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95자)

깨진 귀퉁이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밤 아홉 시 반⁠, 엄학선은 특1호실이 아니라 특2호실로 먼저 들어갔다⁠. 특2호실에는 백두 살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모셔져 있었다⁠. 엄학선은 영정 사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향을 꽂고 두 번 절했다⁠. 상주와 맞절을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야 영정 속 얼굴이 쪽 찐 할머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상주들은 시청 과장이 문상을 온 줄 알고 감격해서 손을 붙잡았다⁠. 엄학선은 할머니가 장수하셨다고⁠, 안동의 자랑이시라고 말하고 나왔다⁠. 손에 시루떡 한 접시를 들고 있었다⁠.

특1호실 앞에서 엄학선은 떡 접시를 든 채 비서와 눈을 마주쳤다⁠.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엄학선은 떡 접시를 비서에게 넘기고 넥타이를 바로 맨 뒤 우리 빈소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영정 사진부터 확인했다⁠. 아버지 얼굴을 한참 보고 나서 향을 꽂았다⁠.

재묵이 식당에서 엄학선의 두 번 절을 다 보았다⁠. 재묵은 시루떡을 얻어먹으러 특2호실에 가 볼까 하다가 미송에게 팔을 꼬집혔다⁠.

엄학선은 쉰여섯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안경테가 얇았다⁠. 상주들과 맞절을 하고 나서 태구의 손을 오래 잡았다⁠. 나에게는 명함을 내밀었다⁠. 「⁠안동시 도시계획과장 엄학선⁠」 장례식장에서 명함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큰따님이시지요⁠.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

장례식장 옥상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화분 몇 개와 벤치 둘⁠, 그리고 재떨이⁠. 밤바람이 시내의 불빛을 쓸고 지나갔다⁠. 엄학선은 벤치에 앉지 않고 난간 앞에 서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불 꺼진 데 보이십니까⁠? 구시장 뒤쪽⁠. 십 년 전에는 저기가 다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안동 인구가 해마다 이천 명씩 줍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구로⁠, 서울로 갑니다⁠. 남는 건 어르신들하고 빈집입니다⁠.⁠”

“⁠과장님⁠, 빈소에서 인구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거예요⁠?⁠”

“⁠빈소니까 하는 겁니다⁠. 회장님도 안동에서 사람을 남기려고 회사를 하신 분입니다⁠.⁠”

엄학선은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공문 초안이었다⁠. 「⁠풍산 일반산업단지 지정 고시(⁠안⁠) · 고시 예정일 2027⁠. 5⁠. 20⁠.⁠」 아래쪽에 지도가 있었고⁠, 빨간 선 안에 풍산 과수원이 들어 있었다⁠. 과수원이 산단 부지의 오분의 이였다⁠.

“⁠소재 공장 두 곳이 들어옵니다⁠. 일자리가 천 개입니다⁠. 지정 고시를 하려면 사업 시행자가 땅의 상당 부분을 확보해야 합니다⁠. 풍산 과수원 동의서가 없으면 고시를 미뤄야 하고⁠, 미루면 공장은 구미나 충북으로 갑니다⁠.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동의서는 땅 주인이 쓰는 거죠⁠.⁠”

“⁠그러니까 큰따님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땅 주인이 누가 될지 큰따님 저고리 안에 있다면서요⁠.⁠”

엄학선은 내 저고리를 똑바로 보았다⁠. 공문을 읽듯 정중한 목소리였다⁠. 내 품의 봉투 두 장을 엄학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범곤이 말했는지⁠, 태구가 말했는지⁠.

“⁠과장님⁠.⁠”

“⁠네⁠.⁠”

“⁠산단 예정지 옆 논에 오늘 입간판이 새로 박혔어요⁠. 매매 완료라고요⁠. 누가 샀는지 아세요⁠?⁠”

엄학선이 안경을 고쳐 썼다⁠. 손가락이 안경테를 두 번 밀었다⁠.

