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89자)

석 달 이른 성녀

악녀는 결혼 첫날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 서지오

아르덴 공작저의 뒷문은 부엌과 이어져 있었다. 새벽 네 시, 화덕에 불을 넣는 소년이 졸린 눈으로 나를 보고는 부지깽이를 떨어뜨렸다. 어젯밤 공작 부인이 된 여자가 실크 드레스를 한 아름씩 안고 짐수레로 나르고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수레는 마부 없이 빌렸다. 비올렛의 지갑에는 은화 일곱 닢이 있었고, 그중 두 닢이 수레값으로 나갔다. 공작 부인의 지갑이 이렇게 가볍다니. 원작의 비올렛은 돈이 떨어질 때마다 남편 이름으로 외상을 달았다. 나는 그 이름을 어젯밤 반지와 함께 돌려주었다.

스물아홉 벌째를 실을 때 뒤에서 누가 헐떡이며 뛰어왔다.

“아가씨! 아니, 마님! 아니, 아가씨!”

한나였다. 등에는 자기 몸통만 한 보따리를 메고 있었다.

“한나, 너는 공작가 소속이잖아.”

“아니에요. 저는 로웬가에서 따라온 몸종이라서, 아가씨가 나가시면 저도 나가야 한대요. 집사님이 그러셨어요.”

로더릭 집사가 부엌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새벽 네 시에도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부인. 아니, 전 부인. 아니, 법정 판결 전까지는 아직 부인.”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그럼 마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공작 전하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수레용 방수포였다. 북부산 기름 먹인 천이라 손에 닿자 미끈했고, 생선 기름 비슷한 냄새가 났다. 비가 오면 실크는 끝장이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이혼 첫날 아침에 보낸 선물이 방수포라니.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천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전하께서는 고맙다는 말은 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럼 전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외워 두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수도 루멘의 남문 밖에는 헌옷을 사고파는 골목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되팔이 골목이라고 불렀다. 귀족가에서 철 지난 옷을 내놓으면 하인들이 이 골목에 넘기고, 골목 상인들은 그 옷을 뜯어 장식은 따로, 천은 따로 팔았다. 해가 오르자 골목은 양털 냄새와 헌 가죽 냄새, 그리고 누가 굽는지 모를 양파 냄새로 차올랐다.

나는 수레를 골목 한가운데 세우고 드레스 다섯 벌을 수레 가장자리에 걸었다. 색이 옅은 것부터 짙은 것 순서로. 사람들 눈은 밝은 데서 어두운 데로 흐른다. 온라인몰에서 상세 페이지를 짤 때도, 백화점 매장 진열을 짤 때도 그랬다. 진열을 짜는 일을 우리 업계에서는 VMD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그냥 물건 걸기였다.

걸자마자 골목 안쪽에서 배가 둥근 남자가 걸어 나왔다. 손가락마다 놋쇠 반지를 끼었고, 걸을 때마다 반지끼리 부딪혀 짤랑거렸다. 한나가 내 등 뒤에 숨으며 속삭였다. 이 골목 헌옷을 다 거둬 가는 바르톨이라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넝마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가씨, 옷 좋네. 통째로 은화 스무 닢. 수레값까지 내가 쳐 주지.”

“서른 벌인데요.”

“그러니까 통째로.”

나는 수레에 걸린 첫 벌을 내려 그의 손에 안겼다. 그가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만져 보세요. 동방 실크는 손바닥에 올리면 체온을 먼저 먹어요. 차갑다가 금방 따뜻해지죠? 이 한 벌을 뜯으면 천이 열 자 나와요. 사장님은 그걸 한 자에 동화 몇 닢에 파세요?”

바르톨이 천을 쥐었다 놓았다. 반지 소리가 멈췄다.

“…여섯.”

“그럼 한 벌에 은화 셋이 사장님 원가예요. 서른 벌에 스무 닢이면 사장님이 저한테 칠십 닢을 받아 가시는 거고요.”

“아가씨, 어디서 장사 배웠어?”

“먼 데서요. 통째로는 안 팔아요. 대신 오늘 남는 게 있으면 저녁에 사장님께 제일 먼저 보여 드릴게요.”

바르톨은 콧김을 한 번 뿜고 돌아섰다. 돌아서다 말고 손에 든 드레스를 도로 걸어 주었는데, 진열 순서대로 정확히 첫 자리에 걸었다. 한나가 입을 벌렸다. 나는 웃음을 참고 목청을 높였다.

“동방 실크입니다! 진주 단추는 진짜고요, 바느질은 가짜예요!”

첫 손님은 그 말에 멈췄다. 대장장이 아내처럼 팔뚝이 굵은 여자였다.

“바느질이 가짜라니?”

“뜯어서 다시 지으시라고요. 천값만 받을게요. 이 실크로 아이 셋 세례복이 나와요.”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에 사람이 셋 더 모였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것은 서울이나 루멘이나 같았다. 나는 손님마다 다른 말을 했다. 재봉사에게는 원단 폭을, 하인에게는 주인 마님이 좋아할 색을, 젊은 여자에게는 몸에 대 보라고 손거울을 내밀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여덟 벌이 나갔다.

아홉 번째로 손에 잡힌 것이 연보라 드레스였다.

앞섶에 찻물 얼룩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갈색 자국이 실크 결을 따라 번져 있었고, 가장자리만 짙게 말라 있었다. 비올렛의 기억이 따라왔다. 로웬가 이층 계단참, 쟁반을 든 어린 하녀, 기울어진 찻주전자, 그리고 비올렛의 목소리.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그다음은 손바닥이 기억했다.

나는 연보라 드레스를 수레 맨 아래로 도로 집어넣었다. 한나가 그걸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가씨, 저기요.”

