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62자)

위자료는 드레스로 받을게요

악녀는 결혼 첫날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 서지오

장미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샴페인인 줄 알고 들이켠 잔이 혀에 닿자마자 꽃잎을 끓인 물맛이 났고, 내가 기침을 하는 사이 누군가의 은수저가 크리스털 잔을 세 번 두드렸다.

“신부께 축배를!”

눈앞에는 천장까지 닿는 마도 등불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불꽃 없이 하얗게 타는 유리알들이 바람도 없는데 아주 조금씩 흔들렸고, 그 아래로 실크 자락 수백 개가 서로 스치며 마른 잎 밟는 소리를 냈다. 나는 지하철 2호선 막차에 앉아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휴대폰으로 웹소설 『황태자의 성녀』 마지막 화 댓글을 읽다가, 악녀 드레스 고증이 엉망이라는 댓글에 추천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장미수 잔이 들려 있었다. 손가락이 낯설게 길었고, 손톱마다 연보라 칠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으로 남의 기억이 쏟아져 들어온 건 그다음이었다. 로웬 백작가의 장녀, 스물셋, 비올렛 로웬. 오늘 아침 아르덴 공작가 예배당에서 혼인 서약을 했고, 지금은 공작저 대연회장에서 피로연 중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 위로 내가 읽은 다섯 권짜리 소설의 줄거리가 겹쳐졌다. 비올렛은 이 결혼 뒤로 성녀를 괴롭히고, 수도 중앙가의 의상실에 불을 지르고, 가을 건국제 날 광장에서 목이 잘린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결혼식 당일에 빙의하는 건 업계 용어로 최악의 납기였다.

“공작 부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금발에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제복 깃에 황실의 태양 문장이 수놓여 있었고, 수가 지나치게 촘촘해서 빛을 받으면 금실이 아니라 금판처럼 보였다. 황태자 레오니스였다. 원작 독자들이 ‘태양 오빠’라고 부르던 남주였고, 마지막 권에서 비올렛의 처형을 직접 명한 사람이었다.

“가을 건국제까지, 건강하시길.”

원작 2권 첫 장에 나오는 대사 그대로였다. 원작의 비올렛은 이 말을 칭찬으로 듣고 웃었다. 독자였던 나는 이 줄에서 소름이 돋았다. 건국제가 바로 비올렛이 죽는 날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잔을 다시 들었다. 손이 떨려서 장미수가 손등으로 넘쳤다.

“그런데 저는 가을까지 공작 부인이 아닐 예정이라서요. 축배는 비올렛 로웬 앞으로 해 주시겠어요?”

연회장 한쪽이 조용해졌다. 레오니스의 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잔을 쥔 손가락 하나가 유리를 한 번 눌렀다.

“재미있는 말이군. 신부가 첫날부터 이름을 고쳐 달라니.”

“제가 원래 마감 전에 이름부터 고치는 사람이라서요.”

“마감?”

“아, 혼잣말입니다.”

그는 잔을 입에 대지 않고 내렸다. 그러고는 나만 들을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부인이 무슨 이름을 달든, 제국은 부인을 오래 기억할 거요.”

원작에 없는 대사였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박수를 쳤고, 악단이 왈츠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머릿속으로 원작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넘겼다. 광장, 단두대, 그리고 그날 오후 황태자가 내린 두 번째 명령. 악녀를 숨긴 아르덴 공작가의 북부 군권을 황실이 거둔다.

비올렛은 처형당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목은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지렛대였다.

“마님, 첫 춤이십니다.”

백발의 집사가 내 옆에 와서 허리를 정확히 45도로 숙였다. 아르덴 공작가의 집사 로더릭이었다. 원작에서는 이름만 두 번 나오는 사람이었는데, 실물은 장갑 끝까지 다림질이 되어 있었다.