“⁠개인 간 거래까지 시청이 다 알지는 못합니다⁠.⁠”

“⁠고시도 안 했는데 땅이 다 팔렸어요⁠.⁠”

“⁠소문은 늘 고시보다 빠릅니다⁠.⁠”

“⁠소문을 누가 내는지는 아시겠죠⁠.⁠”

엄학선이 나를 보았다⁠. 정중한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큰따님⁠, 저는 안동에 젊은 사람 천 명을 남기려는 겁니다⁠. 천 명이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학교 하나가 안 닫습니다⁠. 그게 회장님 유언장보다 작은 일입니까⁠?⁠”

“⁠작다고 안 했어요⁠. 순서를 물었죠⁠.⁠”

“⁠급하면 사투리가 나옵니더⁠, 저는⁠.⁠”

엄학선은 정말로 사투리로 말하고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비서가 옥상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학선은 명함을 한 장 더 꺼내 내 손에 쥐여 주고 내려갔다⁠.

*

옥상에서 내려오니 재묵이 계단참에서 시루떡을 먹고 있었다⁠. 미송에게 꼬집히고도 결국 특2호실에 다녀왔다⁠. 백두 살 할머니의 손자가 재묵을 시청 과장 일행으로 알고 떡을 두 접시나 싸 주었다고 했다⁠.

“⁠누나⁠, 저 집 대단하다⁠. 할머니가 백두 살인데 증손자가 마흔이다⁠. 상주가 칠십오 세고⁠.⁠”

“⁠떡 먹으러 간 거 아니잖아⁠.⁠”

“⁠먹으러 간 거 맞다⁠. 근데 들은 게 있다⁠.⁠”

재묵이 떡 고물을 털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 집 손자가 풍산 사람이더라⁠. 산단 옆 논 매매 완료 입간판⁠, 그거 산 사람이 엄 과장 처남이란다⁠. 동네가 다 안다더라⁠. 작년 가을에 평당 얼마 주고 샀는데 지금 세 배 부른다꼬⁠.⁠”

“⁠확실해⁠?⁠”

“⁠풍산 사람이 그랬다⁠. 풍산 사람 말은 다 확실하다⁠. 사돈의 팔촌까지 서로 다 아는 동네라⁠.⁠”

재묵은 남은 떡 한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재묵은 떡을 하소옥에게 갖다 주겠다고 휴게실로 갔다⁠. 산단 지도 속 빨간 선 바깥에⁠, 고시보다 먼저 팔린 논이 있었다⁠. 엄학선이 말한 천 명의 일자리는 진짜였고⁠, 처남의 논도 진짜였다⁠. 두 가지가 한 지도에 같이 그려져 있었다⁠.

*

밤 열 시 반⁠, 상주 휴게실에는 하소옥만 있었다⁠. 어머니가 하소옥에게 휴게실 소파를 쓰라고 해 두었다⁠. 하소옥은 소파 끝에 앉아 아버지 약통을 손에 쥐고 있었다⁠. 버리지도 못하고 들고 다니는 약통이었다⁠.

나는 하소옥 맞은편 방석에 앉아 저고리에서 태구의 봉투를 꺼냈다⁠. 하소옥이 일어나려 했다⁠. 앉아 계시라고 했다⁠.

편지지를 펴서 무릎 위 쟁반에 올렸다⁠. 형광등 바로 밑으로 쟁반을 옮겼다⁠. 휴대전화에 컨테이너에서 찍은 도장 사진을 띄워 쟁반 옆에 놓았다⁠. 그리고 확대경을 눈에 댔다⁠.

태구 유언장의 도장⁠. 둥근 테두리 안에 「⁠金判述⁠」 테두리를 시계 방향으로 따라갔다⁠. 열두 시 자리⁠, 세 시 자리⁠, 여섯 시⁠, 아홉 시⁠. 다시 열두 시로 올라오기 직전⁠, 金 자 머리 왼쪽⁠. 하도급 계약서에서는 테두리가 끊겨 있던 자리였다⁠.

