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07자)
자경전 뒤 옥
폭군의 호위무사로 빙의했는데 폭군이 나만 본다 · 윤재하
자경전 뒤뜰은 앞마당과 달랐다. 앞은 얼음 대야가 놓인 서늘한 대청이었고, 뒤는 볕이 안 드는 돌담과 이끼였다. 돌담 아래로 반쯤 땅에 묻힌 낮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창이 손바닥 두 개만 했고, 창마다 굵은 나무 살이 박혀 있었다. 거기서 오래 고인 물과 지푸라기 썩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보아라.”
태후가 부채 끝으로 창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허리를 숙여 나무 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어둠에 눈이 익는 데 한참 걸렸다. 짚을 깐 바닥 구석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앞치마에 쪽물 얼룩이 그대로였다. 머리에 꽂았던 나무 젓가락이 없었다. 머리가 풀려 어깨를 덮고 있었다.
소와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아주 조금 가로저었다. 오지 말라는 건지, 말하지 말라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밥은 준다.” 태후가 말했다. “칠석 다음 날 아침까지는.”
“빗장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소와의 눈이 내 등에 닿는 게 느껴졌다. “기름도 먹여 두었습니다. 열 때 소리가 안 나게요.”
태후가 웃었다. “꼼꼼하구나.”
“검토를 오래 했습니다.”
태후의 웃음이 조금 길어졌다. 그러다 멈췄다. 그가 부채를 접어 내 턱 밑에 댔다.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대기만 했다. 처음 만난 날 황제가 한 것과 같은 자세였는데, 부채가 달랐다. 상아로 만든 부채였다. 살 하나 금 간 데 없이 매끄러웠고, 차가웠다.
“황상 침상에서 잤다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무라는 게 아니다. 잘했다.” 태후가 부채를 거뒀다. “황상이 너를 그리 아끼시면, 칠석 밤에 너를 쓰기가 더 쉬워진다. 사람은 아끼는 것 앞에서 칼을 늦게 뽑는다. 나는 그분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결국 그렇게 되시는구나.”
그는 돌아서서 앞마당으로 걸어갔다. 허리띠의 옥 도장이 짤랑거렸다. 방 상궁이 그 뒤를 따르며 나를 한 번 돌아봤다.
나는 옥 건물의 모양을 머릿속에 넣었다. 문은 동쪽에 하나, 쇠 자물쇠. 옥지기는 하나, 문 옆 평상. 돌담은 내 키보다 한 자 높았다. 담 너머는 수라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었다. 회사에서 첫 출근 날 비상구 위치를 외우던 것처럼 외웠다.
*
칠석 이틀 전 밤에는 궁에 낯선 사람이 많았다.
등불 장인들이었다. 칠석 날 연못에 오작교 모양으로 띄울 연꽃 등을 만들어 오는 사람들로, 도성의 이름난 공방에서 해마다 서른 명쯤 들어와 수라간 옆 빈 창고에서 밤을 새워 등을 붙였다. 창고에서 풀 쑤는 냄새와 한지 냄새, 대나무 깎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다 붙인 등은 수레에 실어 연못가로 날랐다. 수레는 밤새 궁 안을 오갔다.
“빈 수레가 해시 반에 수라간 길로 나온다.” 진목이 말했다. 그는 아직 무릎을 절었다. “등을 내리고 공방으로 돌아가는 수레야. 거기 태우면 서문까지 안 열어 본다. 등불 장인 수레를 열었다가 등 하나 찢으면 칠석 연회가 망하니까.”
“무 광주리보다 낫네.”
“뭐?”
“아니야.”
침전을 나서기 전에 염휘가 문 안쪽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내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날을 한 번 등잔 빛에 비춰 보고 도로 꽂았다. 칼집 끈이 헐거운 걸 보고는 그걸 다시 묶었다. 이번에도 매듭이 셋이었다.
“인시 전에 안 돌아오면, 내가 자경전 담을 넘는다.”
“폐하께서 담을 넘으실 줄 아십니까?”
“아홉 살 때부터 넘었다. 그 궁 담은 내가 너보다 잘 안다.” 그가 매듭을 한 번 더 당겼다. “동쪽 모퉁이 셋째 기와가 흔들린다. 거기는 짚지 마라.”