연회장 가운데로 나가자 카일 아르덴이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내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손바닥과 드레스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 틈을 남겼다. 악단이 첫 박을 넣었다. 나는 대학 때 교양 수업에서 배운 왈츠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지만, 다행히 발은 비올렛의 것이라 저절로 돌았다.

“황태자 전하께 무슨 말을 했소?”

그가 앞을 본 채 물었다.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축배를 받을 이름을 고쳐 달라고 했어요.”

“무슨 이름으로?”

“제 이름으로요. 비올렛 로웬.”

그의 발이 반 박자 늦었다. 내가 그의 구두코를 밟았고,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음 박에 맞춰 나를 돌렸다. 둘러선 귀족 부인들이 부채 뒤에서 웃음을 삼켰다. 신랑이 신부에게 발을 밟히고도 얼굴이 그대로인 것은 북부식 사랑 표현이라고 누가 속삭였다. 아니다. 저건 그냥 아픈 걸 참는 얼굴이다.

음악이 끝나자 카일은 내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신방에서 봅시다. 할 말이 있소.”

“저도요.”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아르덴이라는 이름에서 내려야 했다. 오늘 밤 안에.

*

신부 대기실은 장미수와 밀랍 냄새로 가득했다. 하녀 한나가 내 머리에서 진주 핀을 하나씩 뽑고 있었는데, 핀 하나를 뽑을 때마다 숨을 멈췄다. 거울 속에서 그녀의 손등이 보였다. 손등에 반달 모양의 흉터가 둘 있었고, 내 손톱 모양과 꼭 같았다.

나는 비올렛의 기억을 들추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도 저절로 떠올랐다. 핀이 머리카락에 걸렸던 어느 아침, 비올렛이 한나의 손을 움켜쥐던 감각이 내 손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나.”

“네, 아가씨! 아니, 마님!”

“종이 좀 가져다줄래? 펜이랑 잉크도. 제일 두꺼운 종이로.”

한나는 핀을 떨어뜨렸다. 줍느라 몸을 숙였다가, 내가 손을 들어 거울 옆 촛대를 옮기려 하자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나는 촛대를 든 채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수건을 꺼내 핀 옆에 내려놓았다.

“손 다친 데 없지? 종이만 부탁할게.”

한나가 손수건을 한참 쳐다보다가 뛰어나갔다. 그 사이 나는 옷장을 열었다. 혼수로 들어온 드레스가 벽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세어 보니 서른 벌이었다. 백화점 온라인몰에서 여성복을 골라 들이고 파는 일, 업계 말로 MD를 칠 년 한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원단, 안감, 단추, 시접 처리. 대부분은 동방에서 들여온 실크였고, 진주 단추는 진짜였고, 바느질은 형편없었다. 이 정도 원단에 이런 바느질이라니. 원작 작가님, 고증 댓글 그거 제가 쓴 거 아닙니다.

한나가 돌아오자 나는 화장대에 종이를 펴고 계약서 쓰는 순서대로 써 내려갔다. 당사자, 목적, 조건, 위자료, 서명란. 위자료 칸 밑에는 드레스 서른 벌의 목록을 적었다. 원단과 색, 상태까지. 열일곱 번째 줄에서 펜이 멈췄다.

연보라 실크 드레스. 앞섶에 찻물 얼룩.

그 얼룩이 언제 생겼는지 나는 알았다. 비올렛이 알았으니까. 나는 그 줄을 지우지 않고 다음 줄로 넘어갔다.

*

신방에는 침대가 하나 있었고, 침대 위에는 장미 꽃잎이 하트 모양으로 뿌려져 있었다. 누가 했는지 몰라도 하트 왼쪽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카일 아르덴 공작은 문을 닫고 들어와 문 옆에 섰다. 키가 컸고, 북부 사람답게 피부가 희었고, 예복 단추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원작의 서브 남주였다. 여주인공을 남몰래 사랑하다가 3권에서 북부 국경 전투로 죽는 남자. 원작 독자 게시판에는 그를 살려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나도 거기에 이름을 올렸었다.