테두리가 이어져 있었다⁠. 인주가 고르게 묻었고⁠, 선이 끊긴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확대경을 떼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댔다⁠. 테두리는 여전히 매끈했다⁠. 휴대전화 사진을 손가락으로 벌려 키웠다⁠. 계약서의 도장은 金 자 머리 옆에서 테두리가 둥글게 닳은 채 끊겨 있었다⁠. 두 도장을 나란히 놓고 보니 다른 것도 보였다⁠. 계약서 도장의 判 자는 칼 도(⁠刂⁠) 획이 살짝 휘었고⁠, 유언장 도장의 判 자는 자로 그은 듯 곧았다⁠. 사람 손으로 판 도장과 기계로 판 도장의 차이였다⁠. 述 자의 받침 획은 계약서 도장이 굵고 유언장 도장이 가늘었다⁠.

2023년 9월 2일 정자에서 아버지가 깨진 상아 도장을 찍었다면⁠, 유언장에도 깨진 귀퉁이가 있어야 했다⁠. 유언장에 찍힌 도장은 2024년 1월 상아 도장이 사라진 뒤 2월에 범곤이 시내 인장사에서 파 온 새 도장이었다⁠. 2023년에 쓴 종이에 2024년에 생긴 도장이 찍힐 수는 없었다⁠.

흙으로 치면 층이 뒤집힌 정도가 아니었다⁠. 맨 아래층에서 맨 위층의 물건이 나왔다⁠.

“⁠큰따님⁠.⁠”

하소옥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 손이 떨려 확대경이 쟁반에 부딪혀 소리가 났다⁠.

“⁠괜찮으세요⁠?⁠”

“⁠소옥 씨⁠, 아버지 새 도장 보신 적 있어요⁠?⁠”

“⁠한 번요⁠. 작년 가을에 사위분이 은행 서류 들고 오셨을 때⁠. 상아색 플라스틱이었어요⁠. 아버님이 손에 쥐어 보시더니⁠, 이건 내 도장이 아니다⁠, 가벼워서 못 쓰겠다 하셨어요⁠. 사위분이 서류에 찍고 도로 가져가셨어요⁠.⁠”

“⁠테두리는요⁠?⁠”

“⁠그런 건 모르겠어요⁠. 깨끗했어요⁠. 새거니까⁠.⁠”

나는 편지지를 접었다⁠. 접는 손이 생각보다 느렸다⁠. 미송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내 얼굴을 보고 멈췄다⁠.

“⁠언니⁠, 얼굴이 왜 그래⁠? 혈압 재자⁠.⁠”

“⁠미송아⁠, 새 도장 테두리 기억나⁠?⁠”

미송이 혈압계를 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매끈했지⁠. 인장사 기계로 판 거라⁠. 형부가 상아는 요새 못 판다고⁠, 비슷한 걸로 팠다 카더라⁠.⁠”

미송이 내 팔에 혈압계를 감았다⁠. 백오십팔이었다⁠. 미송은 숫자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혈압계를 풀고 내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언니가 찾은 거⁠, 나도 봐야겠다⁠.⁠”

*

밤 열한 시 사십 분⁠, 빈소에 남은 사람은 가족과 하청 사장 몇과 엄학선이었다⁠. 엄학선은 떠나지 않고 식당 구석에서 태구⁠, 범곤과 소주잔을 두고 앉아 있었다⁠. 도윤구가 상 끝에 붙어 앉아 있었다⁠.

나는 제단 앞으로 갔다⁠. 향 세 대가 반쯤 타 있었다⁠. 새 향에 불을 붙여 꽂고 돌아섰다⁠.

