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82자)
원작의 마지막 장
폭군의 호위무사로 빙의했는데 폭군이 나만 본다 · 윤재하
해시가 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침전 앞뜰의 등불은 꺼져 있었고, 달이 회화나무 꼭대기에 걸려서 박석 위에 나무 그림자를 길게 깔았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그림자 속을 먼저 봤다. 뜰 동쪽 구석, 담장 밑에 사람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갑옷을 벗은 홑옷 차림이었다. 등이 곧았다. 진목이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습니까?”
“술시부터.” 염휘가 부채를 접었다. “침전 문 안쪽에 네가 아니라 저놈이 서 있더구나. 물었더니 네가 배앓이를 한다고 했다. 수라간에 사람을 보냈더니 너는 없고, 채소 수레 하나가 해 질 녘에 서문으로 나갔다더군.”
술시면 저녁 일곱 시께였다. 지금이 열 시 반이 넘었다. 세 시간 넘게 박석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낮 볕을 다 먹은 박석은 밤이 되어도 미지근했다. 그 위에 세 시간이면 무릎뼈가 돌에 녹아 붙는다. 진목은 고개를 한 번도 이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저 사람은 제가 시켰습니다.” 나는 계단 아래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박석이 정말로 미지근했다. “벌은 저한테 주십시오.”
“네가 시켰다는 것도 안다.” 염휘가 일어서지 않고 말했다. “저놈이 그랬다. 들키면 너 대신 맞겠다고 약속했다고. 그래서 꿇렸다. 약속은 저놈이 했으니, 지키는 것도 저놈이 할 일이다.”
“폐하.”
“너는 내가 무엇을 하지 말라 했는지 알면서 했다.”
“예.”
“어디 갔다 왔지?”
두 번째 물음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고를 수 있었다. 누이를 찾으러 갔다, 누이는 못 찾았다. 반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반만 맞는 말은 회사에서도 늘 나중에 터졌다. 보고서 숫자를 반만 맞게 쓰면 다음 분기에 두 배로 터진다.
“비단 거리에 갔습니다. 누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백무현을 만났습니다.”
부채 소리가 멎었다.
“북쪽 수비대 출신, 칼자루에 붉은 끈을 감은 사내입니다. 지금 도성에 숨어 사람을 모읍니다. 수련이 그 사람에게 궁 안 소식을 내보냈습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에게 칠석 밤에 태후마마가 폐하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염휘가 일어났다. 칼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한 칸, 한 칸. 달빛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췄다. 그가 내 앞에 섰다. 칼집째로 칼끝을 내 어깨 위에 얹었다. 무게가 쇄골을 눌렀다.
“너는 내 목을 반란군에게 팔았구나.”
“팔지 않았습니다. 흘렸습니다.”
“그게 무엇이 다르지?”
“판 건 값을 받는 거고, 흘린 건 실수입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이 몸이 아니라 내 쪽이 떨었다. “그 사람을 설득하려다가 너무 많이 말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칼집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염휘가 뜰 구석을 향해 말했다.
“진목. 들어가 자라.”
진목이 일어서려다 한 번 휘청했다.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그는 담장을 짚고 일어나 절룩이며 회랑 쪽으로 갔다. 지나가면서 나를 봤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내가 뭐랬어?」 하는 얼굴이었다.
“들어와라.” 염휘가 말했다. “네가 그자를 설득하려고 무슨 말을 했는지, 처음부터 다 해라.”
*
자시, 자정 무렵. 침전 안에는 등잔 하나만 켜져 있었다.
나는 휘장 앞 바닥에 꿇어앉았고, 염휘는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재상이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침향이 짙었다. 오늘은 그 냄새가 숨을 막는 대신 귀를 막았다. 바깥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
“제가 온 곳에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이 말을 꺼내는 데 열흘 넘게 걸렸다. “이 나라 이야기를 적은 책입니다. 열두 권. 저는 그 책을 다 읽었습니다.”