황제가 태후 궁 담장의 흔들리는 기와를 외우고 있었다. 나는 그걸 웃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숙였다.
해시가 되자 나는 수라간 길로 가서 돌담을 넘었다. 이 몸은 담을 넘을 줄 알았다. 손바닥이 담 위 기와를 짚고, 발끝이 돌 틈을 찾았다. 동쪽 모퉁이 셋째 기와는 건너뛰었다. 넘어서 내려앉을 때 무릎이 소리 없이 굽었다. 나는 속으로 이 몸에게 사과했다. 얼마 전에 넘어지는 연습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옥 앞 평상에서 옥지기가 자고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머리맡에 막걸리 사발이 놓여 있었고, 코를 골 때마다 수염이 들썩였다.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가 매달려 있었다.
내가 열쇠 꾸러미에 손을 뻗었을 때, 평상 반대편 어둠 속에서 다른 손이 먼저 꾸러미를 쥐었다.
손목에 붉은 끈이 감겨 있었다. 칼자루에서 풀어서 손목에 감은 것이었다.
“또 너냐?” 백무현이 속삭였다. 등불 장인들이 입는 쪽빛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앞치마에 풀이 말라붙어 있었다. “누가 보면 우리가 같이 일하는 줄 알겠다.”
“같이 일하는 겁니다. 오늘만요.”
“오늘만.” 그가 웃었다. 이를 다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꾸러미를 허리에서 끊었다. 노인이 몸을 뒤척였다. 눈을 반쯤 떴다. 흐린 눈이 백무현의 얼굴을 봤다.
백무현의 다른 손이 움직였다. 짧은 칼이었다. 그 칼이 노인의 목 옆을 지나갔다. 소리가 거의 없었다. 노인의 손이 평상 위에서 한 번 펴졌다가 막걸리 사발을 쳤다. 사발이 바닥에 굴렀다. 막걸리 냄새와 쇠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묶으면 됐잖아요.” 내 목소리가 내 귀에 이상하게 들렸다. “눈 반쯤 뜬 노인이었어요. 묶으면 됐잖아요!”
“소리 낮춰.” 백무현이 칼을 노인의 옷자락에 닦았다. “묶어 두면 내일 아침에 입을 연다. 등불 장인 앞치마를 두른 사내를 봤다고. 그러면 내일 창고의 장인 서른 명이 다 잡혀간다. 그 서른 명은 묶어 둔 노인 하나보다 무겁다.”
그의 말은 계산이었다. 며칠 전 침전에서 내가 황제에게 한 말과 모양이 같았다. 무거운 쪽을 지키려고 가벼운 쪽을 버리면. 나는 그 말을 반대로 썼고, 이 사람은 그 말을 그대로 썼다.
원작에서 백무현은 사람을 많이 죽였다. 나는 그걸 다 읽었다. 그때마다 작가는 그 사람들 이름을 안 적었다. 「그는 길을 막는 자를 베었다.」 그 한 줄로 지나갔다. 나는 그 한 줄을 읽으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 한 줄이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
자물쇠가 열렸다. 소와가 짚더미에서 일어나 우리를 봤다. 오라비와 반란군 수장이 나란히 서 있는 걸 보고 소와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
“둘이 친해?”
“아니.” 우리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소와를 데리고 옥을 나서는데 자경전 쪽 회랑에서 등불 셋이 이쪽으로 꺾어 들었다. 금군이었다. 옥지기 교대 시간이었다. 원작에 이런 교대표는 없었다. 나는 몰랐다. 백무현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뭐야, 저기 누구야?”
첫 번째 금군이 칼을 뽑았다. 백무현이 소와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나와 등을 맞댔다. 정말로 등을 맞댔다. 그의 등에서 풀 냄새와 땀 냄새가 났고, 근육이 칼을 뽑는 순서대로 움직이는 게 내 등에 그대로 전해졌다.
원작 독자 한서준은 이 순간을 수백 번 상상했다. 백무현과 등을 맞대고 싸우는 장면. 내가 그 옆에 서는 장면. 그 상상 속에는 막걸리 냄새도, 평상 위의 노인도 없었다.
