나는 베르에게 미리 지어 두는 옷 이야기를 했다. 치수를 서넛으로 나눠, 손님이 오기 전에 지어 걸어 두는 옷. 우리 세상에서는 기성복이라고 부르는 것.

“옷은 몸에 맞춰 짓는 거다.”

“몸이 석 달을 못 기다리면요?”

베르의 손이 멈췄다.

“향수 가게 점원이 다음 주에 사촌 결혼식에 가요. 은행원 딸은 열흘 뒤에 처음으로 연회에 가고요. 둘 다 어제 진열창 앞에서 섰다 갔어요. 저는 그 사람들한테 석 달 뒤가 아니라 오늘 입고 나갈 수 있는 옷을 팔고 싶어요.”

베르가 목에 건 끈을 풀었다. 길이가 내 팔 두 개쯤 되는 무명 끈이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손때가 배어 매듭마다 색이 짙었다.

“우리 어머니 거다. 세탁장에서 남의 옷 빨다가 바느질을 배웠지. 세탁장 여자들은 재단사한테 갈 돈이 없으니까, 어머니가 이 끈으로 치수를 재 줬다. 허리가 몇 매듭, 어깨가 몇 매듭.”

그녀가 끈을 계산대 위에 펼쳤다.

“세탁장 여자들 몸은 대개 셋으로 갈렸다. 스물두 매듭, 스물다섯 매듭, 스물여덟 매듭.”

나는 그 끈을 오래 보았다. 칠 년 동안 사이즈 표를 짰는데, 이렇게 생긴 사이즈 표는 처음이었다.

“그 셋으로 지어요.”

*

셋째 날부터 닷새째까지 우리는 거의 자지 않았다. 베르가 재단을 하고 견습생 둘이 박음질을 했다. 원단은 모자랐다. 나는 남은 드레스 여덟 벌을 전부 가게로 가져왔다. 실크를 뜯어 깃과 소매 끝에 덧대니 수수한 무명 옷이 갑자기 귀족 흉내를 냈다. 한나가 진주 단추를 떼어 작은 접시에 담다가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혼수가 단추가 돼 버렸어요.”

“단추가 된 게 아니라 팔린 거야. 아직 안 팔렸을 뿐이고.”

“그 말 어제도 하셨어요.”

연보라 드레스는 가져오지 않았다. 한나는 그것도 묻지 않았다.

진열창에는 스물두 매듭, 스물다섯 매듭, 스물여덟 매듭 옷을 한 벌씩 걸었다. 옷마다 작은 나무패를 달고 값을 적었다. 그걸 본 베르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값을 밖에 내걸어? 귀족 손님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냐?”

“귀족 손님은 어차피 값 안 물어보세요. 값을 물어보는 사람한테 값을 보여 주는 거예요.”

해 질 녘에 마도 등불 하나를 진열창 위에 달았다. 등불 빛이 옷의 실크 깃에 닿자 거리 쪽으로 빛이 튀었다. 그날 밤에만 문이 아홉 번 울렸다.

닷새째 오후, 문이 울리고 하얀 제복이 들어왔다. 황태자의 시종관이었다. 그는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나를 발견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공작 부인께서 바느질집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느질은 안 해요. 장사를 하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인과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베르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황실 인장이 찍혀 있었다. 성녀 루시아의 건국제 예복을 이 가게에 맡기니, 흰 실크로 짓되 가을 첫 달까지 마칠 것. 선금으로 금화 서른 닢이 계산대에 놓였다. 금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무명 옷들 사이에서 유난히 맑게 울렸다.

나는 그 금화를 보며 원작의 그 장을 다시 떠올렸다. 비올렛이 이 가게를 태운 이유가 지금 계산대 위에 놓여 있었다.

시종관이 나가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건국제가 기다려지시겠습니다, 부인.”

“전하께 전해 주세요. 저는 그날 가게를 볼 거라고요.”

엿새째 아침에는 향수 가게 점원이 처음으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첫째 날 진열창 앞에서 섰다 간 그 아가씨였다. 그녀는 스물다섯 매듭 옷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나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중앙가에서 비올렛 로웬의 얼굴을 모르는 점원은 없었다.

“입어 보셔도 돼요. 안 사셔도 되고요.”