염휘는 웃지 않았다. 믿는다는 얼굴도 아니었다. 듣는 얼굴이었다.
“그 책에서 나는?”
“1권 마지막 화에 돌아가십니다. 칠석 밤에요.”
“1권?”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열두 권 가운데 첫 권에서?”
“예.”
“그다음 열한 권은?”
“폐하 없이 갑니다. 태후마마가 섭정을 이어 가시고, 백무현이 일어나고, 북쪽 하란이 내려오고, 도성이 탑니다. 마지막 권 마지막 화에 백무현이 무너진 성문 앞에서 죽습니다.”
“그럼 그 책의 주인은 백무현이로구나.”
“예. 주인공입니다.”
“너는 그자를 응원했겠군.”
“…열두 권 내내요.”
염휘가 재상의 귀를 잡아당겼다. 재상이 낑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엎드렸다. 그가 아주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두 권 동안 남의 편을 들었으면서 지금은 내 문 앞에 서 있다.”
“그건 폐하가 1권에서 분량이 별로 없으셔서요. 응원할 틈이 없었습니다.”
“분량.”
“나오시는 화가 몇 개 안 됐습니다. 나오시면 사람을 베시고, 베시고 나면 안 나오시고.”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고 등잔 쪽을 봤다.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웃음을 참는 건지 화를 참는 건지 이번에도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그가 물었다.
“그 책에서 너는?”
“3화에 한 줄입니다. 황제 얼굴을 쳐다봐서 사흘 뒤 목이 잘렸다고요.”
“그럼 우리 둘 다 첫 권에서 죽는구나.”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원작 독자로서 나는 둘을 한 번도 같은 줄에 놓아 본 적이 없었다. 폭군과 엑스트라. 한 사람은 1권 마지막 화에서, 한 사람은 3화에서 죽는다. 둘 다 그 뒤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형부 시랑 말이다.” 염휘가 등잔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 책에서는 내가 그자를 왜 벴는지 적혀 있더냐?”
“아니요. 베셨다고만 있었습니다. 피가 옥좌 계단을 적셨다고요.”
“그자는 내가 아홉 살 때 죄인을 심문하는 의금부의 낭관이었다. 어머니가 선황의 옷에 바늘을 넣었다는 죄를 받았을 때, 그자가 어머니를 심문했다. 바늘은 어머니 바늘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사흘 만에 자백했고, 나흘째 죽었다.” 그는 숨을 고르지 않았다. 고를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 사흘 동안 무엇을 했는지 나는 그자에게서 들었다. 즉위하고 석 달째, 그자를 대신들 앞에 꿇리고 다 말하게 했다. 다 말한 다음에 벴다.”
“태후마마가 시키신 일이었습니까?”
“그자는 끝까지 그 말은 안 했다. 그래서 나도 증거가 없다.” 그가 부채를 펴서 금 간 살을 내려다봤다. “증거 없이 어마마마를 벨 수는 없다. 증거가 있어도 인장이 저쪽에 있다. 그러니 나는 그 사람의 아들로 이 궁에 앉아 있다.”
원작은 이 사람의 사흘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꿇어앉은 채 무릎걸음으로 침상 앞까지 갔다. 그의 손에서 부채를 빼서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얼굴을, 오늘 밤은 내가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보지 마라.” 그가 말했다. 처음 만난 날과 같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턱을 안 드셨는데도 보입니다.”
그가 내 뒷목을 잡아 끌어올렸다. 서산 천막에서보다 덜 서툴렀다. 아니, 똑같이 서툴렀는데 이번에는 내가 서툰 쪽을 받아 줄 줄 알았다. 그의 입술에서 쓴 약초 냄새가 났다. 잠 못 드는 사람의 냄새였다. 나는 그의 허리띠 매듭을 찾았다. 금실로 짠 띠는 매듭이 셋이었고, 셋 다 단단했다. 하나를 푸는 데 한참 걸렸다.
“무엇을 하느냐?”