금군 셋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 몸은 칼을 알았다. 첫 칼을 흘리고, 손목을 쳐서 칼을 떨어뜨리고, 칼자루로 관자놀이를 쳤다. 나는 그 금군이 쓰러지는 걸 보면서 처음으로 이 몸에게 고마웠다. 이 몸은 죽이지 않고 쓰러뜨리는 법도 알았다. 두 번째 금군의 칼이 내 왼팔 바깥쪽을 길게 긋고 지나갔다. 뜨거웠다. 피가 소매를 타고 손등까지 흘렀다. 백무현이 셋째를 쓰러뜨렸다. 그가 쓰러뜨린 금군은 다시 안 일어났다.
우리는 돌담을 넘었다. 소와가 먼저, 그다음 나, 마지막으로 백무현. 수라간 길에 빈 등불 수레가 서 있었다. 진목이 수레 옆에 서서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그는 백무현을 보고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와가 수레의 빈 등 뼈대 사이로 들어갔다. 대나무 살이 그 애 어깨에 긁혔다. 들어가기 전에 소와가 내 피 묻은 소매를 잡았다.
“오라버니.”
“응.”
“오라버니, 진짜 우리 오라버니 맞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품에서 은비녀를 꺼내 갔다. 휜 나비 날개를 엄지로 한 번 펴 보고, 자기 머리에 꽂았다.
“우리 오라버니가 아니어도 돼.” 소와가 말했다. “오늘 온 건 오라버니야.”
수레 위에 한지를 덮었다. 진목이 고삐를 당겼다. 수레가 굴러갔다.
*
수레가 모퉁이를 돌자 백무현이 칼을 뽑았다. 내 쪽으로.
나도 뽑았다. 이번에는 이 몸이 아니라 내가 먼저였다. 두 칼이 수라간 길 한가운데서 맞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돌담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그의 칼날과 내 칼날이 한 뼘 위에서 엇갈린 채 멈췄다. 칼을 쥔 그의 손목에서 붉은 끈이 흔들렸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한다.” 백무현이 말했다. “소와는 우리 쪽 사람이니까 우리가 데려간 거다.”
“알아요.”
“그리고 칠석에 나도 침전에 간다. 태후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폭군을 끝낸다. 그 문 앞에 네가 서 있으면, 너도 벤다.”
“그럼 저도 막겠습니다.”
“너는 내가 무너진 성문 앞에서 죽는다고 했지.” 그의 칼에 힘이 들어왔다. 내 칼이 반 치 밀렸다. “폭군이 살면 내가 안 죽는다는 보장은 있냐?”
“없어요.”
“그럼 나는 내 손으로 정하겠다.”
그가 칼을 거두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없었다. 수라간 담 너머로 등불 창고의 풀 냄새만 남았다.
*
침전으로 돌아가는 회랑에서 태후를 만났다.
인시가 다 된 새벽이었다. 회랑 기둥 사이로 첫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태후는 혼자였다. 방 상궁도 없었다. 옥색 비단옷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손에 상아 부채도 없었다. 허리의 옥 도장만 그대로였다. 그가 나를 막아섰다.
나는 왼팔을 등 뒤로 감췄다. 피가 손끝으로 떨어졌다. 똑, 하고 회랑 마루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이는 잘 보냈느냐?”
등이 차가워졌다.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 옥지기가 하나뿐인 것도, 교대 시간이 늦은 것도, 등불 수레가 서문까지 안 열려 본다는 것도. 이 사람이 다 알고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
“옥지기가 죽었습니다.”
“그래. 그 노인은 이 궁에서 마흔 해를 일했다.” 태후가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데려간 사내가 죽였겠지. 내일 아침이면 궁 안 사람들이 다 안다. 황상의 호위가 반란군을 끌어들여 태후 궁의 늙은 옥지기를 죽였다고.”
“그건.”
“빗장은 이제 필요 없다.” 태후가 나를 지나치며 말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옥 도장이 짤랑거렸다. “너는 칠석에 황상 곁에만 있어라. 아무 데도 가지 말고, 황상 곁에만. 칼은 네 앞에서 오지 않는다. 네 등 뒤에서 온다.”
그가 회랑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피 흘리는 팔을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벽 첫 매미가 울었다. 칠석이 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