한나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골목 입구가 갈라지고 있었다. 회색 수녀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천 꾸러미를 안고 걸어 들어왔고, 그 뒤로 하얀 제복의 남자가 근위병 넷을 거느리고 따라왔다.

성녀 루시아였다.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었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원작 표지에서는 늘 빛 속에 서 있던 여자였는데, 실물은 수레 바퀴에 치맛자락이 걸려 혀를 차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날짜를 셌다. 원작에서 비올렛과 루시아가 처음 만나는 건 늦봄의 황실 사냥 대회였다. 석 달 뒤다. 내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줄거리가 석 달을 당겨 버렸다.

“신전 아이들 옷감을 사러 왔는데, 전하께서 굳이 따라오셨어요.”

루시아가 내 수레 앞에 서서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었다.

레오니스가 수레 앞에 섰다. 그는 걸린 드레스를 한 벌씩 보았다. 손을 대지는 않았다.

“공작 부인이 결혼 이튿날 공작가의 혼수를 헌옷 골목에 내다 판다.”

목소리가 컸다. 골목 사람들이 들으라고 내는 소리였다.

“제 혼수예요, 전하. 로웬가에서 해 온 것이고, 공작님이 위자료로 넘겨주셨어요.”

나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카일의 서명이 맨 아래에 있었다. 레오니스는 종이를 받아 읽고, 웃었다.

“공작의 서명이 법정 판결은 아니지. 판결이 나기 전까지 부인은 아르덴 공작 부인이고, 이 옷들은 아르덴의 재산이오.”

“그럼 전하는 지금 남의 집 옷장을 뒤지시는 거네요.”

근위병 하나가 웃다가 기침으로 덮었다. 레오니스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근위대. 판결 날까지 이 옷들을 증거로 보관하라.”

“전부요?”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레오니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전부는 너무하다는 얼굴이군. 그럼 좋은 것만.”

근위병들이 수레를 뒤졌다. 그들은 정말로 좋은 것만 골랐다. 금실을 넣은 것, 진주 단추가 많은 것, 벨벳으로 안을 댄 것. 열 벌이 근위병 팔에 걸려 나갔다. 손님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황태자가 증거라고 부른 옷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수레 손잡이를 쥐었다. 나무 손잡이가 손바닥 땀에 미끄러졌다. 남은 열한 벌과 수레 맨 아래 연보라 한 벌. 오늘 판 여덟 벌 값으로는 방 한 칸을 한 달 빌리면 끝이었다.

“전하.”

루시아가 말했다. 천 꾸러미를 수레에 내려놓고, 남은 드레스 가운데 가장 수수한 회색 모직 세 벌을 집었다.

“이 세 벌은 증거가 아니죠? 금실도 없고 진주도 없는데요.”

“성녀.”

“신전 아이들 겨울 외투로 고치면 딱 맞겠어요. 얼마예요?”

루시아가 나를 보았다. 레오니스도 나를 보았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을 한 번 골랐다.

“한 벌에 은화 넷이요.”

“너무 싸요. 다섯 쳐 드릴게요.”

손님이 값을 올려 주는 건 칠 년 동안 처음 보는 일이었다. 루시아는 은화 열다섯 닢을 내 손에 세어 놓았다. 레오니스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작에서 그는 루시아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웃으며 받아 주는 남자였다. 지금도 웃고 있었다. 그런데 턱 밑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성녀는 마음이 너무 넓군.”

“신전이 가난해서 그래요.”

루시아는 드레스 세 벌을 직접 안았다. 근위병이 들어 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레오니스는 나를 한 번 더 보고 돌아섰다.

“판결 날 봅시다, 공작 부인.”

“로웬이에요.”

“판결 날까지는 아르덴이오.”

*

골목에 사람이 다시 돌아온 건 그들이 떠나고 한참 뒤였다. 한나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은화를 세었다. 세 번을 세어도 마흔한 닢이었다.

“아가씨, 성녀님 엄청 착하시네요.”

“착한 사람은 값을 깎아.”

“네?”

“값을 올려 주는 사람은 뭔가 보여 주고 싶은 거야. 누구한테든.”

한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은화를 다시 세었다. 마흔한 닢이었다.

바르톨이 군양파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껍질이 새까맣게 탄 양파였는데, 반으로 가르자 김이 확 올라오면서 단내가 골목에 퍼졌다. 그는 하나를 한나에게,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황태자 전하께 옷을 뺏기고도 장사를 계속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 내일도 나와?”

“나와야죠. 여덟 벌 남았으니까요.”

“그럼 내일은 내 자리 옆에 세워. 거기가 볕이 더 좋아.”

넝마왕은 그 말만 하고 반지를 짤랑거리며 사라졌다. 한나가 양파를 후후 불며 이 골목 사람들이 공작가 사람들보다 친절하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뜨거운 양파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혀가 데었다.

해가 기울 무렵, 루시아가 혼자 돌아왔다. 수녀복 소매가 이번에는 내려와 있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수레 옆에 서서 맨 아래에 깔린 연보라 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얼룩이 있는 쪽이 조금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 옷은 안 파시나 봐요.”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요.”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주 평범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는 지금 대신전 세탁장에서 일해요. 아침마다 빨래 방망이를 들어요. 그런데 누가 로웬이라는 이름을 꺼내면, 방망이를 놓쳐요.”

내 손이 수레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어떻게 아세요?”

“일 년 전에 그 계단 밑에서 메이를 업고 나온 사람이 저니까요.”

루시아는 그 말만 하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원작에 그런 장면은 없었다. 원작의 루시아는 비올렛을 사냥 대회에서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이 세계의 루시아는 일 년 전부터 비올렛을 알고 있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