“…공작 부인이 옷을 파세요?”

“이혼 중이라서요.”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을 막았다. 탈의실 커튼 너머에서 그녀가 옷을 입는 동안, 베르는 재단대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런데 가위 소리가 멈춰 있었다. 커튼이 열리자 아가씨가 거울 앞에서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실크 깃이 마도 등불 빛을 받아 턱 밑을 밝혔다.

“이걸 오늘 들고 갈 수 있어요?”

“오늘 입고 가셔도 돼요.”

그녀는 정말로 입고 나갔다. 벗어 둔 옷은 보자기에 싸 달라고 했다. 문이 닫히자 베르가 가위를 다시 들었다. 가위가 무명을 가르는 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빨랐다.

*

이레째 저녁, 베르가 매상표를 덮었다. 손님은 서른한 명이 들었고, 그중 스물여섯이 옷을 사 갔다. 지난 이레보다 세 배하고도 조금 더 팔렸다. 매상표를 덮는 베르의 손등에 핏줄이 서 있었다.

“세 배다.”

“네.”

“그래도 너한테 가게는 안 판다.”

“안 사요. 아직은요.”

베르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웃지 않으려고 입안을 깨물었다.

“일당은 하루 은화 둘. 이익은 내 거다. 네 드레스 뜯어 넣은 값도 내 거고.”

“알아요.”

알았다. 드레스 여덟 벌을 넣고 일당 열네 닢을 받는 장사였다. 서울에서 이런 계약을 했으면 팀장님이 결재판으로 내 머리를 쳤겠지. 그래도 나는 이 가게 안에 서 있었다. 원작의 비올렛은 이 가게 밖에서 기름을 부었다.

베르가 매듭 끈을 목에서 풀어 내게 내밀었다.

“내일 아침에 은행원 딸이 가봉하러 온다. 네가 재라.”

나는 끈을 받았다. 무명이 손바닥에 닿자 오래 빤 천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졌고, 매듭 하나하나가 굳은살처럼 단단했다. 베르는 그 끈을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았다. 견습생 둘이 그렇게 말했다.

“잃어버리면 죽인다.”

“네.”

“진짜로 죽인다.”

“진짜로 네.”

*

밤 열한 시, 하숙집 침대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 매듭 끈을 가게 계산대 위에 두고 왔는지 주머니에 넣어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졌다. 없었다. 내일 아침 은행원 딸이 오기 전에 베르가 먼저 발견하면, 나는 진짜로 죽는다.

외투만 걸치고 중앙가로 뛰었다. 밤 거리는 낮과 달랐다. 은행 덧문이 닫혀 있었고, 향수 가게 앞 돌바닥에서는 낮에 쏟은 장미 향이 아직 올라왔다. 마도 등불이 띄엄띄엄 켜진 길을 따라 베르 의상실 뒷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뒷문 열쇠는 견습생이 화분 밑에 둔다고 했다.

뒷골목에 들어서자 냄새가 바뀌었다. 장미가 아니라 등잔 기름 냄새였다.

뒷문 앞에 넝마가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넝마는 젖어 번들거렸고, 그 위로 작은 불씨 하나가 막 옮겨붙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 누군가 뛰어가는 발소리가 났다. 돌아보았을 때는 모퉁이를 도는 외투 자락만 보였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넝마를 발로 밟았다. 구두 밑창 너머로 열기가 올라왔고, 불씨가 치맛단에 튀었다. 치마를 쥐어 털고, 다시 밟고, 넝마 더미를 골목 바닥 쪽으로 걷어찼다. 불씨가 꺼졌다. 숨을 몰아쉬며 넝마 옆에 놓인 기름통을 들어 문에서 멀리 치우려는 순간이었다.

골목 입구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길게 울렸다.

“거기 누구냐!”

야경꾼의 등불이 내 얼굴을 비췄다. 나는 한 손에 기름통을 들고 있었고, 치맛단에서는 탄 냄새가 올라왔다. 야경꾼 뒤에서 또 하나의 등불이 다가왔다. 그 등불을 든 사람이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르덴 공작 부인?”

원작 3권 열두째 장의 삽화가 떠올랐다. 불탄 가게 앞에 선 비올렛. 그 삽화에서 비올렛은 지금 나처럼 기름통을 들고 있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