그가 침대를 한 번, 나를 한 번 보았다.

“먼저 말해 두겠소. 오늘 밤 부인을 건드릴 생각은 없소.”

“다행이네요. 저도 공작님한테 서류 하나 드릴 생각밖에 없거든요.”

나는 두 손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신입 때 배운 대로 글씨가 상대 쪽으로 보이게 돌려서.

“이혼해 주세요. 위자료는 드레스로 받을게요.”

카일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종이와 내 얼굴 사이에서 그의 눈이 두 번 오갔다.

“…지금 뭐라고 했소?”

“이혼이요. 위자료는 드레스. 서른 벌. 목록 뒤에 붙였어요.”

그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첫 장을 넘기고 둘째 장을 넘기는데, 촛불이 그의 턱선에 그늘을 길게 깔았다. 원작에서 이 남자는 화가 나면 말을 하지 않고 창밖을 본다고 적혀 있었다. 봐라, 본다. 그는 정말로 창밖을 한 번 보고 나서 다시 종이로 눈을 돌렸다.

“열일곱 번째. 얼룩 있음.”

“네. 정직하게 적었어요. 하자 있는 물건은 미리 고지해야 나중에 반품이 안 들어오거든요.”

“반품.”

“혼잣말입니다.”

카일이 종이를 내렸다.

“로웬 백작은 이 혼사로 빚을 갚았소. 부인이 오늘 밤 나가면 백작가는 빚을 도로 진다. 그걸 아오?”

“알아요.”

알았다. 비올렛의 아버지는 딸을 북부 공작에게 보내고 빚 문서를 돌려받았다. 그 문서를 쥐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도 원작은 4권에 가서야 밝혔다. 황태자였다.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하면 나는 첫날밤에 황태자를 모함하는 미친 신부가 된다.

“그런데 왜?”

“공작님은 저를 싫어하시고, 저는 가을에 죽기 싫어서요.”

“죽는다니?”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저 같은 여자가 공작 부인으로 오래 있으면 명이 짧아진다고들 하잖아요.”

“그런 말은 처음 듣소.”

“제가 처음 했으니까요.”

그가 웃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화장대로 가서 펜을 집었다.

“조건이 셋 있소.”

“말씀하세요.”

“해가 뜨면 이 집을 나가시오. 아르덴의 이름은 오늘 밤부터 쓰지 마시오. 그리고 보석은 두고 가시오. 드레스만.”

혼수 보석함에는 비올렛 어머니의 사파이어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것 하나로 수도에서 집 한 채를 산다. 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좋아요.”

“반지도.”

내 왼손 약지에 무쇠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장식 하나 없이 거칠게 두드린 쇠였고, 손가락 안쪽에 닿는 면만 반질반질했다. 오늘 아침 예배당에서 그가 끼워 준 반지였다. 비올렛의 기억으로는, 아르덴 가문이 대대로 북부 전사들의 칼을 녹여 만든다고 했다. 원작의 비올렛은 이 반지를 촌스럽다며 첫날 서랍에 던졌다.

나는 반지를 빼서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카일은 서명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꽃잎 냄새 가득한 방에서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귀족의 이혼은 귀족 법정을 거쳐야 하오. 원로 귀족 열둘과 황족 한 분이 앉는 자리요. 청원은 내가 내겠소.”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일인지는 모르겠소.”

그는 반지를 쥔 채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고 나서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하나만 묻겠소.”

“네.”

“로웬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하녀 말이오. 메이라고 했던가. 그 다리도 드레스로 갚을 생각이오?”

문이 닫혔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 찌그러진 하트 위로 꽃잎 하나가 떨어졌고, 오른 손바닥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누군가의 등을 밀던 감각이었다. 얇은 면 옷 너머로 만져지던 어깨뼈, 그리고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던 소리까지.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바닥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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