“결재 올립니다.” 나는 둘째 매듭에서 손톱을 걸었다. “거절하시려면 지금 하십시오.”
그가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셋째 매듭을 직접 풀었다.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다. 비단이 바닥에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등은 생각보다 말라 있었고, 견갑골 아래로 오래된 회초리 자국이 가늘게 세 줄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그 줄을 따라가자 그의 숨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그는 다정한 말을 할 줄 몰라서 명령으로 했다. 이리 와라. 숨 쉬어라. 아프면 말해라. 나는 그 명령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따랐다. 침향과 땀이 섞였고, 침상 휘장이 등잔 빛을 받아 붉게 흔들렸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야율이라고. 나는 그게 내 이름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
그때 휘장이 불룩해졌다. 무언가 털 많고 묵직한 것이 휘장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재상이었다. 늙은 개는 침상 위로 앞발 하나를 올리고,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끼워 달라는 얼굴이었다.
“재상.” 염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가.”
재상은 안 나갔다. 침상 다리 밑에 몸을 말고 누워 버렸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염휘도 웃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 낮고 갈라진 웃음이었다. 침전 문밖에서 누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이 궁에서 처음 듣는 소리였을 것이다.
*
인시, 새벽 네 시께. 문밖에서 기척이 났다.
나는 먼저 깼다. 몸이 깼다. 이 몸은 문밖의 발소리를 자면서도 들었다. 홑옷을 걸치고 칼을 쥐고 빗장 앞에 섰다. 염휘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폐하, 자경전 방 상궁이옵니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났다. “마마께서 야율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나는 빗장을 풀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네 누이는 자경전 뒤 옥에 있다.”
손이 빗장 위에서 굳었다.
“어젯밤 쪽물 들이는 집을 금군이 덮쳤다. 사내 하나는 지붕으로 달아났고, 계집아이 하나가 잡혔지. 앞치마에 쪽물이 들어 있더구나.” 방 상궁은 서두르지 않았다. “마마께서 말씀하셨다. 칠석까지 사흘이다. 빗장 이야기를 잊으면 그 아이는 우물로 간다.”
발소리가 멀어지려다 멈췄다. 방 상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젯밤 배추 광주리는 편했느냐?”
그러고는 정말로 멀어졌다.
나는 빗장을 쥔 채로 서 있었다. 금군은 어젯밤 서문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 나는 소와를 찾으러 가서, 소와가 숨은 자리를 태후에게 알려 주고 돌아왔다. 원작에 이름도 없던 사람이 제 손으로 가게를 태워 숨은 자리를, 원작을 다 읽었다는 내가 하룻밤 만에 들켰다.
등 뒤에서 염휘가 걸어왔다. 그가 내 손 위로 손을 얹어 빗장을 함께 쥐었다. 나무가 차가웠다. 그의 손은 아직 따뜻했다.
“데려와라.” 그가 말했다. “네 누이. 칠석 전에.”
“자경전 뒤 옥입니다. 호위대가 칼을 차고 그 문을 넘으면, 어마마마는 그날로 역모라고 하십니다. 인장을 찍어서요.”
“그러니 호위대는 못 간다. 너는 간다.”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어마마마는 너를 다시 부를 거다. 빗장이 잘 준비되었는지 보고 싶을 테니까. 그 사람은 제 손에 쥔 것을 꼭 한 번 더 쥐어 본다. 나를 키울 때도 그랬다.”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네가 찾아라. 너는 열두 권을 읽었다면서.”
“그 열두 권에 이 장면은 없습니다.”
“그럼 열세 권째를 읽는다고 생각해라.”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얹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고는 떨어지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에 궁 밖에 나갈 때는 배추 말고 무 광주리에 들어가라. 무 광주리는 수문장이 창으로 안 찌른다. 무가 상하면 수라간에서 값을 물리거든.”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는 진지했다. 이 사람은 이 궁에서 아홉 살 때부터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씩 알아 두며 컸다.
창호지 밖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첫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칠석까지 사흘 남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