“⁠태구야⁠. 범곤 씨⁠. 잠깐 와 봐요⁠.⁠”

태구가 먼저 일어났다⁠. 범곤이 따라왔다⁠. 엄학선과 도윤구도 일어나 식당 입구에 섰다⁠. 재묵이 드립백 탁자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미송은 하소옥과 함께 휴게실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시내 여관에 방을 잡았다며 아홉 시에 나간 뒤였다⁠.

나는 제단 앞 상에 태구의 유언장을 펴 놓고⁠, 옆에 휴대전화를 놓았다⁠. 화면에는 하도급 계약서의 도장이 크게 떠 있었다⁠.

“⁠이건 도윤구 사장님 하도급 계약서야⁠. 2023년 9월 2일⁠, 정자에서 아버지가 찍으신 도장⁠. 金 자 옆 귀퉁이가 깨져 있지⁠. 사십 년 쓰신 상아 도장⁠.⁠”

나는 확대경을 태구에게 내밀었다⁠. 태구는 받지 않았다⁠.

“⁠이건 니 유언장⁠. 같은 날짜⁠, 같은 정자라면서⁠. 테두리가 매끈해⁠.⁠”

“⁠누나⁠.⁠”

“⁠아버지 상아 도장은 2024년 1월 응급실에서 없어졌어⁠. 2월에 새로 판 게 이거야⁠. 니 유언장에 찍힌 건 새 도장이야⁠. 2023년에 쓴 종이에 2024년에 판 도장이 어떻게 찍혀⁠?⁠”

빈소가 조용했다⁠. 향 타는 냄새만 났다⁠. 도윤구가 한 걸음 다가와 휴대전화 화면과 유언장을 번갈아 보았다⁠. 도윤구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깨진 도장을 안 봐도 안다고 한 사람이었다⁠.

“⁠편지지는 솔잎 무늬 한지야⁠. 2025년 봄에 처음 나왔어⁠. 문방구 영감님이 다 알아보셨어⁠. 주소는 아버지가 2024년 3월에야 옮긴 풍산이고⁠. 이 유언장은 2023년에 쓸 수 없는 종이야⁠. 종이도⁠, 주소도⁠, 도장도⁠.⁠”

“⁠아버지가 나중에 새 도장으로 다시 찍으셨을 수도 있잖아⁠.⁠”

태구의 목소리가 낮았다⁠. 반박이라기보다 마지막 남은 문 하나를 밀어 보는 소리였다⁠.

“⁠그럼 날짜 옆에 고쳐 찍었다고 아버지 손으로 쓰셨어야지⁠. 그리고 아버지는 새 도장을 한 번도 손에 쥐어 보신 적이 없어⁠. 쥐어 보시고 가벼워서 못 쓰겠다 하셨대⁠. 새 도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맡아 뒀어⁠.⁠”

나는 범곤을 보았다⁠. 모두의 눈이 따라왔다⁠.

범곤은 부의금 함을 두 손으로 안고 있었다⁠. 식당에서 일어설 때 습관처럼 들고 나왔다⁠. 범곤의 손가락이 함의 모서리를 쥐었다 놓았다⁠. 돋보기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벗을 돋보기가 없었다⁠.

“⁠장인어른이 맡기신 도장이야⁠.⁠”

“⁠맡기신 도장을 아버지 모르게 어디에 찍었어요⁠?⁠”

부의금 함이 범곤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함이 바닥에 떨어져 뚜껑이 열렸고⁠, 흰 봉투들이 제단 앞 바닥에 흩어졌다⁠. 범곤이 무릎을 꿇고 봉투를 줍기 시작했다⁠. 아무도 돕지 않았다⁠. 엄학선이 비서에게 눈짓을 하고 조용히 빈소를 나갔다⁠.

태구가 유언장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글씨를 닮은 굵은 글씨⁠, 매끈한 도장⁠. 태구가 고개를 들었다⁠.

“⁠누나⁠, 이사회 여섯 시다⁠.⁠”

“⁠알아⁠.⁠”

“⁠그럼 여섯 시까지 다 파 봐라⁠. 내가 왜 이랬는지도⁠.⁠”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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